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 스토어의 변신
먹고, 쇼핑하고, 마셔라! 번쩍번쩍한 패션 매장은 신상 쇼핑을 위한 곳이 아니다. 예쁘게 차려입고서 친구와 만나 수다를 떨고 유행하는 먹거리를 즐기는, 패션 스토어의 변신.
디올 플래그십 스토어 내에 카페를 오픈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하우스 오브 디올 5층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면, 칸해변의 레스토랑처럼 정갈한 ‘디올 스노우(디올 그레이 컬러를 하얗게 뺀 느낌의 흰색이기에)’와 탁 트인 테라스 밖 푸른 하늘이 대비되는 카페 디올이 한눈에 들어온다. “낮고 동글동글한 파스텔 컬러 의자들은 피에르 에르메의 마카롱을 본떠서 만든 거예요.” 크리스찬 디올 코리아의 도은하 부장은 매 시즌 새 컬렉션을 선보이듯 피에르 에르메가 직접 개발한 새 메뉴를 맛볼 수 있다고 설명을 이었다. 카페 디올을 위한 무슈 에르메의 첫 번째 시그니처 메뉴는 ‘이스파한 아이스크림 선디’. “장미, 리치와 라즈베리의 조합을 아이스크림으로 해석했습니다. 제가 처음으로 사용한 오‘ 뜨 파티스리(Haute Patisserie)’라는 용어는 디테일과 재료의 질, 창의적인 메뉴, 훌륭한 서비스, 그리고 멋지고 세련된 환경을 갖춘 디저트의 새로운 단계를 뜻하죠.” 그리고 이렇듯 한 단계 올라선 식음료의 신세계에 뛰어들고 있는 건 다름 아닌 패션계다.
아르마니 리스토란테, 카발리 이비자 레스토랑, 샤넬의 베이지 알랭 뒤카스 등 패션 하우스에서 고급 레스토랑을 오픈하는 게 한때 유행한적도 있었다. 그러나 요즘엔 독립된 공간보다 패션 매장 내에 가볍게 쉴 수 있는 카페를 마련하는 게 필수.
뉴욕 5번가 클럽 모나코 매장 한쪽에는 브루클린에서 가장 인기 있는 커피 전문점 ‘토비스 에스테이트 커피’가 자리 잡았고, 같은 거리에 위치한 폴로 플래그십 스토어 2층에는 랄프 로렌의 첫 번째 커피숍인 ‘랄프스 커피’가 올 9월 문을 열었다. 지난봄에는 버버리 하우스가 런던 리젠트 거리의 플래그십 스토어 선물 코너 옆에 ‘토마스’라는 이름의 고상한 와인 바 겸 올데이 카페를 자그마하게 꾸몄다.
무슈 에르메의 표현처럼 오뜨 파티스리와 가장 잘 어울리는 ‘멋지고 세련된 공간’에 하이엔드 패션계보다 적합한 곳이 없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 그러나 우리에게 패션을 제안하는 이들이 왜 먹고 마실 거리를 제공하기 위해 애쓰는 걸까? “우리 고객들이 보다 사교적인 분위기에서 버버리의 세계를 즐기며 쉴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었죠.” 크리스토퍼 베일리의 답은 충분히 예측 가능하다. 버버리에 앞서 리젠트 거리 매장을 리뉴얼하면서 클럽 스타일의 클래식한 바 ‘비피터24(런던탑의 근위병을 뜻하는 말)’를 짜 넣은 영국 남성복 브랜드 해켓 런던의 매니징 디렉터는 고객들이 매장에 머무는 시간을 늘리기 위해서라고 솔직하게 털어놨다. “남자들은 쇼핑할 때 매장에서 불필요하게 많은 시간을 보내지 않는다는 게 일반적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공짜 진과 토닉이 머무는 시간을 늘릴 것이고 판매 증가로 이어질 거라고 판단했죠.” 해켓 측은 바를 설치함으로써 실제로 매상이 두 배로 증가했다고 확신하고 있다. 도버 스트리트 마켓 뉴욕의 매니저 제임스 길크리스트 역시1층의 로즈 베이커리가 사람들이 매장에 머무는 시간을 늘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단언했다. “예를 들어 우리 고객 중 일부는 매장에서 오전 시간을 보내고 (로즈 베이커리에서) 점심을 먹은 다음, 좀더 쇼핑을 하고 오후에 (로즈 베이커리에서) 음료를 마시면서 휴식을 취하니까요.”
