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욱의 베토벤
피아니스트 김선욱이 다시 한 번 베토벤의 문을 열었다. 근래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5곡, 피아노 소나타 32곡을 완주한 그는 이번에 첼리스트 이상 엔더스와 첼로와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 5곡을 무대에 올렸다. 마치 베토벤이란 큰 산에 올라서듯 진중한 걸음으로 만들어내는 깊고 청명한 소리에 새로운 풍경이 펼쳐졌다.
2013년 김선욱은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32곡을 모두 완주했다. 2년에 이르는 총 8회 공연이었고, 베토벤 피아노 협주 곡 5곡을 모두 완주한 뒤였다. 무려 16시간에 이르는 연주. 그리고 그는 지난 8월 첼리스트 이상 엔더스와 함께 베토벤의 첼로와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 5곡을 완주했다. 베토벤이 일생에 걸쳐 썼다는 첼로와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는 당시 흔치 않았던 이중주의 첼로 악곡으로 화려함과 어둠, 고독한 기품과 당당함이 고루 표현된 곡이다. 김선욱은 마치 탐구자의 자세로 베토벤을 읽는다. 부감, 혹은 양각, 또는 측면의 앵글로 사물을 바라보듯, 조금씩 다른 프레임으로 세상을 마주하듯 베토벤을 연주하고 또 연주한다. 2001년 첫 번째 독주회에서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7번을 연주한 이후 베토벤은 김선욱의 꾸준한 레퍼토리였고, 김선욱은 독주, 협주, 앙상블 등 다양한 형태로 베토벤의 음악을 읽어냈다. 그리고 김선욱은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두 곡을 골라 첫 번째 독주 앨범을 10월 발표한다. 화려함이나 기교의 유혹에 빠지지 않고, 200여 년 전의 악보를 갈고 또 닦아내는 모습이 엄숙한 수행자의 면모 같다. 김선욱에게 베토벤은 음악이란 산을 바라보는 큰 만화경이다.
공연 2일째 대기실에서 김선욱을 만났다. 공연 전 연주자라면 으레 예민해져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는 편안한 티셔츠 차림으로 공연을 준비하고 있었다. 2013년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전곡 완주 이후 김선욱은 쉼 없이 달려왔다. 2012년엔 러시아의 대표 피아니스트 엘리자베스 레온스카야의 대타로 존 엘리엇 가디너 지휘의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4번을 연주했고, 2013년 8월에는 세계적인 클래식 음악 축제, 영국 BBC 프롬스(Promms)에도 데뷔했다. ‘베토벤 전문 연주자’라는 오해에 살짝 반항이라도 하듯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완주를 마친 뒤에는 바흐, 프랑크로 전국을 돌기도 했다. 진은숙의 3개의 협주곡 음반 녹음, 정명훈이 지휘하는 서울시립교향악단과 함께한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5번 녹음 등 공연장 밖에서의 활동에도 충실했다. 데뷔 이후 10년이 넘게 흘렀지만 김선욱은 아직 다 마치지 못한 과제를 찾아내듯 베토벤을 꺼낸다. 그리고 묵묵히 수행해낸다. 열정과 재능의 빛이, 그리고 심사숙고의 노력이 황금과 같은 음악을 만들어낸다. 베토벤의 음악이 그렇게 200여 년을 거슬러 다시 한 번 연주된다.
이번 베토벤의 첼로와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는 2회로 나뉜 프로그램이었는데요. 어제 공연은 어땠나요?
한국 공연이 좋은 게 ‘관객들이 정말 집중해서 듣고 있구나’ 느껴진다는 점입니다. 연주하는 사람으로서 더 스릴 있고, 긴장도 많이 되고, 빠져들어 하게 되는 것 같아요. 어제 공연이 그랬습니다. 함께한 이상 엔더스도 그렇고, 저도 무대를 좋아하니까요. 무대를 좋아하지 않으면 자신 있게 연주하기가 힘든데, 어젠 잘된 것 같습니다.
1회 차 공연에선 1번과 2번, 그리고 5번을 모차르트의 <마술피리> 7개의 변주곡과 함께 연주했고, 2회 차 공연에선 나머지 3번과 4번을 헨델의 <유다스 마카베우스> 주제에 의한 12개의 변주곡과 함께 공연했습니다. 이렇게 나눈 기준은 어떤 거였나요?
