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젤리나 졸리의 아름다운 인생
안젤리나 졸리는 영향력을 가진 자의 관심이 타인을 향할 때 얼마나 거대한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는지 몸소 보여준다. 배우에서 시작해 엄마, 영화감독, 자선사업가, 작가까지. 세상에 자신의 자리를 창조해온 그녀의 아름다움은 점점 더 깊어지고 있다.
안젤리나 졸리는 배우, 엄마, 자선사업가, 그리고 작가로서 모든 걸 지휘하고 있다. 개봉을 앞둔 영화 <바이 더 씨(By the Sea)>에서 남편 브래드 피트와 부부로 출연한다. 10년 전 두 사람의 관계에 불을 붙인 영화 <미스터 & 미세스 스미스> 이후 처음으로 함께 출연한 이 영화는 졸리가 직접 시나리오를 쓰고 감독을 맡았다. 졸리는 “감독은 굉장히 집중했고, 여배우는 불안정했어요. 그리고 작가는 정말 혼란스러웠어요”라고 말한 후 웃었다. 물론 이 작품은 두 암살자 사이 전쟁을 그린 코미디와는 거리가 멀다.
“미칠 것 같은 제 마음을 바탕으로 한 영화예요.” 졸리는 특유의 유머와 집중력으로 선셋 타워 호텔의 삭막한 방에 생기를 불어넣었다. 호텔 밖은 열기를 내뿜는 햇살로 반짝이고 있었고 LA 해변에는 파라솔이 가득했다. 졸리는 검정 스키니 팬츠와 반소매 실크 블라우스 차림이었다. 화장은 하지 않았다. 화장을 왜 한단 말인가? 그녀의 아름다움은 세월이 흐르면서 더욱 깊어졌다.
수년간 졸리와 브래드 피트는 <바이 더 씨> 대본을 “미친 대본”이라고 불렀다. “우리는 그것을 ‘최악의 아이디어’라고 부르기까지 했어요.” 다시 웃으며 졸리는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아티스트로서 우리를 안전지대에서 꺼내줄 뭔가를 원했어요. 날것 그대로의 배우가 되는 거죠. 안전한 생각은 아닐지 몰라요. 하지만 인생은 짧아요.” 물론 졸리는 지금까지 안전한 길을 택한 적이 없다. 지금 그녀에게 남겨진 유일한 위험 요소는 신화 같은 요소를 줄이고 스스로를 자연스럽게 노출하는 일일 것이다.
지난여름 프랑스에 위치한 자신의 집에서 결혼식을 올린 후 졸리는 자신의 부족(브래드, 7~14세인 여섯 명의 아이들, 그리고 직원들)과 함께 눈부신 지중해의 햇살이 비치는 몰타의 섬 고조(Gozo)로 이사했고 영화를 찍었다. “우리의 신혼여행이었어요”라고 그녀는 환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 미소가 이 영광스러운 카니발, 즉 결혼식에 대해 노출되지 않은 모든 것을 표현해주었다. “그들은 집시처럼 여행을 합니다. 전 우주적으로 유명한 한 무리의 억만장자 집시들이죠.” 졸리의 친구인 시나리오 작가 에릭 로스는 이 가족의 순회하는 삶을 ‘집시’라고 묘사했다.
아이들은 각기 다른 배경과 종교를 가진 선생님들의 지도 아래 홈스쿨링을 하고 있다. “우리는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 등을 여행합니다. 아이들이 태어난 곳이지요”라고 졸리는 말한다. “남자아이들은 자신들이 동남아 출신이라는 걸 알고 있고, 각자 자신들만의 음식, 음악, 친구들의 세계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에 자부심을 갖고 있어요. 하지만 저는 그 아이들이 자매들과 엄마 나라의 역사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길 바랍니다. 에티오피아에서 입양한 열 살 자하라만 여행에 데려가는 게 아니라 우리 모두 아프리카로 가서 멋진 시간을 가지죠.”
