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양이 오묘하게 결합된 재킷, 스카잔
야릇하게 반짝이는 실크, 보란 듯 등과 팔을 휘감은 용과 호랑이 자수! 동서양이 오묘하게 결합된 수버니어 재킷, 일명 ‘스카잔’이 패션계를 호령한다.
2016년 봄, 스카잔의 인기는 예정돼 있던 하늘의 뜻처럼 느껴질 정도다. 짐작건대 작년 여름 남성복 컬렉션 직후 스카잔의 귀환을 감지한 이들이 민첩하게 시장에 ‘물건’을 풀어 분위기 조성에 일조한 거라면 할 말 없지만, 이병헌 스카잔은 단언컨대 우연이니까. “2014년 봄에 준비했으니 2년 후 유행 아이템이 될 거라곤 상상도 못했죠. 게다가 2015년 6월 개봉 예정이었으니까요.” 의상감독 조상경은 영화 <내부자들>에서 안상구(이병헌)가 입은 스카잔을 10년 전 부산 국제시장에서 발견했다. 자수 상태, 원단, 소매 단추 등 소재도 좋고 잘 만들어진 스카잔이라 언제든 쓸 일이 있을 거라 생각했고 결국 이번 작품에서 제대로 빛을 발했다(그 덕에 SNS에는 이병헌 덕분에 옷장에 처박혀 있던 스카잔을 다시 꺼내 입었다거나 영화 속 스카잔과 비슷한 걸 애타게 찾는다는 코멘트로 가득하다). “안상구는 연예 기획사 대표까지 올랐다가 순식간에 나락으로 추락한 인물이죠. 보잘것없는 양아치 신세가 됐지만 화려하던 과거에 미련이 남은 캐릭터를 직관적으로 표현하기에 그만한 게 없었어요.” 과시하듯 반짝이는 실크의 광택부터 휘황찬란하게 기교를 부린 자수까지. 야쿠자의 맨살을 뒤덮은 문신이 떠올라 오싹하기도 하지만, 어쨌든 지금은 이게 최고다.
남성복 쇼핑 사이트 미스터 포터의 바잉 매니저 샘 로반도 올봄 대표 유행 아이템으로 스카잔을 꼽는다. “수버니어 재킷은 봄 컬렉션에 너무도 많죠! 전후에 미군이 재킷을 일본 자수로 장식하던 시절을 떠오르게 하는군요. 발렌티노, 생로랑, 드리스 반 노튼 등이 제안한 2016년 버전은 실크와 새틴 원단에 이국적인 동식물을 그래픽적으로 표현했어요. 여전히 동서양이 만나 태어난 이 재킷에 상당 부분 의지하고 있죠.” 요즘엔 “이 옷이 어디서 기원한 것이냐 하면 말이지, 어쩌고저쩌고” 하며 수집가나 오타쿠처럼 구는 것보다 “그냥 마음에 들어서 산 거야”라고 말하는 쪽이 훨씬 쿨하다. 그러나 스카잔에 대한 얘기는 그 자체만으로도 흥미로우니 들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때는 2차 세계대전 직후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본이 패망하고 일본 요코스카에 주둔하던 미군은 전쟁이 끝나 본국으로 돌아갈 시기가 됐다. 다들 집에 가져갈 기념품 쇼핑에 여념이 없던 중 어느 병사가 기념품 대신 자신의 항공 점퍼를 일본 전통 자수로 장식했다. 이를 본 동료 군인들이 앞다퉈 따라 하면서 스카잔이 탄생한 것. 스카잔은 요코스카의 ‘스카’와 점퍼의 일본식 줄임말인 ‘잔’을 합친 이름으로 미국에서는 기념품이라는 뜻의 ‘수버니어 재킷’이라고도 불린다. 주로 광택 원단이 쓰이는 이유도 실제 항공 점퍼의 실크 나일론 소재 또는 군용 낙하산 원단을 재현하기 위함이다.
