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없는 tv
TV에서 여자들이 사라졌다. 요즘 웃고 떠들고 마이크를 잡고 있는 건 거의 다 남자들이다. TV는 어쩌다 이렇게 남초의 세상이 되었나.
요즘 TV 오락 프로그램은 남자들 잔치다. 전국을 누비며 미션을 수행하는 것(<1박 2일>)도 남자고, 둘러앉아 각국 문화의 차이를 토론하는 것(<비정상회담>)도 남자다. 심지어 <냉장고를 부탁해>에선 주방에서도 남자가 칼을 든다. 최근 방영 중인 TV 오락 프로그램 <무한도전> <마녀사냥> <비정상회담> <뇌섹시대-문제적 남자> 등의 패널 출연진을 보면 압도적인 남초 현상이다. 여자가 아예 없거나 구색 맞추기용으로 한둘이 껴 있는 수준이다. 그나마 <수요미식회>의 고정패널인 홍신애 요리 연구가처럼 전문성을 필요로 하는 자리에선 여자도 자기 역할을 한다. 하지만 그 밖에 그저 웃음을 주거나 토크의 합을 맞추는 자리에서 여자의 몫은 제로에 가깝다. 여자는 항상 남자들 무리에 손님처럼 찾아오는 1회성 출연(<삼시세끼>의 보아)이거나 서로 차례를 바꿔가며 출연하는 아이돌들의 프로모션성 캐스팅이다. 말로도, 몸으로도 잘 웃기는 송은이와 김숙은 지금 팟캐스트 방송(<비밀보장>)으로 밀려나있고, 태평한 템포로 뜬금포의 웃음을 곧잘 날리던 박미선은 <해피투게더 3>의 민망한 보조 MC로 앉아 있다. 한때 여자들끼리 모여 미션을 수행하는 <무한걸스> 같은 프로그램이 있었지만, 그 역시 케이블 채널 한 귀퉁이에서였다. 지금 오락 프로그램에서 여자들이 떠들 자리는 없다.
<꽃보다> 시리즈, <삼시세끼> 시리즈 등 연달아 히트작을 만든 나영석 PD는 또 한 번 남자 무리로 역할극을 꾸렸다. 네이버 TV에서 9월 4일 첫 방송된 <신서유기>는 <서유기>의 설정을 현재 대한민국으로 가져와 펼치는 남자들의 갱생 프로젝트다. 나영석 PD의 단골손님과도 같은 강호동, 이승기, 이수근, 은지원이 뭉쳤고, 매회 미션을 수행해간다. 남자 냄새 풀풀 나는 이 탄탄한 라인업에 여자가 낄 자리는 없다. 물론 제작진 입장에선 캐릭터를 구성하고 프로그램의 합을 맞추는 데 남자끼리의 관계가 더 용이할 수 있다. 실제로 나영석 PD는 <신서유기>의 멤버를 꾸리며 “한때 잘나가던 4인방이 어느새 모자란 인물이 됐으니 다시 밑바닥부터 재미있게 시작해보자는 취지”라고 설명했다. <1박 2일>을 통해 이미 다진 브로맨스의 코미디를 다시 활용하겠다는 얘기다. 위아래 서열이 확실한 남자들 무리 사이에서 공과 수의 역할은 별 잡음 없이 나뉘고 그에 맞는 캐릭터가 쉽게 완성된다. 근래의 오락 프로그램이 스튜디오의 토크쇼보다 야외 로케이션 버라이어티를 선호하는 것 역시 TV 남초 현상의 한 요인일수 있다. 고리타분한 얘기 같지만 좀더 과격하고, 좀더 드라마틱한 웃음을 요구하는 TV에서 여전히 남녀의 성 역할은 존재한다.
물론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구성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건 성별이 아닌 타깃일 것이다. 성시경과 신동엽 콤비의 <오늘 뭐 먹지?>, 데프콘과 김진표 조합의 <겟 잇 기어> 등을 연출한 CJ E&M의 석정호 CP는 “요리 잘 못하는 남자들이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오늘 뭐 먹지?>를, 남자들만의 취향을 남자의 시선으로 전달하고자 <겟 잇 기어>를 기획했다”고 말했다. 출연진의 성별은 프로그램 주제에 맞춰 자연스레 따라 온다는 얘기다. 하지만 그 자연스러운 흐름 속엔 여전히 남성 중심의 콘텐츠가 있다. “요리 프로그램에서 여자 출연자가 요리하는 모습보단 남자출연자가 요리하는 게 풍부한 드라마를 만들어낼 여지가 크다고 느껴진다. 남녀의 능력 차이가 아니라, 감성이나 취향 면에서 토크를 한다고 할 때 남자가 더 넓은 범위의 주제를 다룰 수 있다고 느낀다. 가령 여자의 취향은 남자가 대신 나름의 재미로 전할 수 있지만, 남자의 취향을 여자가 대신하면 재미가 없어지는 거다.” 석정호 CP의 얘기다. 확실히 대중적으론 오늘 뭐 먹을지 고민하는 여자보단 남자가, 어제 갓 출시된 게임기를 들고파는 여자보단 남자가 더 그럴듯한 그림을 그려낸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니까 요리, 혹은 하나의 기어를 두고 접근할 때 남자가 여자보다
더 다양한 이야기, 색다른 시선으로 이야기를 뽑아낸다는 얘기다.
하지만 사실 오락 방송에서 여자들이 차별받는 건 프로그램 구조상, 혹은 보다 더 많은 웃음을 위해서만은 아니다. 얼마 전 방송인 이금희가 다큐 프로그램에 출연하며 10년 전 그녀가 받았던 외모 지적이 다시금 논란이 됐다. 2000년 프리를 선언하고 퀴즈 프로그램을 진행하던 당시 “너무 뚱뚱하다” “프로답지 못하다”는 비난에 시달렸기 때문이다.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데, 시청자에게 감동과 웃음을 주는 데 여자 출연자는 일단 외모를 갖춰야 한다는 얘기다. 대중문화 웹진 <아이즈>의 최지은 기자는 “대중이 TV 속 여자의 외모, 그리고 행동에 보다 더 엄격한 점이 오락 프로그램이 남성 중심으로 흘러가는 이유”라고 설명했다. 얼마 전 촬영 중 싸움으로 소란이 일었던 이태임, 예원의 사례가 대표적인 예다. 그러니까 여자 출연진의 경우 프로그램과 무관하게 잡음이 일 요소가 많고, 제작진은 괜한 위험을 무릅쓰며 여자 캐스팅을 고집할 이유가 없는 거다. 최지은 기자는 “오락 프로그램의 트렌드는 계속 조금씩 변하지만 그게 남성 중심이라는 데에는 변함이 없어요. 모두가 그저 익숙한 포맷, 이야기 구조에 기대는 거죠”라고도 지적했다. TV의 남녀 성 불균형이 하루, 이틀에 해결될 수 있는 문제는 아닐 것이다. 상대에 대한 비하도 종종 유머
로 간과되곤 하는 업계에서 매번 여자 출연진의 비율을 따지고 넘어가기도 힘들다. 다만 한바탕 웃음 뒤에 약간의 찜찜함이 남는다면 채널을 좀 돌아봐야 하지 않을까. 확실히 단언컨대 여자들도 남자들만큼 웃기다.
- 에디터
- 정재혁
- 포토그래퍼
- HWANG IN W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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