전문가들의 의견은 점점 더 많은 고객이 온라인 쇼핑으로 몰리는 요즘, 오프라인 매장에 새로운 즐길 거리를 마련하고 고객들이 방문할 구실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 <체험의 경제학>의 저자 조지프 파인 역시 소비자들은 유대감을 느끼고 기억할 만한 쇼핑 경험에 목말라 있다고 지적한다. 어라운드 더 코너, 라움 등 꾸준히 패션 매장 내에 식음료 공간을 마련해온 LF는 최근 오픈한 현대백화점 판교점 닥스 신사 매장 안에 영국 티 소믈리에가 직접 애프터눈 티를 서빙하는 바와 트와이닝 티 진열대를 설치했다. “닥스가 120년 된 영국 브랜드라는 점에 착안, 영국의 대표적인 티 문화를 경험해볼 수 있도록 했죠.” LF 김민영 차장은 영국의 술 문화도 후보에 올랐지만 대부분 40대 이상 남자 고객들이 쇼핑할 때 아내와 동행한다는 점이 차 문화로 최종 결정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고 귀띔했다. 어라운드 더 코너는 신인 디자이너를 인큐베이팅하는 매장 컨셉에 맞춰 소규모지만 맛집으로 소문난 식음료를 그때그때 들여오고 있다. 어라운드 더 코너를 담당하는 김영아 대리는 한창 맛있는 동네 빵집이 유행하던 때 퍼블리크를, 프리미엄 팝콘이 등장했을 때 몬스터 아이스크림을 끌어들였다. “매장으로 손님을 유인할 무언가가 필요했습니다. 옷은 온라인으로 사더라도 맛있는 것을 먹으러 여전히 밖으로 나가니까요. 소프트리가 지금처럼 큰 인기를 끌기 전 홍대점에 유치했는데, 당시 정말 많은 사람이 매장으로 몰려들었죠.”
센트럴포스트 강원식 대표는 라이프스타일 공간을 꾸미기 위해 아트 디렉터 김지은과 함께 가정집을 개조, 복합 공간을 구성했다. “주택가 골목에 동네 주민들이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카페는 라이프스타일을 즐기기 위해 꼭 필요하죠, 우리의 삶은 입고 읽고 쓰는 것뿐 아니라 먹고 마시고 음미하는 것도 있으니까요.”
패션계가 사람들을 유혹하기 위한 매개체로 식음료를 선택하는 데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위에서 말했듯 사람들은 맛집을 찾아서라면 기꺼이 돌아다닐 용의가 있을 뿐 아니라 TV 프로그램만 보더라도 음식과 요리, 어디에서 무엇을 먹어야 하는지가 최대 관심사임을 보여주고 있다(아이돌 못지않은 셰프의 인기, 셀 수 없이 많은 맛집 소개 프로그램!). 지금 가장 패셔너블한 것이 음식이라는 것. 더불어 외식은 비교적 진입이 쉽고 계속해서 시장 규모가 커지는 산업이다. 요즘 패션계가 관심을 보이는 건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커피 시장. 운동 중독자건, 줄담배를 피우건 어떤 라이프스타일에도 구애받지 않고 심지어 사교적이기까지 한 가장 대중적인 기호식품임은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다.
최근 서울에도 커피와 패션이 공존하는 곳이 늘고 있다. 회색 시멘트 건물의 스투시 매장 옆 작은 공터와 인더스트리얼풍으로 꾸민 2층 ‘더 팬 케이크 에피데믹’은 미국의 3대 스페셜티 브랜드 중 하나인 스‘ 텀프타운 커피’를 맛볼 수 있는 곳이다(종종 패션계 사람들과 마주치는 ‘힙’한 장소).