일단 5곡을 하루에 다 하는 건 물리적으로 힘들고요.(웃음) 1번부터 차례로 할 수도 있지만 그럼 CD 듣는 것과 다름이 없지요. 콘서트라는 것도 고려해야 하고, 그 기승전결을 떠올리며 나름대로 프로그램을 짰습니다. 첫 곡이 좀 밝았다면 두 번째는 좀 어둡게 한다든가, 그런 나름의 스토리죠.
이상 엔더스와는 어떻게 알게 된 사이인가요? 작곡가 진은숙이 계기가 됐다고 들었습니다.
예전에 진은숙 선생님이랑 식사 자리에서 만났어요. 그리고 진은숙 선생님이 너희 둘 잘 어울릴 것 같다고, 같이 해보라고 하셨죠. 그렇게 연습 몇 번 해보면서 언제 공연 같이 하자고 했어요. 보통 공연할 때 최소 1년 전부터 준비하거든요. 그렇게 얘기가 계속 진행된거죠.
88년생 동갑으로 알고 있는데, 호흡은 어땠나요?
좋아요. 잘해요. 그 친구가 센스도 있고요. 어제 보셔서 아시겠지만 첼로의 다양한 소리를 참 잘 내잖아요. 또 무엇보다 진지하고요. 절대 막 보여주려고 하지 않는 태도가 저랑 잘 맞아요.
지안 왕, 카미오 마유코와의 트리오, 그리고 이번의 듀오 콘서트, 예정되어 있는 이마이 노부코와의 실내악 연주 등, 근래엔 앙상블 공연이 잦게 느껴지는데요. 연주하시는 입장에선 독주와 어떻게 다른가요?
일단 앙상블을 하게 되면 사전에 상의하고, 약속하고 들어가죠. 그리고는 무대에서 그걸 얼마나 잘하느냐가 중요한 것 같습니다. 혼자 솔로를 할 때는 무대에 저 말고 아무도 없잖아요. 홀로 남겨진 느낌이 강해요. 또 피아니스트들은 보통 혼자 연습하는 경우가 많으니까 듀오를 하면 재밌어요. 긴장도 덜하고요. 독주 때 100 정도 긴장한다면 어제는 50 정도였달까요.
피아노 협주곡 5곡 완주, 소나타 32곡 완주. 그리고 이번엔 첼로와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 5곡까지. 계속 베토벤에 매달리는 이유는 뭔가요?
매달리는 건 아니에요. 그냥 전 아직 나이도 어리고, 할 곡도 많은데 베토벤은 모든 클래식의 근본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기본이고 말 그대로 클래식이죠. 책을 읽어도 절대 변하지 않는 고전소설의 맛이란 게있잖아요. 끝까지 변하지 않는 것. 베토벤은 제게 그런 존재여서 계속 지나칠 수가 없어요.
베토벤 음악의 어떤 부분에 끌리는 건가요?
이번에 연주하는 피아노와 첼로를 위한 소나타를 포함해서 베토벤의 음악은 인간적이에요. 그의 일생을 생각해보면 정말 ‘내 인생 왜 이러냐’ 정도거든요.(웃음) 얼굴도 진짜 못생겼고, 키도 작고, 연애도 하려고 했으나 진짜 좋아하는 여자랑은 이뤄지지 않았고. 요즘식으로 말하면 루저예요. 그래서 음악이 더 인간적이죠. 절대 뭔가 치장하는 게 없어요. 그런 진솔한 이야기가 음악에서도 느껴져요. 게다가 중간부터는 귀도 안 들리기 시작했으니 얼마나 답답했겠어요. 죽으려고도 많이 했고, 말년에는 듣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곡을 썼는데 그 고독함을 생각하면 그의 음악이 남다르게 느껴져요. 그런 것 때문에 훨씬 더 감동이 전해지기도 하고요. 베토벤 음악은 어법도 훌륭하고 전달력, 호소력은 물론 지금 들어도 새롭게 느껴지는 참신함이 있어요. 그래서 고전으로 평가받는 것 같고요.
2013년 베토벤 소나타 32곡을 완주하고 나서 완벽한 연주는 하나도 없었다고 말한 걸 봤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완벽하지 않았다는 건가요?
