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계의 쿠바 이야기
지난 60년간 베일 뒤에 숨어 있던 쿠바가 새로운 영감의 발원지로 떠올랐다. 반도네온의 멜로디가 울려 퍼지기 시작한 패션계의 쿠바 이야기.
6월 8일, 스텔라 맥카트니 2016 리조트 컬렉션이 발표된 뉴욕 놀리타의 엘리자베스 거리 정원은 잔치 분위기로 떠들썩했다. 죽마를 탄 광대가 손님들을 맞았고, 럼을 섞은 독한 칵테일에 취한 관객이 분위기에 들떠 살사 밴드의 음악에 맞춰 몸을 움직였다. 정숙한 분위기에서 새 옷을 감상하는 평범한 프레젠테이션 현장이 아니었다. 체 게바라와 피델 카스트로로 분장한 이들은 모델들과 함께 도미노 게임을 하는가 하면 관객에게 나눠준 초콜릿 시가를 피우며 카메라 앞에서 끼를 부렸다. 말 그대로 쿠바 냄새가 물씬 풍기는 ‘아바나 나이트’. 쿠바에서 영감을 얻은 컬렉션을 기념하기 위해 맥카트니가 준비한 유쾌한 소동이었다.
리조트 컬렉션을 통해 쿠바에 대한 애정을 드러낸 건 맥카트니뿐만이 아니었다. 프로엔자 스쿨러의 잭 맥콜로와 라자로 헤르난데스는 지난 3월 쿠바로 여행을 떠났다. 쿠바 이민자 출신인 헤르난데스에게는 자신의 뿌리를 찾는 뜻깊은 여정이었다. 그는 한 번도 만나지 못한 먼 친척을 만나는 동시에 새 컬렉션에 대한 영감도 찾았다. 그리하여 도회적인 스타일과 쿠바와 라틴의 정열을 혼합한 결과, 열대식물 문양과 부드러운 러플 드레스는 프로엔자 스쿨러적인 동시에 쿠바다웠다. 그들은 리조트 컬렉션만으로 부족했는지, 내년 봄 컬렉션에도 쿠바 스타일을 가미했다. “우리는 한 번도 각자의 개인사를 기본으로 작업하지 않았어요.” 헤르난데스는 난생처음 자신의 이야기를 컬렉션에 풀어냈다. 러플과 층층이 흘러내리는 소재, 빨강과 검정의 조합은 쿠바 세뇨리타 그 자체. “쿠바의 긍정적 영혼을 담고 싶었죠.”
이렇듯 패션계가 쿠바에 끌리고 있다. 물론 쿠바만 고집하진 않았으나, 라틴아메리카 분위기의 컬렉션을 선보인 디자이너는 많았다. 쿠바 옆에 위치한 파나마 제도의 전통 비즈 장식에서 영감을 얻은 알투자라, 야자수 무늬로 드레스를 장식한 마크 제이콥스, 그리고 멀리 떨어진 브라질 이파네마로 떠난 런던의 신예 마르케스 알메이다 등등. 여기에 플라멩코 무희가 연상되는 아름다운 플리츠와 러플 장식을 선보인 오스카 드 라 렌타의 피터 코팽까지.
그렇다고 디자이너들만 쿠바 분위기에 취한 건 아니다. 지난 5월 리한나는 11월호 <배니티 페어> 커버 촬영을 위해 애니 레보비츠와 함께 아바나를 찾았다. 또 <T매거진>이나 네타 포르테의 <포터> 등도 쿠바 현지에서 화보와 여행 기사를 전했다. 그런가 하면 미국 <보그>는 쿠바에서 머물 만한 호텔을 추천하고, <W>는 모델 아드리아나 리마, 조안 스몰스와 함께 쿠바에서 화보를 촬영했다. 1999년 케이트 모스와 나오미 캠벨이 미국 <하퍼스 바자>와 함께 쿠바에서 화보를 찍은 후, 미국 정부로부터 3만1,000달러에 이르는 벌금을 낸 일은 이제 구석기 얘기일 뿐.
이런 현상은 올 초 미국 오바마 대통령이 쿠바와 국교를 회복하겠다고 발표했기 때문인지 모른다. 60여 년간 닫혀 있던 쿠바 문이 열리면서, 카리브 해안의 자그마한 나라에 패션계가 매혹된 것이다(남들보다 뭐든 먼저 해야 직성이 풀리는 패션계의 특성). 하지만 <뉴욕 타임스>의 패션 섹션은 단순히 외교적 해결 때문만은 아니라고 전했다. “비록 인구가 1,120만 명밖에 안 되는 작은 섬이지만, 쿠바는 디자이너의 상상 속에서 늘 큰 역할을 해왔다.” 이건 단순히 게바라 스타일이나 쿠바 스타일의 셔츠만 가리키는 건 아니다. <뉴욕 타임스>는 좀더 추상적이고 시각적인 영감에 대해 언급했다. “색채 감각과 기후, 분위기는 ‘금지된 섬’에 대한 환상을 더한다. 이는 그 나라와 직접적 연관이 있는 디자이너는 물론, 그렇지 않은 디자이너에게도 영감의 대상이 돼왔다.”
“저는 쿠바에서 색채와 분위기를 배웠습니다.” 쿠바에서 태어나 미국으로 이민 온 이자벨 톨레도는 고향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제 고향은 산골짜기 높은 곳에 있어요. 쿠바의 중부 지방이죠. 그곳의 빛은 특별합니다. 거기서 제가 색채와 질감을 보는 눈을 배웠죠. 제 작업의 로맨스와 미스터리가 쿠바와 연결돼 있다고 느낍니다.” 쿠바 출신의 또 다른 디자이너 나르시소 로드리게즈 역시 최근 쿠바인으로서의 뿌리를 자랑스럽게 여긴다고 전했다. “단 한 번도 쿠바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제 저만의 역사를 드러내도 좋다고 느낍니다.”
올 초 쿠바 이민자의 아들이자 작가인 파울 레예스(Paul Reyes)는 쿠바에 대한 글을 공개했다. 그의 문장이야말로 쿠바의 매력을 잘 설명한다. “식민주의 스타일이나 아르데코, 혹은 미드 센추리 클래식을 비롯한 아바나의 허물어져가는 건축물에는 궁지에 몰린 듯한 품위가 존재한다. 동시대적이고 낡은것의 독특한 결합을 찾아보기에 이만한 곳은 없다. 우주 시대의 어울리지 않는 흔적, 스페인의 향기와 소비에트의 표류물까지. 그런가 하면 쿠바인만의 독특함도 존재한다. 주어진 것으로 해결하는 즉흥적 능력은 가히 전설적이다. 얼어붙은 시간에 사는 듯한 기분은 쿠바의 가장 참기 힘든 현실이자 가장 강력한 매력이다.” 이렇듯 쿠바에서는 시간이 멈춘 듯하다. 그래서 과거를 추억하는 데 익숙한 패션계 사람들에게 쿠바는 더 매력적이다.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의 선율이 들려오고 카리브해의 바다 냄새가 풍기는 신비로운 나라로의 패션 여행이 시작됐다.
- 에디터
- 손기호
- 포토그래퍼
- COURTESY PHOTOS, GETTYIMAGES / MULTIBI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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