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토리안 스타일이 돌아왔다
빅토리안 스타일이 돌아왔다. 물론 디킨스와 브론테 자매 소설의 여주인공이 입던 옷과 전혀 다르다. 올가을 현대적으로 변신한 빅토리안 스타일의 다크 로맨스.
“그 빅토리안 블라우스 아름다웠지?” “난 빅토리아나 스타일이 좋아. 목을 감싼 느낌이 좋았어. 또 트위드 코트와 입으면 에드워디안 느낌도 났어.” 2월 13일 알투자라 쇼가 끝난 뉴욕 소호의 스프링 스튜디오. 다시 1층으로 향하기 위해 거대한 화물용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관객들은 저마다 감흥을 나누고 있었다. 그 짧은 대화 가운데 가장 많이 들려온 단어는 ‘빅토리안’. 모두들 ‘바로 그 빅토리안 블라우스’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러자 함께 쇼를 감상한 <보그 코리아> 사진가가 이렇게 물었다. “대체 빅토리안 스타일이 뭘 말하는 거야?”
“19세기 영국 귀족 스타일”이라고 얼버무렸지만, 그 질문은 뉴욕부터 이어진 올가을 패션 위크를 지켜보는 내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알투자라를 비롯해 마크 제이콥스, 로다테 등 뉴욕 디자이너들이 모던 빅토리안 스타일을 선보였다면, 런던의 템펄리 런던, 자일스 등은 빅토리안을 고딕풍으로 해석했다. 알베르타 페레티, 에밀리오 푸치 등밀라노파는 로맨틱하게, 파리의 지방시와 알렉산더 맥퀸은 반항적이면서도 드라마틱하게 빅토리안 스타일을 표현했다. 이쯤 되면 빅토리안에 대한 현재적 정의가 필요하다.
“1837년부터 1901년까지 빅토리아 여왕이 지배하던 빅토리아 시대 중 영국은 산업혁명, 사회 개혁, 그리고 과학과 기술, 문화의 발전으로 인해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나라로 자리 잡았다. 1851년 수정궁에서 열린 대박람회는 빅토리아 시대 전반에 이르는 예술과 디자인의 발전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영국의 장식 예술과 패션, 디자인에 관한 모든 것을 망라하는 빅토리아&앨버트 뮤지엄 홈페이지에서 ‘빅토리아 시대’를 검색하면 이런 정의를 읽을 수 있다. 빅토리아 시대에 대한 역사적 자료를 습득했다면, 당시 여성의 옷차림을 살펴볼 차례. 하지만 홈페이지의 복식사를 살펴보면 빅토리아 시대의 드레스는 대부분 대형 페티코트로 웅장한 실루엣을 만들거나(치마 안에 철사로 새장 같은 형태를 숨기는), 코르셋을 통해 잘록한 허리를 만들곤 한다. 런웨이에 등장한 현대 버전과는 지나온 세월만큼 거리감이 느껴지는 형태.
“빅토리아나(Victoriana)는 새롭게 주목해야 할 단어다.” 미국 <보그>는 9월호 화보에서 빅토리안 스타일에 대해 궁금해하는 이들에게 답변했다. “요즘 멋쟁이 해적들은 부풀어 오른 소매와 꽃무늬, 주름 장식, 그리고 흑옥을 입는다. 그리고 오래된 레이스가 새롭게 변신했다.” 현대적으로 다시 태어난 빅토리안 스타일의 힌트가 거기에 모두 숨어 있다. 엄청난 길이의 소재를 사용한 대형 스커트 대신 날씬하게 뻗은 실루엣, 당시 화가가 그렸을 법한 회화적인 꽃무늬, 80년대식 파워 숄더, 혹은 초승달 곡선을 그리는 풍성한 소매, 목을 가리는 다양한 장식, 레이스, 벨벳, 시폰 등 호사스러운 소재 등등. 또 앨버트 공의 죽음을 기리던 빅토리아 여왕(남편이 세상을 떠난 뒤 40년간 검정 옷만 입었다)이 선호한 흑옥 장식도 빼놓을 수 없다. 뭐니 뭐니 해도 우아한 여성성에 대한 찬사!