제가 그저 음악 애호가가 아닌 연주자이기 때문에 내가 하는 것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원하는 게 뭔지 100% 알고 있어야 그걸 전달할 수 있는 기운이 생겨요. 그래서 내가 이 음악에서 원하는 게 뭔지, 무엇을 전달하고자 하는지 아는 게 가장 중요합니다. 소리, 박자, 음악의 흐름. 이런 게 연주 전에 성립돼 있어야 해요. 근데 무대라는 게 한 번밖에 없는 기회고, 그러다 보니 모든 게 다 이뤄질 순 없잖아요. 그런 의미에서 만족하지 못했다고 말한 것 같아요. 그래도 연주를 계속하면서 변화가 많이 생겼어요. 여유도 늘었고, 연주를 하며 이야기를 전달하는 것에 있어서도 조금 더 능숙해졌달까요.
피아노 소나타 32곡 완주는 거의 2년에 걸친 공연이었는데요. 마치고 나니 새로 보이는 베토벤이 있던가요?
더 존경심도 깊어졌고요, 음악 하기 참 잘했다 싶었어요. 이걸 내가 연주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행운인지. 계속 베토벤만 치는 것처럼 비쳐서(웃음) 좀 그렇긴한데 아마도 계속하게 될 것 같아요. 평생 연주하게 될 작곡가예요.
모 인터뷰에서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은 당장 내일 누군가의 대타로 나가도 할 수 있다고 말했어요. 실제로 그만큼 많이 연주했고요. 같은 작곡가의 같은 넘버를 반복해 연주하다 보면 접근이 달라지나요?
그렇죠. 연주의 속성상 제가 똑같이 하고 싶다고 똑같아질 수 없는 것 같아요. 그래서 반복해 연주하다 보면 예전엔 안 보이던 그림이 보이거나 몰랐던 것을 알게 되곤 하죠. 신기해요. 악보는 변하는 게 아닌데 무언가 이렇게 변해간다는 게. 사람 사는 거랑 마찬가지죠. 예전엔 싫었는데 지금은 좋아지거나, 예전엔 좋아했는데 이제는 싫어지거나 하잖아요. 음악도 그래요. 과거엔 너무 디테일하게 봐온 것을 사실 큰 그림으로 연주해야 한다고 느낄 때도 있고, 그 반대일 때도 있고요. 그리고 연주자의 역할은 일단 악보를 충분히 숙지하고 지키는 것이라 생각해요. 악보에 적혀 있는 것을 읽어내는 게 가장 중요해요. 그리고는 소리의 질감을 표현하는 게 연주자의 역할이에요. 사람 손가락은 다 다르게 생겼기 때문에 똑같이 피아노 건반을 눌러도 소리가 다르게 나와요. 그래서 내가 여기서 내고 싶은 소리, 전달하고 싶은 소리가 무엇일까 고민하는 것 자체가 연주를 만들어내요. 어떤 음표는 똑같은 건반이어도 수십 킬로그램의 무게로 누를 때처럼 칠 때도 있고, 또 어떤 음표는 마치 손으로 젤리를 만지듯 연주할 때도 있어요.
지난해엔 작곡가 진은숙의 3개의 협주곡 녹음도 했어요. 사실 베토벤을 중심으로 고전음악의 인상이 커서 현대음악이 어땠을까 싶어요.
되게 좋았어요. 일단 베토벤은 200년 전 사람이잖아요. 근데 현존하는 작곡가의 작품을, 작곡가 앞에서 연주하고 녹음한다는 건 제게 영광스러운 일이었어요. 어렵고 쉽고를 떠나서 21세기를 살아가는 음악가라면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라 생각했죠. 그리고 현대음악도 매우 좋아해요. 대학 재학 중에는 현대음악 반주자로 다들 저랑 (손)열음이 누나를 찾았어요. 저보다 2년 선배였거든요.
조금 과거로 올라가면 2006년 리즈 콩쿠르에서 우승한 뒤 “우승은 타이틀이 중요한 게 아니라 앞으로 100번 정도 더 연주할 기회를 얻었다는 뜻이다”라고 얘기한 걸 봤어요. 당시 열여덟 살이었는데 매우 조숙하단 느낌을 받았어요.