“처음엔 스투시, 카시나와 별개로 스텀프타운 커피를 국내에 들여오는 게 목적이었죠. 조건이 매우 까다로워서 애를 먹던 차에 LA에 본사를 둔 카페 ‘더 팬케이크 에피데믹’에서 스텀프타운 커피 원두를 사용한다는 걸 알게 됐죠.” 카시나의 김종헌 과장은 도산공원 근처 스투시 매장 건물에 카페를 오픈한 건 의도된 게 아니었다고 설명했다. 스투시 고객과 카페를 찾는 이들은 서로 별개라는 것. 그러나 관심을 보이거나 자문을 얻는 사람이 꽤 많다고 덧붙였다. “패션 신 자체가 예전만큼 이슈가 되지 않으니까요. 전반적인 라이프스타일을 보여주는 식의 다양성, 매장의 변화가 필요한 시점입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스페셜티 커피에 대한 관심은 이제 먹거리에서도 외관보다 질(원두)과 기술력(로스팅)을 더 중요시하는 경향을 반영한다는 것. “사실 규모가 큰 패션 매장은 적막한 경우가 많아요. 선뜻 들어서기 어렵죠. 이럴 때 카페가 있으면 유동 인구가 많아져 부담 없이 매장에 들어설 수 있는 거죠.”
브라운브레스는 본사 사무실을 이전하면서까지 홍대 매장 2층을 비워 널찍한 ‘워드 커피’를 오픈했다. “바리스타 크루 ‘세컨드플레이버’는 매년 다양한 문화를 소개하는 기획 프로젝트를 통해 처음 알게 됐어요. 다양한 관점으로 커피에 접근하고 계속 연구한다는 점에 매력을 느껴 의기투합했죠.” 브라운브레스의 김혜인 홍보 담당자는 워드 커피가 세컨드플레이버만의 특별한 커피를 맛볼 수 있는 장소인 동시에 브랜드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문화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브라운브레스 홍대점은 아이코닉한 장소예요. 단골 고객도 많고,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 매장이기도 하죠. 우리 브랜드의 문화를 공유하기에 가장 적합한 곳입니다. 평소에는 커피숍이지만 라이브 공연과 디제잉, 전시 등 주기적으로 다양한 이벤트가 열리죠.” 이런 추세는 SNS에 새로운 유행을 만들어냈고, 그 현상은다시 패션 매장에 카페가 필요충분조건이 돼야 할 또 다른 이유가 되고 있다. 멋진 옷을 입고(주로 하체만 등장하는!) 한 손에 커피를 든 셀카를 찍어 해시태그 ‘#coffeenclothes’를 달아 올리는 것과 그런 사진만 모은 인기 인스타그램 계정 ‘커피앤클로스’가 그걸 반영한다. 멋진 스타일에 질 좋은 커피를 마시는, 고급 취향에 대한 자랑질인 셈. 이 계정의 주인인 라이언 글릭은 ‘좋아요’ 하트를 많이 받고 많은 댓글이 달리기 위해서는 “진짜 멋진 옷과 커피 한 잔, 풍경이 좋은 장소”를 적절히 섞는 게 중요하며, 테이크아웃 잔이나 로고는 피하라고 충고한다.
자, 이제 우리는 반짝이는 디자이너의 신상 옷과 가방에 둘러싸여 세계적인 파티시에의 디저트를 맛볼 수 있고, 커피 한 잔을 마시러 가더라도 커피의 수준에 걸맞게 머리부터 발끝까지 멋진 차림으로 가게 됐다. 이곳에선 우연찮게 신진 아티스트의 작품을 보거나 흥미로운 음악과 마주칠 수도 있다. 그리고 마무리는 SNS를 위한 예쁘장한 셀카 한 장. 먹고, 쇼핑하고, 마시는 아름다운 하이브리드 인생!
- 에디터
- 송보라
- 포토그래퍼
- CHA HYE KYUNG
- 모델
- 엄유정
- 네일
- 박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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