아트

디스 이즈 힙합

2016.03.15

디스 이즈 힙합

힙합이 여성 혐오로 논란의 중심에 섰다. 이를 향한 쓰레기 음악이라는 비난은 온당할까? 힙합은 원래 그러니까 이해해야 할까? 힙합은 진행형으로 변화하는 존재다.

WOO_39985-1<쇼미더머니>도 벌써 네 번째 시즌이다. 지난 몇 년간 <쇼미더머니>는 수많은 논란을 일으켰고, 그 논란을 먹으며 성장해왔다. 이 과정에서 이 프로그램은 자주 한심하고 뻔뻔했으며, 정작 힙합에 대한 이해와 존중이 없음을 스스로 증명했다. 시즌 4에서도 이 행진(?)은 계속되고 있다. 스눕 독 앞에 선 수십 명의 래퍼들에게 마이크 하나를 쥐여주고 서로 개싸움을 하게 만든 것은 그중에서도 가장 악질적이었다. 이 장면은 한국 힙합 신 전체를 분노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대중적으로 큰 여파를 일으킨 사건은 따로 있었다. 바로 ‘송민호’와 ‘블랙넛’으로 상징되는 ‘여성 혐오’ 논란이 그것이다.

이 논란은 여러 각도에서 조명할 수 있다. 일단 없던 논란이 갑자기 일어난 것이 아니다. 잠재해 있던 것이 송민호라는 대중적 파급력을 지닌 ‘인물’과 <쇼미더머니>라는 ‘매스미디어’에 의해 폭발한 것뿐이다. 또 한국 힙합이라는 ‘장르 신’ 관점에서 보자면 이 논란은 한국 힙합이 언젠가는 맞닥뜨려야 할 ‘운명’이었다. 대중화되고 영향력이 확대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거쳐야 할 순간이 지금인 것뿐이다. 이 논란을 별것 아닌 소동쯤으로 치부하려는 마음은 없다. 한국 사회에서 페미니즘에 관한 논쟁이 그 어느 때보다 활발하고 전향적인 이 시기에 터져나온 이 사건은, 어쩌면 한국 사회와 한국 힙합에 모두 중요한 분기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 나는 “힙합은 원래 그런 거야”라는 무조건적인 옹호도, “힙합 문화는 모두 쓰레기”라는 일방적인 비난도 받아들일 수 없다. 늘 그렇듯 진실은 그 중간 어디 즈음에 있을 것이다.

“죄송합니다. 잘못했습니다. 힙합이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라고 말하려다 보니, 걸리는 건 역시 ‘표현의 자유’ , 그리고 ‘윤리는 예술에 어떻게, 어디까지 개입해야 하는가’라는 문제다. 이와 함께 늘 세트로 떠오르는 건 다른 예술과의 ‘이중 잣대’다. 단적으로 박찬욱의 영화에는 온갖 폭력과 선정이 넘친다. 그러나 누구도 그와 관련해 윤리를 잣대로 문제 삼지 않는다. ‘감독의 예술 세계’라며 당연하게 존중할 뿐이다. 하지만 래퍼들은 표현하나, 단어 하나로 손쉽게 낙인찍힌다. 설마 래퍼들은 예술가가 아닌 건가. 또 몇 년 동안 블랙넛의 일관된 행보와 음악적 지향을 복합적으로 살펴본 후에도 그것은 여전히 ‘쓰레기’일 뿐일까.

‘힙합 문외한’을 자처하는 사람들의 ‘이때다’ 싶은 비판도 불편하긴 마찬가지다. 그들은 일단 “나는 비록 힙합을 잘 모르지만”이라는 방어막을 친후, “내가 아는 힙합은 원래 사회 부조리에 저항하고 삶을 진하게 노래하는 깊고 멋진 것이었는데, 이제 여성이나 혐오하고 돈 자랑이나 해대는 나쁜 것으로 변질되었다”고 말한다. 물론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는 알겠고, 얼추 동의하는 부분도 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빈틈 많은 도식적인 이분법일 뿐이다.

