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프없이 사는 법
뉴요커들은 요즘 1809년 통조림 발명 이래 가장 놀라운 식탁의 변화를 경험 중이다. 빨래 개는 정도의 수고로 레스토랑에서나 먹을 법한 케일& 아몬드 샐러드와 프리카를 곁들인 옻나무 향 연어 스테이크와 라브네, 따뜻하게 데운 비트 & 당근 & 아루굴라와 두카 양념한 대구구이 같은 음식을 매일 식탁에 올릴 수 있게된 것이다. 셰프의 손이 달린 로봇이 가가호호 보급됐다거나 음식 순간 이동 기술이 개발된 건 아니다. 이를 가능하게 한 건 정확하게 계량한 식재료와 소스, 단순화한 셰프의 레시피를 박스에 담아 집 앞에 배송해주는 ‘밀 키트(Meal Kit)’의 등장이다. 박스에 없는 건 오직 요리하는 사람, 셰프뿐이다.
푸드 테크보다 아날로그에 가까운 이 발상의 전환은 퇴근 후 물먹은 빨래 같은 몸을 끌고 지하철에 끼어 장을 보러 가는 뉴요커들에게 ‘요리하는 저녁 있는 삶’을 선물했다. 요식업 시장 전문 기관 테크노믹사는 밀 키트 산업이 앞으로 300만 달러에서 500만 달러가량 성장할 거라고 전망했고, 블루 에이프런은 최근 기업 가치를 2조 달러로 평가받았다. 실리콘밸리 투자자들은 이를 식료품 산업의 에어비앤비 혹은 우버처럼 여기며 돈을 쏟아붓고 있다. 밀 키트 업체는 점점 더 전문화되는 추세인데, 채식주의자를 위한 밀 키트, 남부 지방 요리만 전문으로 제공하는 ‘피치 디시’,저녁으로 음료를 마시는 사람들을 위한 스무디 키트를 제공하는 ‘그린 블렌더’까지 등장했다.
카톡 메시지 한 통이면 노량진 수산시장에서 갓 뜬 광어 회 한 접시를 받아볼 수 있는 대한민국에서 ‘밀 키트’는 사실 그리 놀라운 서비스는 아니다. 우리는 이미 반찬은 물론 식재료, 커피, 화장품, 빵, 양말까지 정기 구독하고 있지 않던가. 편의점이 24시간 불을 밝히고 있고 두 집 건너 한 집이 식당인 서울은 실상 배고플 일 없는 도시다. 하지만 편리한 환경이 맛과 건강한 음식까지 보장하진 않는다. 서울살이에서 밀 키트가 필요하다면 때우는 한 끼가 아닌 즐기는 한 끼를 위함이다.
새로운 시대의 식탁을 말하며 한국의 블루 에이프런을 자청하고 나온 업체는 실로 여럿이다. ‘장 보는 스트레스로부터 해방! 건강하지 않은 배달 음식으로부터 해방! 버리는 음식과 돈 낭비로부터 해방!(미국 헬로 프레시사 슬로건)’ 식탁의 혁명을 외치는 미국의 밀키트사와 달리 한국의 업체는 대부분 ‘집에서 만드는 셰프의 요리’ ’10분 만에 만드는 집밥’를 전면에 내세운다. ‘밀 키트’보다는 ‘쿠킹 박스’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키워드를 입력할 때마다 새로운 곳이 등장하니 성장 속도 역시 가파른 상황. ‘또 된장찌개 하시게요?’ 한 쿠킹 박스 업체 사이트에 써 있던 도발 문구를 본 나는 쿠킹 박스를 주문해보기로 했다. 문장의 의도와 달리 된장찌개가 너무 먹고 싶던 배고픈 어느 날 저녁이었다.
테이스트샵(tasteshop.co.kr)은 류태환, 이찬오 등 쟁쟁한 셰프들의 요리를 저녁 식탁에 올릴 수 있는 쿠킹 박스를 내세운다. 셰프들은 자신들의 레시피를 ‘요리 고자’도 따라 할 수 있게 6단계로 단순화했다. 매주 한 가지 또는 두 가지의 요리를 정기적으로 배송받는 시스템이다. 4월 넷째 주 메뉴는 로스트비프와 발사믹 소스 콜드 파스타와 매콤한 멕시칸 스튜. 신청한 다음 날 스티로폼 박스 하나가 도착했다. 개봉한 박스에는 두 가지의 요리가 각각 더스트백에 담겨 있었다. 고기는 진공 포장되어 있었고 흐르기 쉬운 소스는 밀폐 용기에, 채소는 지퍼백과 플라스틱 용기에 담겨 있었다. 물론 가장 중요한 레시피 카드도 두 장 보였다. 쿠킹 박스를 마주한 기분은 어릴 적 프라모델 박스를 개봉할 때와 비슷했는데, 이는 입맛대로 레시피에 변형을 가하던 평소와 굉장히 다른 마음가짐이었다. 셰프의 비법을 전수받겠다는 무의식의 발현이리라. 단순하게 보이던 6단계 레시피는 요리 초보를 긴장시켰고 결국 적혀 있는 예상 조리 시간을 훌쩍 넘겨 두 접시를 완성했다. 그런데 생각보다 뿌듯함이 가장 먼저 찾아왔다. 플레이팅에 공을 들이지 않았음에도 음식은 근사했다. 프라모델 조립하듯 만든 음식을 요리라고 불러도 될지 망설여졌지만 자랑스러움이 모든 걸 덮었다. 신나게 포토 타임을 가졌고 맛을 보았다. 맛 역시 기대 이상이었다! 두 접시에 낸 돈은 3만9,600원. 2인분 기준이니 한 끼에 9,900원인 셈. 마트에 장 보러 가는 시간과 스트레스, 강황 가루나 커민 가루 같은 재료를 상시 소지하지 않고 사는 입장에서 상당히 만족스러웠다.
