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있는 패션
요즘은 TV 채널을 돌리면 온통 ‘먹방’ ‘쿡방’ 뿐이다. 그로 인해 ‘멋’을 위해선 ‘맛’과 거리를 두던 패션계에도 변화가 도래했다. 먹고 사는 게 중요한 지금, ‘맛있는’ 패션에 대해.
10월 7일 알렉산더 왕에 이어 발렌시아가를 이끌 수장으로 지목된 순간, 발음하기 까다로운 이름이 온라인을 도배했다(3년 전, 왕이 제스키에르의 뒤를 이었을 때보다 더 예상치 못한 캐스팅). 평소 인스타그램을 통해 모델을 선발하고 게이 바에서 패션쇼를 여는 등 파격 그 자체였던 뎀나 바잘리아가 그 주인공. 내년 봄 컬렉션을 위해 그가 쇼장으로 낙점한 곳은 파리의 차이나타운인 벨빌 지역의 중국집 ‘Le President’다. 지난 시즌, 칼 라거펠트가 샤넬 쇼를 위해 그랑 팔레를 더없이 파리다운 레스토랑으로 변신시켰지만, 레스토랑 자체를 쇼장으로 활용한 건 드물다. 뉴욕 패션 위크에선 멕시코 출신의 젊은 디자이너 빅터 배러간이 ‘YtinifninfinitY’ 쇼를 ‘레프트 필드’ 바에서 열었다(그래픽적인 식재료 프린트 티셔츠는 물론 상추를 브라톱으로 쓰고 파를 액세서리로 활용하는 기발함 덕분에 인스타그램 스타로 떠올랐다).
대체 언제부터 패션과 음식의 관계가 이토록 밀접해진 걸까? 자고로 패션 피플은 맛있는 것을 멀리하고 배고픔을 참아 조금이라도 더 작은 사이즈의 옷에 몸을 맞추려고 애쓰던 인종 아닌가? 그렇다고 패션계에 식도락가들이 전혀 없었던 건 아니다. 오프닝 세레모니의 바이어이자 겐조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인 캐롤 림과 움베르토 레온 듀오가 대표적 인물. “우리가 패션을 사랑하는 건 당연합니다. 하지만 맛있는 음식에도 엄청나게 열정을 쏟죠.” 2012년 봄, 겐조 데뷔 쇼 때부터 쇼장 앞에서 나눠 주던 스타벅스 커피를 떠올려보시라(매 시즌 개성 넘치는 프린트를 더한 텀블러는 보너스!). 또 2012년 가을 컬렉션에선 매그놀리아 베이커리의 컵케이크, 2013년 봄 컬렉션에선 모모푸쿠 밀크 바의 쿠키까지. <섹스 앤 더 시티>의 캐리가 즐기던 뉴요커들의 단골집 메뉴를 파리까지 공수해온 비밀은? 제빵사를 파리로 ‘모셔와’ 쇼 전날 6,000개 이상의 케이크와 쿠키를 굽게 했다. 지난달 파리에서 열린 오프닝 세레모니와 삼성의 협업 파티는 더없이 특별했다. 듀오가 제일 좋아하는 뉴욕의 중국집 ‘미션(Mission)’의 스타 셰프 안젤라 디마유가(Angela DImayuga)를 파리로 초빙한 것. “늘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게 중요해요. 그건 부끄러운 일이 아니죠”라고 움베르토가 얘기했다. “2016년 봄 컬렉션이 ‘집으로의 초대’를 주제로한 것인 만큼, 각국 손님들을 초대해 끝내주게 맛있는 중국음식을 대접하는 느낌을 전하고 싶었어요.” 파티가 열린 파리의 프렌치 레스토랑 ‘L’Atelier des Artistes’는 그날 하 루만큼은 캐롤과 움베르토의 다이닝룸으로 돌변! 그리고 셰프는 마파두부부터 닭 날개까지 아홉 가지 쓰촨요리를 모두에게 대접했다.