실제로 힙합의 창시자 중 한 명인 디제이 쿨 허크는 백인에게 맞서 싸우기 위해 음악을 틀지 않았다. 그의 인터뷰에는 “흑인, 백인, 황인 할 것 없이 모든 인종의 아이가 서로 어울리고 평화롭게 지내길 바랐다”는 내용이 나온다. 또 그들이 공격하는 힙합의 여성 혐오적인 일부분 역시 요즘 들어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니라 오래전부터, 몇십 년 전부터 존재했다. 물론 래퍼들이 다루는 주제의 비율을 시대 순으로 측정한다면 조금씩 다를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비율이나 경향의 문제이지, 어떤 것이 어떤 것으로 바뀌어버렸다거나, 없던 것이 갑자기 생겨버린 맥락의 문제는 아니다. “옛날엔 이렇게 멋지고 좋던 것이, 지금은 이렇게 추하고 형편없게 변해버렸어”라는 개탄 자체가 오류인 셈이다. 비판하는 대상이 더 악해지려면 내가 전제로 드는 대상은 더 선해야하니까, 자기 입맛대로 전선을 단순화해버린 오류다.

그러나, 그럼에도 아프게 받아들여야 할 지적은 있다. 바로 힙합이 표현의 자유를 ‘소수자’와 ‘약자’를 공격하는 데 사용하는 경향이 분명히 있다는 점이다. 송민호와 블랙넛을 절반밖에 옹호할 수 없는 이유는 그들의 가사가 때때로 소수자와 약자에게 향한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예술로서 힙합이 지닌 고유한 멋과 매력이 보존되어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고, 힙합에 대한 부당한 오해와 편견에 언제라도 맞설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기도 하다. 하지만 한편으론 힙합이라는 예술보다 더 크고 중요한 보편적인 가치가 있다고 믿는 사람이며, 힙합 역시 이 가치에 기여하는 쪽으로 진보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가치란 차별이나 억압, 혐오가 아니라 평등과 인권, 사랑이다. ‘원래’ 그런 건 없다. 설령 힙합이 원래 그랬다 해도 앞으로는 ‘그렇지 않은’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더 좋은 쪽으로 나아가기 위해 스스로를 수정하고 변화시키는 행위는 창피한 일도, 수치스러운 일도 아니다. 더욱이 힙합은 이미 완성되어 박제된 존재가 아니라 지금도 진행형으로 변화하는 존재다. 예를 들어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퍼렐 윌리엄스가 만들어내는 음악은 자주 논란을 일으켰다. 이런 사운드는 힙합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에 와 그 음악을 다시 들어보면 의심의 여지없이 힙합 영역에 속한다. 세월이 흘러 우리가 그 음악을 힙합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퍼렐 윌리엄스의 음악 대신에 또 다른 음악(퍼렐 윌리엄스의 당시 음악보다 힙합의 전통적인 면모에서 더더욱 멀어진 듯한)이 힙합이냐 아니냐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이미 미국 힙합 신에서는 변화의 조짐이 일어나고 있다. 비록 여전히 의견이 분분하고, 여전히 미국 주류 힙합에는 논란의 소지가 가득하긴 하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어떤 래퍼는 자신이 과거에 발표한 여성 혐오적인 가사를 사과하기도 하고, 어떤 래퍼는 미국 힙합 신의 동성애 혐오적인 경향에 반발해 ‘Same Love’라는 노래를 발표하기도 했다. 맞다. 그래미를 수상한 맥클모어다.

물론 우려되는 지점이 있다. ‘진실함’ , 혹은 ‘솔직함’을 장르의 근간으로 하며 인간 감정의 다채로움과 이면, 어두운 부분까지 어떤 음악보다 풍부하게 담아온 힙합은 ‘옳은 것’과 ‘매력적인 것’이 같을 수도 있지만 다를 때가 더 많음을 증명해온 음악이었다. 그러나 만약 이번 논란으로 인해 한국 래퍼들이 앞으로 과도한 자기 검열을 알아서 하게 된다면 분명 안타까운 일이다. 이번 논란을 대하는 한국 언론 대다수의 자세가 균형감에 따른 복합적인 접근이라기보다는 윤리적 관점에 의거해 힙합 자체를 매도하는 행위에 가까웠기에 이런 우려는 더욱 커진다. 한국 힙합이 예술로서 지닌 고유한 멋과 매력은 보존하면서, 소수자와 약자에게 상처 주지 않는 음악으로 거듭나길 바랄 뿐이다.

    김봉현(음악 평론가)
    에디터
    조소현
    포토그래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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