인터뷰를 위해 만났을 때 졸리는 다음 영화의 촬영 장소인 캄보디아와 미얀마에서 막 돌아온 상태였다. 베트남에서 태어난 아들인 열한 살 팍스와 동행했다. 팍스는 영화 작업에 참여하고 아웅 산 수 치를 만나고 싶어 했다. 자유의 몸이 된 미얀마의 야당 지도자이자 노벨 평화상 수상자인 수 치에 대한 기사를 읽고 호기심을 갖고 있었다. “팍스가 아웅 산 수 치를 만날 때 어떤 옷을 입을지 엄청나게 고민하는 것을 보고 감동받았어요. 영화 시사회에 갈 때는 그렇게 긴장하지 않거든요.”
산타바바라의 집으로 돌아온 후 졸리는 여느 엄마처럼 의사들을 만나고, 아이들에게 백신을 맞히고, 또래 친구들의 놀이 모임을 참관하고, 회의에 참석했다. 그런 다음 가족이 있는 런던 집으로 이동했다. 당분간 그곳이 ‘졸리 부족’을 위한 최고의 베이스캠프가 되어줄 것이다. 졸리는 UN 활동을 위해 중동으로, 영화 준비를 위해 캄보디아로 여행을 갔다가 아이들을 위해 언제든 돌아올 수 있다. 그리고 브래드 피트는 데이비드 미코드(David Michod) 감독의 <워 머신(War Machine)>을 촬영하는 동안 아부다비에서 런던을 오갈 수 있다.
그녀의 일상은 여러 사교 행사로 정신이 없지만 새 영화는 사적이고 폐쇄공포증이 느껴지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졸리는 8년 전 엄마 마셸린 버트란드(Marcheline Bertrand)가 암으로 사망한 후 <바이 더 씨> 시나리오를 썼다. 그런데 이 시나리오가 빛을 볼 거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가족의 죽음에 사람들이 얼마나 다르게 반응하는지 탐색하고 싶었을 뿐이다. 졸리는 어머니가 20대였던 70년대를 배경으로 남편과 아내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빨간 타자기로 글을 쓰는 소설가 롤란드와 옷과 모자가 든 상자를 고이 간직하고 있는 전직 무용수 바네사 부부가 고통에 어떻게 대처하는지 보기 위해 그들에게 슬픔을 부여하고, 바닷가 마을로 데려간다. 바네사는 허약하고, 고통받고, 갇혀 있다. 그녀는 슬픔에 다이어트 약과 자살 환상으로 대처한다. 롤란드는 아내의 고립과 음주 때문에 고통받는다. 그리고 이런 상태는 순진한 신혼부부가 옆집으로 이사 올 때까지 계속된다.
“자전적인 이야기는 아니에요”라고 졸리는 미소 지으며 말했다. 유명인사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는 사람들이 이 영화에서 무언가를 읽어내려고 할 것이라는 사실에 신경 쓰지 않는다고도 덧붙였다. “브래드와 저 사이에도 문제가 있긴 하죠. 하지만 영화 속 캐릭터들의 문제가 우리의 문제와 비슷했다면 이 영화를 만들 수 없었을 거예요.” 이 영화는 어머니의 삶을 느슨하게 차용한 졸리의 아주 개인적인 프로젝트이다. 졸리는 어머니가 아버지 존 보이트가 떠난 후 자신과 오빠 제임스를 키우기 위해 연기를 포기하고 희생한 것에 대해 자주 얘기한다. 어머니 마셸린의 삶은 프로듀서로, 미국 원주민을 위한 활동가로, 암협회를 위한 운동가로 요약될 수 있다. 그녀는 마흔아홉 살에 난소암 진단을 받았고 7년 후에 사망했다. “엄마는 지구 같은 분이었고 세상에서 가장 좋은 사람이었어요. 영화 속 바네사는 그렇지 않지만요.”
안젤리나 졸리와 브래드 피트는 스스로에게 도전하기 위해 이 영화를 찍기로 했다. 그러나 졸리가 진짜 공포를 느낀 순간은 영화를 편집하는 동안이었다. 의사가 전화해서 염증 지수가 높다고 말한 것이다. 그녀는 한방과 양방 의사들에게 상담을 받았고 그중에는 어머니를 치료한 의사도 포함되어 있었다. 결국 졸리는 난소와 나팔관을 제거했다. 그리고 <뉴욕 타임스>에 당시 경험을 상세히 털어놓음으로써 2년 전 두 번에 걸친 유방 절제 수술을 받으며 독자들에게 계속 자신의 상태를 알려주겠다고 한 약속을 지켰다.