두 번째로 받아본 쿠킹 박스는 프렙박스(prepbox.co.kr)다. 10년 넘게 도산공원에서 그랑씨엘, 마이쏭을 운영하고 있는 이송희 셰프가 레스토랑 스테디셀러 메뉴를 언제 어디서나 맛볼 수 있게 푸드 박스로 만들었다. 선택은 당연히 그랑씨엘의 간판 메뉴 안초비오일 파스타와 케이퍼 크림소스 치킨 스테이크. 한 번의 경험이 쌓여서일까, 예상 조리시간에 딱 맞춰 15분 만에 파스타를 완성했고 그 맛은 그랑씨엘에서 먹던 것과 동일했다. 여유가 조금 생기고 보니 면수로 파스타 간을 조절한다는 것, 치킨은 껍질부터 구워야 더 크리스피해진다는 것 등 셰프가 꼼꼼히 적어둔 요리 팁이 보였다. 테이스트샵과 프렙박스는 모두 동영상 레시피를 제공하는데 빠른 영상 속 안초비 파스타는 50초 만에 완성된다. 한결 요리가 쉬워진 느낌이다.
마지막으로 시켜본 매직테이블(magictable.co.kr)은 ‘10분 만에 완성하는 집밥 요리’를 슬로건으로 한식 위주의 쿠킹 박스를 제공한다. 2인 가구, 4인 가구 기준으로 메뉴가 구성되는데, 오후 1시 전에만 주문하면 다음 날 우유와 신문 옆에 마법처럼 박스가 놓여있다. 받아본 메뉴는 ‘해초 전복 비빔밥’과 ‘차돌박이와 영양부추무침’. 이 둘을 완성하는데 걸린 시간은 각각 7분과 10분. 볶고, 섞고, 얹었을 뿐인데 한 그릇이 완성됐다. 놀랍도록 간편한 과정을 거친 접시의 맛은 앞선 두 박스에 전혀 뒤지지 않았다. 만약 선택지가 있었다면 절대 고르지 않았을 메뉴였지만 결과는 성공적. 쿠킹 박스는 경험 부족으로 낯선 메뉴를 사전 배제하는 습관적 오류를 차단한다. 늘 만족을 주진 않겠지만 이날 이후 나의 미식의 세계는 한 뼘 넓어졌다.
쿠킹 박스로 여섯 가지 음식을 먹어치우는 동안 냉장고에서 사망해서 실려나가는 식재료가 사라졌다. 그보다 더 감동적인 건 음식물 쓰레기가 거의 생기지 않았다는 것(각 업체 역시 식재료 폐기률이 0~3%일 정도로 상당히 낮은 편). 하지만 쿠킹 박스는 어마어마한 포장 쓰레기를 남겼다. 쿠킹 박스의 두 얼굴이다. 업체에서도 당연히 고민이 많다. 테이스트샵은 친환경 포장재를 알아보는 중이고, 프렙박스는 아예 용기의 질을 높여 세척해서 재사용할 수 있는 소스병을 사용한다. 하지만 아직까지 쿠킹 박스를 ‘친환경적’이라고 말하긴 힘들다.
쿠킹 박스가 이뤄낸 친환경이라고 한다면 오히려 식재료에 있다. 블루 에이프런사는 직접 농장과 연계하여 식재료를 재배하고 윤리적으로 키워진 고기만 사용한다. 그리고 이 내용은 모두 홈페이지에 공개되어 있다. 식재료가 자라는 땅부터 책임지겠다는 얘기다. 얼마 전에는 토지 건강을 위한 식물 재배를 전문으로 하는 농업생태학자를 고용하기도했다. 국내 업체는 대부분 원산지를 ‘국내산’으로 뭉뚱그려 공개해놓긴 했지만 블루 에이프런사 못지않게 식재료에 신경을 쓰고 있다. 테이스트샵은 대부분 가락시장에서 재료를 공급하고 제철 재료나 특별한 재료의 경우 명인과 연계해서 받기도 한다. 프렙박스는 10여 년 동안 레스토랑을 운영하며 개척한 생산자들이 자랑거리다. 레스토랑과 동일한 식재료를 쿠킹 박스에서 사용하고 있다. 경주에서 서울로 진출한 매직테이블의 경우 과거 근처 농장으로부터 식재료를 공급 받았는데 앞으로 그 시스템을 부활시키려고 준비 중이다.
쿠킹 박스가 바꿔놓고 있는 건 단순히 한 끼를 차려 먹는 방식이 아니다. 한 끼의 출발점을 식재료가 자라는 토양부터 시작하는, 환경의 지속 가능성을 중히 여기고 맛에 목숨 걸지만 번거로움까지 감내할 수는 없는 세대가 자기식대로 라이프스타일을 바꾸는 과정이다. 지난주 내가 인스타그램에 올린 사진 한 장과 태그 #오늘저녁 #로스트비프와발사믹소스콜드파스타 #쿠킹박스 #나도셰프에 담긴 의미이기도 하다.
- 에디터
- 조소현
- 포토그래퍼
- ERIC BO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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