스포츠는 올림픽 메달이 최종 목표잖 아요. 그걸 위해 달리고, 뛰어요. 그리고 메달을 딴 뒤에는 다시 목표를 세우기 힘들죠. 음악에 있어서 콩쿠르는 올림픽과 매우 비슷하긴 한데 좀 달라요. 콩쿠르에 나가는 게 일종의 껍질을 벗는 거랄까요. 그때부터 비로소 정글에 진입하게 되는 거죠. 우승했다고 안정적인 커리어가 보장되는 게 아니니까요. 공연의 호응이 좋아야 기획자가 2년 후에 다시 한 번 하자고 얘기해주는 거죠. 그것의 반복이에요. 그래서 콩쿠르보다 공연에서 연주할 때 더 중압감이 커요. 스트레스도 받고요. 물론 성취감도 크지만요.
피아노와 함께 바이올린도 전공했는데, 두 악기 사이에서 피아노를 선택한 이유는 뭔가요?
둘 다 잘할 순 없잖아요. 빨리 결론을 내려야죠. 피아노 연습을 3시간 한다면 바이올린도 3시간 해야 하고, 레슨을 받으러 간다고 해도 1회가 2회가 돼요. 음악도 반드시 노동의 시간을 드러내기 때문에 물리적으로 같이 하는 건 힘들었어요. 마치 축구와 야구를 같이 하는 선수와 같아요. 또 피아노는 음정 맞출 필요 없으니 바이올린과 달리 귀찮지도 않고요.(웃음) 반주자 대동할 필요도 없고. 무엇보다 피아노를 바이올린보다 더 잘했거든요. 무대병 걸리면 안 되는데 확실히 독주를 하면 혼자 2시간을 이끌어가는 희열, 흥분이 있어요. 일종의 카타르시스, 아드레날린에 중독되죠.
얼마 전 런던에서 결혼했고, 아들도 태어났어요. 가정환경의 변화가 음악을 하는 데 영향을 주던가요?
결혼하고 나서 음악 하는 자아와 그 외의 자아가 완전히 분리된 것 같아요. 음악 하는 하루 3~4시간을 제외하고는 음악을전혀 생각하지 않으려고 해요. 예전엔 계속 음악 생각만 했거든요. 근데 이제 균형 맞춰 잘하고 있는 것 같아요. 음악을 하지 않을 때는 와인도 마시러 가고, 여행 가면 혼자 여기저기 돌아다니기도 하고요. 음악에서 내가 해야 하는 것, 그걸로 인한 스트레스는 어차피 내가 감당하고 풀어내야 하는 것이니까 그 외의 시간엔 그냥 일상을 즐기려고 하죠.
10월에 첫 독주 앨범이 발매된다고 들었어요. 어떤 앨범인가요?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두 곡을 녹음한 거예요. 독일이 음향 좋은 홀도 많고, 실력 좋은 톤 마스터들도 많아 베를린에서 했어요. 나름대로 공을 많이 들인 앨범이에요. 제가 제일 좋아하는 스타인웨이 피아노가 파리에 있는데 그걸 베를린으로 공수했고요. 지휘자 카라얀도 좋아했고, 예전 베를린 필하모니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던 교회에서 녹음을 했어요. 모든 것의 합이 잘 맞은 작업이었어요. 저도 기대하고 있어요.
2014년 영국 왕립음악원에서 지휘자 석사과정을 마쳤어요. 지휘에 대한 욕심도 있는 건가요?
축구 잘한다고 좋은 감독이 될 순 없는 것 같아요. 둘 다 같이 하는 건 굉장히 어려워요. 저에겐 아직 지휘 경험이 더 많이 필요하고요.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할 수는 있겠지만 지금 당장은 제가 피아노로 활동하는 것이 있고, 그걸 더 하고 싶어요.
계속 음악을 하게 되는 이유, 여러 가지 힘든 일이 있어도 움직이는 동력은 뭔가요?
그냥 음악 자체가 주는 힘에 이끌려가는 것 같아요. 사람마다 음악의 가치가 다르고, 음악이 존재하는 이유도 다르지만 전 일단 근본적으로 제가 누군가에게 음악을 전달할 수 있다는 것, 그걸 듣고 누군가 기뻐할 수 있다는 게 정말 행복한 일인 것 같아요. 또 무대에서의 짜릿함이랄까요. 이 모든 게 일상화되었어요. 더 이상 분리해서 생각되지 않죠. 그냥 자연스럽게, 감사하면서, 그렇게 살아요
- 에디터
- 정재혁
- 포토그래퍼
- CHA HYE KYUNG, DOH 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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