일본 젊은이들 중에도 아직까지 스카잔을 입는 이들이 꽤 있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스카잔을 만들어온 일본 전문 브랜드는 하나둘 사라지는 추세다. 게다가 스카잔 제작자들 사이에서는 똑같은 디자인을 200벌 이상 만들지 않는 게 관례. 그 덕에 빈티지 헌터들이 침 흘리는 대표 빈티지 아이템이도 하다. 빈티지에 관한 한 둘째가라면 서러운 루이 비통의 킴 존스가 작년 가을 크리스토퍼 네메스 컬렉션에 이어 올봄 스카잔 컬렉션을 선보인건 자연스러운 수순이다. “도쿄는 세상에서 가장 쇼핑하기 좋은 곳이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멋진 빈티지 가게들이 있으니까요. 저는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는 다양성을 좋아합니다. 도쿄에 가면 ‘크리스토퍼 네메스’, ‘도버 스트리트’와 하라주쿠 근처 ‘산타 모니카’ 같은 빈티지 매장으로 직행하곤 해요.” 아마 그는 도쿄에서 꽤 노련한 빈티지 전문가를 만난 듯하다. 두루미와 매화 가지가 극락조, 원숭이와 꽤 그럴듯한 조화를 이룬 데다 자수도 매우 정교하니 말이다.
드리스 반 노튼은 동양 자수 대신 스키아파렐리의 초현실주의 모티브로 하라주쿠가 아닌 파리풍 빈티지를, 생로랑의 에디 슬리먼은 낙천적이고 알록달록한 색감으로 빈티지의 메카 LA 버전을 선보였다. 발렌티노의 듀오 디자이너가 시도한 건 동서양이 믹스된 이 아이템에 아프리카 동물과 열대 무궁화, 로마산 고급 데님 등 이질적 요소를 더한 이종교배. “다수의 문화가 하나의 문화가 되는 거죠. 그게 우리가 흥미를 느끼는 겁니다.” 마리아 그라치아 키우리는 이렇게 덧붙였다. “우리는 꾸뛰르를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입을 수 있는 형태로 전환하는 것 또한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꾸뛰르가 늘 양면 캐시미어 같은 값비싼 것일 필요는 없으니까요.”
키우리의 코멘트는 이번 시즌 ‘왜 디자이너들이 스카잔을 선택했는가’에 대한 이유를 은연중에 드러낸다. 요즘 사람들은 대량생산의 정반대에 위치한, 인간미 있고 희귀한 꾸뛰르적인 것에 더 큰 가치를 느끼고 있다. 동시에 봄버 재킷 같은 스트리트 웨어의 일상성이 동시대 패션을 정의하는 새로운 룰로 자리잡았다. 그리고 스카잔이야말로 이 두 가지 상반된 욕구를 완벽하게 충족시킨다는 사실. “점점 더 많은 사람이 대량생산과 그로 인한 엄청난 양의 쓰레기에 염증을 느끼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유일한 것,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 전통적인 것에 더 매력을 느끼죠.” 인기 자수 전문가 마리 소피 록하트는 패션계의 자수 유행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하나의 피스를 완성하기까지 들어간 시간, 상상력과 장인 정신은 수작업 자수를 강렬하고 독특한 것으로 만듭니다.” 뮤지션 드레이크의 리바이스 재킷에 ‘기도하는 손’ 자수를 놓으면서 유명해진 그녀는 마크 제이콥스 봄 컬렉션의 가방에 패치워크와 자수 장식을 더했다. 스텔라 맥카트니와의 협업도 곧 선보일 예정.
일본 드라마 <마지스카 학교>에서 폭력 서클에 가입한 여학생들은 하나같이 교복 위에 불량하게 스카잔을 걸치고 돌아다니며 이렇게 외친다. “오코테루(‘열 받네’라는 뜻)!” 일본에서도 스카잔은 말썽 부리는 폭력배, 야쿠자들이 입는 옷이라는 이미지가 남아 있지만, 그 자체로 몹시 아름답고 특별하다는 데엔 이견의 여지가 없다. 스트리트 웨어가 그랬듯 어느 날 갑자기 하이패션계의 스타로 신분 상승했지만 그만큼 동시대의 패션을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선입견 없이 즐기기에 충분히 멋진 게 바로 스카잔이다.
- 에디터
- 송보라
- 포토그래퍼
- ChA HYE KYUNG, COURTESY OF PHOTOS
- 모델
- 엄유정, 진정선
- 헤어
- 오종오
- 메이크업
- 강석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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