그렇다면 올가을 빅토리안 스타일 멋쟁이로 다시 태어나는 방법은 뭘까? “이번 시즌 빅토리아나 무드에는 어두운 고딕풍의 분위기가 존재해요. 그거야말로 아주 현대적이죠.” 인터넷 세상의 멀티숍 네타포르테가 펼치는 오프라인 패션지 <포터>의 패션 에디터 모건 필처(Morgan Pilcher)는 이렇게 해석했다. “저라면 끌로에 런웨이에서 본 것처럼 기다란 화이트 드레스에 폭이 좁은 스카프와 조끼처럼 로큰롤 아이템을 더할 거예요.” 지방시의 리카르도 티시 역시 그녀의 의견에 동의할 만하다. 티시는 빅토리안 스타일에 히스패닉 소녀 갱의 느낌을 더해 ‘Chola Victorian’이라는 이미지를 완성했다. 가슴을 레이스로 장식한 검정 드레스, 흑옥 비즈 장식 코트와 톱에는 터프한 분위기가 가득했다. 남편을 그리워하는 여왕보다 클럽 뒷골목을 장악하는 멋쟁이 깡패 소녀.
19세기와 달라진 건 또 있다. 바로 은은한 노출에 대한 아이디어다. 피아노에 앉았을 때 발목이 보일까 봐 피아노 옆을 모두 레이스로 감싼 빅토리아 시대의 여성은 이제 더는 없다. 레이스와 시폰으로 속살이 비치는 블라우스야말로 지금 여성에게 어필할 만하다. “이러한 블라우스는 매우 로맨틱하면서도 소녀성을 암시하고 여유로운 우아함을 상징 하죠.” 에로틱 회화의 대가 루치안 프로이트의 딸이자 영국 소설가 수지 보이트(Susie Boyt)는 그 블라우스가 상징하는 분위기를 이렇게 표현했다(빅토리안 블라우스가 선사하는 로맨틱한 멋을 사랑하는 그녀는 스타일 제안까지 덧붙였다). “해가 떠 있을 땐 빅토리안 블라우스의 엄격함을 반전시키기 위해 데님 스커트와 뾰족한 구두를 함께 매치하겠죠. 하지만 저녁이라면 모든 걸 걸어보세요.” 레이스와 시폰이 주는 야릇한 멋에 빠져보라는 제안이다.
디자이너들이 일제히 빅토리아 시대로 시간 여행을 떠난 이유를 정확히 꼬집긴 어렵다. 빅토리아 시대를 편애하던 맥퀸 회고전이 런던으로 옮겨서 그렇거나, 흡혈귀나 늑대 인간, 프랑켄슈타인이 빅토리아 시대를 배경으로 등장하는 미국 TV 시리즈 <페니 드레드풀(Penny Dreadful)>의 인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가장 아름다운 빅토리안 의상을 만날 수 있는 영화 <행잉록에서의 소풍>이 개봉 40주년을 맞아 다시 주목받기 때문일 수도 있다. 또 11월 28일 런던 빅토리아&앨버트 뮤지엄에서는 빅토리아 시대 당시 활동했던 사진가 줄리아 마가렛 카메론(Julia Margaret Cameron)의 전시도 열린다. 이처럼 지금 패션계는 빅토리아 시대의 로맨틱한 분위기로 가득하다. 한동안 모던함을 부르짖던 패션계에 빅토리안 스타일은 여성들만이 누릴 수 있는 반가운 비밀이다.
- 에디터
- 손기호
- 포토그래퍼
- DAVID SIMS, INDIGITAL, JULIA MARGARET CAMERON/ VICTORIA & ALBERT MUSEUM, COURTESY PHOT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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