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티스트 김정한이 사는 제주도 자연 속의 집
이국적인 야자수와 아름다운 한라산이 한눈에 보이는 자연 속의 집. 헤어 스타일리스트보다 아티스트라는 수식이 더 어울리는 김정한이 제주도 애월읍에 지은 이층집은 담백하고 간결한 미니멀리즘의 정수를 보여준다.
헤어 스타일리스트 김정한이 제주도로 내려온 건 2년 전이다. “제주도는 제 고향이에요. 쉰 살이 되면 이곳에서 살겠다는 막연한 생각이 있었는데, 몇 해 전 방콕을 여행한 후 그 시기를 앞당긴 거죠. 프리랜서로 일하다 보니 늘 촬영을 위해 대기해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거의 쉬어본 적이 없었거든요. 그 여행이 너무 좋았어요.” 마침 TV에서는 제주도로 귀농한 어느 30대 웹 디자이너의 이야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오랫동안 그가 꿈꿔오던 그런 삶이었다. 굳이 먼 미래를 기다릴 이유가 없었다. 결심을 굳히자 모든 건 순식간이었다. 20여 년간의 서울 생활을 이삿짐 박스 몇 개에 정리한 그는 미련 없이 도시를 떠났다. 페르시안 고양이 두 마리가 한가롭게 낮잠을 즐기는 김정한의 제주 집은 시내에서 10분 정도 떨어진 애월읍에 있다. 소규모 농가와 귤밭뿐인 탁 트인 벌판 가운데라 날씨가 맑은 날엔 멀리 한라산까지 보인다.
“이 집터도 원래는 의상을 하던 누나의 소유인데, 제주에 와서 10년 만에 만난 거예요. 도심에서 살짝 벗어난 게 오히려 마음에 들어 땅을 보자마자 바로 결정을 내렸죠. 정말 일사천리로 진행됐어요.” 집이 완공된 건 지난해 여름이 시작될 무렵이었다. 평소 친분이 있던 스타일리스트 최혜련으로부터 건축사무소 유신을 소개받은 그는 건축가에게 모든 것을 맡겼다. 서울과 제주를 오가는 바쁜 스케줄 탓도 있었지만, 전문가에 대한 신뢰가 더 좋은 결과물을 만든다는 걸 경험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제가 부탁한 건 방이 많을 필요가 없단 거였어요. 보통 이 정도 크기면 방이 세 개는 될 텐데, 그래서 이 집은 안방과 서재뿐이에요. 잠을 자든 책을 읽든 최소한의 생활만 가능하면 되니까 굳이 방이 클 필요도 없었고요.” 간결하고 담백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집주인의 성향이 고스란히 반영된 집은 미니멀리즘 인테리어의 정수를 보여준다. 벽과 천장, 싱크대는 물론 침대와 소파까지 온통 새하얗고, 자연스러운 질감을 간직한 나무 가구와 푸른 잎사귀의 식물 화분 몇 개가 눈에 띄는 색상의 전부다.
“조지 나카시마의 디자인을 좋아해요. 실제로 구입할 만한 여력은 안 되지만, 발상의 전환이랄까요? 그분의 작업을 보면서 원목 가구에 대한 선입견이 사라졌어요.” 호두나무를 주로 이용해 단단하고 실용적이면서도 예술 작품처럼 우아한 목공 가구를 만들어온 조지 나카시마는 스티브 잡스가 가장 사랑한 디자이너로도 유명하다. 목공예가 이정섭이 만든 테이블도 그가 아끼는 물건 중 하나다. “요즘은 인더스트리얼 디자인이 유행이라 철제 소재를 인테리어에 많이 이용하던데, 전 잘 모르겠어요.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선뜻 구입하게 되진 않더군요.” 세계적인 건축가 겸 조각가인 이사무 노구치의 새하얀 종이 갓스탠드 역시 김정한의 취향을 반영한다.
이 집 안의 물건 가운데 새것은 거의 없다. 관리가 잘된 흰색 소파는 가구 편집숍 디자이너 이미지가 갤러리아 백화점 명품관 맞은편에 있던 시절 구입한 것이고, 책장도 족히 10년은 썼다. “제주도에 온다고 새로 구입한 가구는 하나도 없어요. 일단 집을 짓는 데 돈이 많이 들기도 했고요.(웃음) 완공 후엔 가게를 준비하느라 제 공간엔 신경 쓸 여력이 없었죠.” 1층에서 가져온 당근케이크와 커피를 테이블에 올려놓으며 그가 말했다. ‘마마롱’은 김정한과 파티시에인 그의 조카가 함께 운영하는 케이크 숍이다. 서귀포의 테이크아웃케이크 숍이 SNS 입소문을 타고 유명해지면서 카페 형태로 좀더 규모를 키워 이곳 애월읍에 2호점을 연 것이다. “아마 이 일을 하지 않았다면 저도 파티시에가 되었을 거예요. 원래 케이크를 좋아했거든요. 제가 못다 한 꿈을 조카가 이뤄준 셈이죠.” 직접 빵을 구워 만드는 마마롱의 케이크는 어여쁜 모양만큼이나 맛도 훌륭하다.
“제주에 내려온 후로는 매일 여행하는 기분이에요.”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 까지 제주도에서 살았다는 김정한은 이곳의 풍광이 얼마나 아름답고 다채로운지를 설명하며 진심으로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멀리 갈 필요도 없다. 그저 집 안에서 창밖의 경치를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돌담을 낮게 두른 마당에선 수십 그루의 나무와 묘목이 자라고 있었다. 제일 먼저 보이는 건 밤나무다. ‘마롱’은 프랑스어로 밤을 뜻한다. “그리고 저건 낑깡나무, 그 앞은 보리수나무, 저쪽은 산딸나무예요. 수국이랑 설유화도 있고요. 처음엔 겨울에 잎이 떨어지지 않는 종류로만 들여왔는데, 가을 맛이 안 나는 게 아쉬워서 은행나무도 한 그루 심었어요. 아! 살구나무도 있어요.”
안방과 거실 사이에 난 작은 테라스엔 감귤나무 화분이 놓여 있다. 통유리로 된 1층 케이크 가게와는 대조적으로 2층의 생활 공간은 밖에서 보면 거의 창이 보이지 않는데, 막상 집 안에 들어오면 전망이 탁 트인 느낌이다.
요즘도 그는 서울과 제주를 오가며 생활하고 있다. “촬영이 있는 날엔 첫 비행기를 타고 서울에 가는데, 점점 짐이 줄어서 요즘은 트렁크도 안 가져가요. 이젠 여기가 제집이잖아요. 불편한 건 전혀 없어요. 가족과 학창 시절 친구들이 모두 제주도에 있어 이방인 같은 느낌도 안 들고요.” 봄이 되면 그는 마당 한쪽에 작은 텃밭을 만들 거라고 했다. “케이크에 들어가는 허브 정도는 직접 키워보려고요.”
그가 이야기를 이어가는 동안 창밖에선 싸락눈이 날렸다. 겨울에도 푸른 야자수 사이로 흰 눈이 내리는 풍경은 마치 동화의 한 장면 같다. “서울에선 부러 생활 속에 자연을 담으려고 하는데 여기에선 그럴 필요가 없어요. 눈앞에 보이는 게 다 자연이니까요.” 간소한 삶의 즐거움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 글
- 이미혜(프리랜스 에디터)
- 포토그래퍼
- JEON TAEG S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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