“제 건강 상태를 공개한 일이 다른 여성들과 저 사이에 유대감을 높여주었어요. 어머니가 그런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수술 과정 자체는 “잔인했다”고 말했다. “힘들었어요. 쉬운 수술이 아닙니다. 난소 제거는 쉬운 수술이지만 호르몬에 변화가 생기죠. 흥미롭지요. 우리는 월요일에 편집을 했고, 화요일에 수술을 받았으며, 수요일에 갱년기에 접어들었다고 농담을 했습니다. 목요일엔 다시 편집실로 돌아왔어요. 제 걸음걸이가 약간 펑키하긴 했어요.”
졸리는 머릿속에서 시계가 똑딱거리고 있으며 하루하루를 마지막 날인 것처럼 살고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현재 갱년기를 경험하고 있는 졸리는 자신이 여성으로서 현실적이 되었다고 느낀다고 말했다. “어머니와 할머니가 모두 난소암으로 돌아가셨어요. 저는 마흔 살입니다. 빨리 쉰 살이 되어서 제가 고비를 잘 넘겼다는 걸 확인하고 싶어요.”
구름 한 점 없는 오후였다. 대화를 나누는 동안 나는 내 앞에 앉아있는 사람 안에 거대한 풍경이 자리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녀는 눈에 띄는 문신에 최소한의 장신구를 하고, 고글형 선글라스를 쓴 채 펜과 서류철을 들고 있었다. 배우, 감독, 암과 싸우는 거침없는 전사 이외에 또 다른 안젤리나 졸리가 존재한다. 공개적인 장소에 나타날 때마다 사람들이 몰려들기 때문에 별 특징 없는 호텔 방에서 만나야 했지만 그 공간에서도 졸리는 세상에서 가장 매력적인 여자였다. “졸리는 위장할 수 없어요”라고 자이나브 반구라(Zainab Bangura)는 말한다. 그녀는 UN 총장의 특별 대변인으로 시에라리온의 정치 운동가이자 전 정부 관료이다. “‘우리가 함께 여행할 수 있을까요? 제가 할 수 있는 게 더 있을까요?’라고 그녀는 말하지만 저는 안젤리나 졸리를 숨길 수는 없어요.”
그리고 UN난민고등판무관의 특사인 플로렌스 나이팅게일 안젤리나 졸리가 있다. 그녀는 위기를 겪고 있는 나라를 쉬지 않고 방문하고 지원한다. 반구라는 “포옹은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큰 힘이 됩니다”라고 말한다. “그들은 그녀가 진심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요.” 졸리는 대통령, 국회의장, 국방장관에게 스타 파워를 이용하기도 한다. 최근 미얀마에서 인종 청소에 직면한 무슬림 소수민족인 로힝야족을 방문하기 위해 헬리콥터로 이동하는 걸 허락해줄 것을 요청한 경우처럼 말이다.
시스템을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이용하는 할리우드의 실세 CEO 안젤리나 졸리도 있다. 그녀는 2006년 샤일로의 첫 사진을 750만 달러에, 2008년에 태어난 쌍둥이 녹스와 비비안의 사진은 그 두 배 가격에 팔아서 졸리-피트 재단에 기부함으로써 가십 잡지에 한 방을 먹였다. 암살자와 슈퍼히어로 역할로 출연해 엄청난 돈을 번 후에는 <머나먼 사랑(Beyond Borders)>, <마이티 하트(A Mighty Heart)>, <피와 꿀의 땅에서(In the Land of Blood and Honey)> 같은 보다 책임감 있는 영화를 만들었다. 헌신적인 삶을 살고자 하는 욕망을 실행하는 동시에 균형 잡힌 태도로 팬들을 만족시키고 있다. 젊은 시절의 졸리도 생각난다. 안경을 끼고 권투를 하던 다루기 힘든 아이, 아무 말이나 하고, 자기 몸에 상처를 냈다는 말을 공개적으로 하고, 무기를 모으고, 두 번째 남편 빌리 밥 손튼의 피가 담긴 유리병을 자랑하던 펑크족 시절의 졸리 말이다.