음식을 향한 패션계의 애정은 런웨이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전 세계 패션광들을 서울로 향하게 만든 5월의 샤넬 크루즈 쇼가 대표적인 예. 컬렉션은 한국적 요소로 가득했는데, 여기서도 음식과의 인연이 옷으로 표현됐다. 비빔밥에서 영감을 얻은 트위드 수트가 그것. 비빔밥이 하이패션에 영감을 주다니! 당근, 시금치, 달걀지단 등 비빔밥에 들어가는 여러 색상의 재료가 전에 없이 알록달록한 트위드로 표현되었다. 또 케이트 스페이드의 경우 매그놀리아 베이커리의 컵케이크 모양 그대로 가방을 제작해 캡슐 컬렉션을 판매했다.
한편 자신의 2015년 가을 컬렉션에 등장한 니트 룩을 음료수병에 재해석한 조나단 앤더슨의 ‘다이어트 코크’는 또 어떤가. 앤더슨처럼 음료수병을 예쁘게 디자인하는 건 오래전부터 패션 디자이너들의 주특기였다. 매 시즌 특별한 병을 새로 출시하는 코카콜라는 라거펠트, 고티에, 제이콥스 등과 협업했다. 또 겐조의 2014년 가을 컬렉션 프린트를 입힌 에비앙(이전에는 폴 스미스, 크리스찬 라크로와, 다이앤 본 퍼스텐버그 등과 함께했다), 벨 에포크 시절 파리에서 유행한 ‘Le Rituel(카바레 무희들이 댄스 슈즈에 샴페인을 따라 남자 고객들에게 주는 행위)’에서 영감을 얻어 스틸레토 모양의 파이퍼 하이직 샴페인 잔을 만든 크리스찬 루부탱, 이리스 반 헤르펜의 3D 프린트를 더한 돔 페리뇽 등등.
그렇다면 패션과 음식의 가장 궁극적인 만남은 어떤 형태일까? 최근 하이패션 하우스는 직접 음식을 만들고 판매하는 외식업에 뛰어들었다. 디올 청담 플래그십 매장에는 피에르 에르메와 함께한 ‘카페 디올’이 오픈해 서울의 명소가 됐다. 프라다는 밀라노에서 가장 오래된 베이커리 중 하나인 마르케지(Marchesi, 1824년에 오픈했다)의 지분80%를 사들여 9월 초 새 매장을 열었다. 건축가 로베르토 바키오치가 디자인한 몬테 나폴레오네 매장은 폰다치오네 프라다의 ‘바 루체’ 못지않게 동화적이다. 상하이의 초호화 쇼핑몰 ‘iAPM’에는 ‘1921 구찌’가 오픈했다. 물론 조르지오 아르마니의 ‘아르마니 카페’,랄프 로렌의 ‘폴로 바’가 있긴 하지만, 하이패션 하우스에서 애피타이저부터 디저트까지 ‘풀코스’로 서빙하는 레스토랑은 이번이 처음이다. 물론 가구부터 식기, 조명까지 온통 구찌!
런던 ‘버클리(Berkeley)’에선 매 시즌 대표적인 패션 아이템 모양의 디저트를 맛볼 수 있다. ‘프레타 포르테(Pret-a-Porter)’가 아닌 ‘프레타 포르티(Pret-a-Portea)’. 이번 시즌엔 돌체앤가바나의 메리 제인 펌프스(아몬드 무스와 컬러 설탕을 활용했다), 시몬 로샤의 튤 드레스(바닐라 에클레르 위에 크림으로 만든 튤과 빨강 설탕 꽃을 더했다), 발렌티노의 스터드 장식 줄무늬 숄더백(여러 컬러의 초콜릿과 크랜베리의 조화) 등으로 구성됐다. 바야흐로 ‘입는’ 패션만큼 흥미진진한 ‘먹는’ 패션의 시대!
- 에디터
- 임승은
- 포토그래퍼
- COURTESY PHOT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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