제임스 맨골드 감독은 <처음 만나는 자유> 오디션을 보기 전 그녀의 이런 다듬어지지 않은 거친 매력에 먼저 주목했다. 1999년에 제작된 이 영화는 <지아(Gia)> 이후 그녀에게 전기를 마련해준 작품이다. “소피텔 호텔에서 졸리를 만났어요. 그녀가 처음 한 말이 기억납니다. ‘이곳은 너무 바보 같고 프랑스 시골 같아요. 저는 프랑스 시골을 싫어합니다.’” 맨골드는 아직도 그 오디션을 경이롭게 생각한다. “마치 기막히게 아름다운 여자 잭 니콜슨을 보는 것 같았어요.” 그녀의 특별한 점은 무엇이었을까. “태도였어요. 감독들이 배우에게 간절히 원하는 것이죠. 우린 모두 너무 올바르고 예의 바르고 서로를 이해하고 다양한 관점을 갖고 있어요. 그건 좋은 겁니다. 하지만 다른 차원에서 볼 때 그것은 당신을 앞으로 나아가기 힘들게 만들죠. 공격성, 그리고 주체적인 태도가 필요합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에게는 그것이 있다고 그는 말한다. 존 웨인, 험프리 보가트, 바바라 스탠윅, 그리고 안젤리나 졸리에게도.
“저는 정해진 규칙에 의문을 던지는 사람이 필요했어요. 원하는 사람과 자고, 손에 넣을 수 없는 사람에 대해선 생각하지 않으려 하고, 자신이 본 대로 진실을 말하고… 아웃사이더라서 소시오패스 취급을 받지만 관객들이 보기에 그들은 아주 뛰어납니다.” <처음 만나는 자유>에서 졸리가 맡은 캐릭터는 그녀의 일부이기도 했다. “당시 졸리는 자신이 맡은 배역보다 훨씬 더 성공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길을 찾으려고 애쓰고 있었어요. 그것이 그녀의 독특한 점이지요”라고 맨골드는 말했다. 어릴 때뿐만 아니라 영화배우가 된 후에도 그녀는 ‘뭔가 다른 것이 있을 거야’라고 생각했다. 졸리는 다른 곳에서 삶을 갈망하며 창밖을 뚫어지게 내다보곤 했다.
불안하고 혼란스러웠던 스물다섯 살의 졸리는 <툼 레이더>를 찍기 위해 캄보디아를 방문했다. 그리고 크메르루주군이 저지른 대대적인 파괴의 현장을 보고 눈을 뜨게 되었다. 그곳에서 집단 학살, 난민, 의족을 한 사람들, 아이들의 사지를 찢어놓은 지뢰 등 전쟁의 결과와 마주했다.
캄보디아는 졸리의 삶의 방향을 바꾸어놓았다. 영화를 찍고 집으로 돌아온 졸리는 손에 넣을 수 있는 모든 자료를 읽었고, 사비로 UN난민고등판무관과 함께 여행을 하기 시작했다. 아무 데서나 자면서 육체적인 위험을 감수하고 노트를 손에 든 채 자신이 얼마나 쓸모 있는 사람인지 알아보기 위해서 말이다. 캄보디아에서 그녀는 계속해서 일기를 썼다. 이것은 나중에 <안젤리나 졸리의 아주 특별한 여행(Notes from My Travels)>이라는 책으로 출간되었다. 이 책을 보면 그녀에게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음을 알 수 있다.
2001년 7월 20일 캄보디아의 일기는 “내 방으로 돌아가는 길에 폭탄의 탄피를 보지 않을 수 없었다. 무기와 폭발물은 모두 정부에서 운영하는 공장에서 만들어졌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그녀는 지뢰를 제거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일하는지 보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두 개의 지뢰가 발견되었다. 나는 TNT와 함께 지뢰를 폭파할 수 있도록 허락받았 다. 누군가를 죽였을지도 모를 그것을 파괴하고 나니 기분이 좋았다.” 크메르루주군의 감옥이었던 곳에서 그녀는 이렇게 썼다. “모든 감방에는 고문 받던 사람들의 사진이 있다. 이 글을 쓰면서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나는 이곳을 어떻게 견뎌낼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했다.”
UN난민고등판무관과 여행을 하면서 그녀는 모든 에너지를 불의를 해결하는 데 쏟아부었다. 졸리는 자신이 만난 난민들에 대해 이렇게 썼다. “나는 그들을 돕고 싶다. 그리고 그들이 어떻게 나를 도왔는지를 점점 더 많이 알게 된다.” 또한 졸리는 <툼 레이더> 시리즈와 <말레피센트> 같은 블록버스터를 통해 얻은 엄청난 힘과 돈을 이용할 수 있다는 걸 일찍이 깨달았다. 졸리는 그냥 라라 크로프트를 연기하는 것이 아니라 라라 크로프트가 되어 세상을 바꾸고 싶었다.
<토끼 울타리>와 <콰이어트 아메리칸>의 감독 필립 노이스(Phillip Noyce)는 <본 콜렉터>와 <솔트>에서 졸리와 함께 일했다. 그는 당시 기억을 상당히 아름답게 표현했다. “졸리의 겉모습은 단호하지만 내면은 부드러워요. 그리고 아이디어를 유연하게 잘 받아들이죠.” <솔트>에서 그녀는 고집스럽게 진정성을 추구했다. 노이스는 솔트가 아파트에서 도망치는 장면에서 8층 높이에 있는 것처럼 보이도록 10피트 높이에 녹색 스크린을 깔겠다고 말했다. “그녀는 저를 보더니 이렇게 말하더군요. ‘아니요, 그러지 마세요. 직접 8층에서 하겠어요.’ 그래서 제가 말했죠. ‘그럴 필요 없어요. 그건 아주 위험해요. 왜 그러려고 하죠?’ ‘제가 실제로 그렇게 한다면 액션 연기를 훨씬 더 잘할 수 있을 거예요. 그리고 그렇게 찍는 게 더 나아 보일 겁니다’라고 졸리는 대답했습니다. 6주 후 그녀는 8층 높이에 있었어요. 세상이 CG를 너무 많이 쓴다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 관객은 본능적으로 무엇이 CG인지 알고 있어요.” ‘관객들은 진짜를 보고 싶어 한다’는 것이 그녀 얘기의 핵심이었다.
2006년 설립한 졸리-피트 재단은 현재 에티오피아, 케냐, 아프가니스탄, 캄보디아 등지에 병원과 학교를 짓는 비용을 지원하고 있다. 동행자 없이 미국에 이민 온 아이들을 위한 변호사 비용과 지뢰 제거 프로그램, 환경 및 야생 보호 단체도 후원한다. UN난민고등판무관 안토니우 구테헤스(António Guterres)는 곧바로 핵심을 얘기했다. “솔직히 사람들은 자신의 이미지를 좋게 하려고 이 일을 합니다.” 하지만 졸리는 그렇지 않다. “제가 그녀가 하는 일을 더 널리 홍보하려고 하면 늘 아주 부끄러워합니다. 언론 매체 없이 그 일을 하는 것을 더 좋아합니다. 특별한 점이지요”라고 그는 말했다. “시장, 지방 관료 같은 사람들은 졸리가 이 나라의 화장실 문제에 대해 얘기하는 걸 보고 깜짝 놀랍니다.”
이것이 안젤리나 졸리 효과이다. 그녀는 국제적인 대의에 잠깐 관심을 보이는 ‘5분 주의’ 유명 인사들과는 다르다. 게다가 조금도 방심하지 않는다. 지뢰 제거 자선단체가 기금을 남용했다는 사실이 밝혀졌을 때 졸리는 곧바로 그 단체에서 사임했다. 그러면서도 그 문제에 대한 관심이 사그라지지 않게 했다. 의 공동 저자인 로라 실버는 졸리가 보스니아 전쟁을 다룬 영화 <피와 꿀의 땅에서> 고증을 위해 자신에게 연락을 취했을 때 상당히 회의적이었다고 회상한다. “대부분의 할리우드 사람들은 어떤 문제에 지속적인 관심을 쏟지 않거든요. 하지만 졸리는 영화가 끝난 후에도 사람들의 삶을 변화시키기 위해 어떻게 지속적으로 기여할 수 있을지 알고 싶어 했어요.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했습니다.”
세 살 난 시리아 쿠르드족 소년인 알렌 쿠르디가 터키 해안에 시신으로 떠내려온 지 이틀이 지난 9월 4일 나는 런던에서 졸리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 어린 소년의 사진은 정치인들을 부끄럽게 만들었고 전 세계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나는 난민 특별 사절인 그녀에게 이런 위기의 한복판에서 무엇을 할지 물었다. 그녀는 주저했다. “오늘 사무실에서 아이디어를 논의했습니다.” 3일 후 졸리는 전쟁을 외교적으로 끝낼 것을 촉구하기 위해 영국 상원의원이자 전 보스니아 난민인 아르민카 헬릭(Arminka Helic)과 공동으로 쓴 논평을 발표할 것이다.
우리는 그녀가 전 세계 가족 및 친구들과 다져온 개인적인 관계에 대해 얘기했다. 그리고 ‘도움’의 복잡한 특징을 다루는 방법에 대한 얘기도 나누었다. “저는 단순히 제 아이나 다른 사람의 아이를 돕는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 예로 졸리는 2003년경 시작된 기획에 대해 얘기했다. “저는 매독스를 위해 작은 보금자리를 마련해주고 지역사회 개발을 돕기 위해 캄보디아에 갔어요.” 밀렵꾼들이 삼로웃(Samlout) 국립공원의 야생동물을 죽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밀렵꾼들을 공원 경비원으로 고용했고 보존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몇 년 후 그녀는 학교, 도로, 병원 등을 설립했고 경제학자 제프리 삭스(Jeffrey Sachs)의 빈곤의 악순환을 끊기 위한 ‘밀레니엄 빌리지’ 아이디어를 적용했다.
안젤리나 졸리의 사무실에서 시작된 프로젝트가 다수라는 게 놀랍다. 영화 작업, 인도주의 활동, 연설, 그리고 여섯 명의 아이들과 남편 사이에서 졸리는 그 모든 일을 어떻게 다 해내는 걸까? “제 개인 시간은 아이들의 스케줄로 꽉 차 있어요”라고 그녀는 말한다. “오늘 밤에 아이들과 무엇을 할지 알고 있습니다.” 최근 졸리는 <말레피센트>를 준비하며 집에서 발성 코치에게 수업을 받았다. “우리는 문을 닫았어요. 한 아이가 들어왔고 또 다른 아이가 들어왔고 문밖에서는 싸움이 났습니다. 그래서 저는 부엌 테이블이 다 보이는 집 중앙에서 발성 수업을 했어요. 그런데 아무도 귀찮게 하거나 방해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전화로 한참 동안 웃었다. “아이들은 제 목소리가 들리고 제가 그곳에 있으면 저에게 어느 정도 자유를 줍니다.”
모든 일의 중심에 있을 때 졸리는 힘이 나는 것 같다. 그리고 여러 부문에서 영향력이 커질수록 본래 정신과 타협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예술과 인도주의, 퇴폐와 너그러움, 정치와 권력의 장소인 ‘안젤리나스탄’의 지도자가 되려면 약간의 과대망상, 멈출 수 없는 야망, 그리고 흐름을 통제하고자 하는 욕구와 능력이 필요하다. “그녀는 만만한 사람이 아니에요. 하지만 만만한 면이 과대평가되고 있지요”라고 맨골드는 말한다. 권력은 까다로운 것이다. 그리고 세계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선 그것이 필요하다. 그녀는 외교적인 목표를 위해 어떤 희생을 치러야 할까?
앞으로 몇 개월 동안 그녀는 캄보디아에서 영화를 찍을 예정이다. 로웅 웅(Loung Ung)의 회고록인 를 각색한 이 작품에서 주인공을 맡을 일곱 살 아역을 찾기 위해 학교와 고아원에서 아이들과 게임을 하며 시간을 보낼 것이다. 영화는 크메르루주군 치하에서 고문과 죽음과 생존을 경험한 웅의 어린 시절 이야기이다. 졸리가 <툼 레이더> 촬영을 마치고 지뢰에 대한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한 직후 웅은 그녀에게 그 책을 보냈다. 그들은 곧 친구가 되었다. 그리고 졸리가 2001년 고아원에서 만난 어린 남자아이 매독스를 입양하기로 결심했을 때 옳은 일을 하는 것인지 확신을 얻기 위해 조언을 구한 사람도 바로 웅이었다. 이 영화는 그녀의 삶을 바꾸어놓은, 그리고 현재 그녀가 시민으로 있는 나라에 보내는 러브 레터이다. 영화 의상은 캄보디아에서 제작될 것이며, 영화에서는 크메르어가 사용될 것이다. “캄보디아 사람들과 이 영화를 만들 거예요.” 그것은 의도치 않은 결례를 범하지 않기 위한 보험이라 할 수 있다. “저는 세상을 떠난 100만 명의 유령들을 느낄 수 있어요. 이 영화는 그들의 이야기이고, 저는 엄청난 책임감을 느낍니다.” 매독스는 자료와 역사를 조사하고 촬영장에서 일할 것이다. “팍스도 그럴 거예요”라고 그녀는 덧붙였다. “영화는 매독스를 바꾸어놓을 겁니다. 그 아이는 과거의 참혹함을 알게 되겠지만 전쟁 전의 문화, 조국의 위엄, 그들이 얼마나 자부심 넘치는 민족이었는지도 알게 될 겁니다.”
졸리는 케냐의 야생동물 보호론자인 리처드 리키에 대한 영화도 개발해왔다. 스테이시 시프(Stacy Schiff)의 역사서를 바탕으로 한 <클레오파트라>도 준비 중이다. 해킹당한 소니의 이메일 스캔들의 중심에 있던 영화이다. “이 작품을 제대로 영화화하는 건 힘들어요. 섹스와 보석이외의 무언가를 다룰 필요가 있습니다. 그녀는 한 나라의 아주 복잡한 지도자였어요.” 졸리는 영악한 지도자로서의 클레오파트라, 그녀의 인간성, 자신의 아이들과 이집트인들과 맺은 관계에 관심이 있다. 영화를 보면 당신은 왜 졸리가 이 역할을 원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졸리는 자신이 영원히 연기를 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얼마나 미친 직업인지!”라고 말한다. “저는 운이 좋아서 이 세계의 일부가 되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연기를 즐기고 있어요. 아마 앞으로 몇 년 안에 카메라 앞에 서는 걸 그만둘 겁니다. 카메라 뒤에서 더 행복할 거예요. 저는 집에 있을 때 행복합니다. 아이들이 독립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고 싶습니다. 아이들에게 중요한 시기니까요.” 졸리는 국제 무대의 비국가 행위자(Non-State Actor)로서 다음 커리어를 어떻게 가져가야 할지 조심스럽다. 커져가고 있는 정치적 역할에 대한 수많은 억측도 있어왔다. ‘스타’는 졸리를 표현하기에 적절치 못한 단어이다. 확실한 건 그녀가 자신을 시험하는 도전을 멈추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저는 국제 활동의 일부가 되고 싶어요. 그 노력이 어떤 형태로든 유용하게 사용되는 걸 보고 싶습니다”라는 게 그녀가 말하고 싶은 전부이다. “제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 에디터
- 토니 굿맨(Tonne Goodman)
- 글
- 엘리자베스 루빈(Elizabeth Rubin)
- 포토그래퍼
- ANNIE LEIBOVITZ
- 헤어
- 애덤 캠벨(Adam Campbell)
- 메이크업
- 토니 G(Toni G for MAC Cosmetics)
- 세트 디자인
- 테레사 리베라(Theresa Rivera for Mary Howard Stud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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