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람들은 디지털 시대의 신기술이 패션 생태계를 완전히 바꾸어놓으리라 예견한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아름답던 과거의 이름을 부르고, 오래된 장인 정신과 21세기의 기술을 병치시킨다. 디지털 하이테크 시대의 패션에는 오래된 미래와 생경한 노스탤지어가 공존한다. 3D 모델링, 디지털 패턴 메이킹같은 첨단 기술 덕에 하이테크로 진화한 오늘날의 패션. 메탈릭한 트위드 수트, 장갑, 목걸이, 헤어밴드는 샤넬(Chanel), 귀고리는 프라다(Prada), 매니퓰레이터는 로보티즈(Robotis).
유서 깊은 패션 하우스의 노하우가 집대성된 재킷과 젊은 디자이너가 시도한 하이테크적인 실험의 결과물이 동시에 팔리고 있다. 그것도 둘 다 아주 패기 넘치는 가격표를 붙인 채. 영특한 패션은 한 시대가 저물었다고 등 뒤의 문을 굳게 닫아두는 법이 없다. 패션에 낡은 역사란 없다. 그래서 패션이 두드리지 못할 미래도 없다.
MIT 미디어랩의 컴퓨터 공학자 존 마에다가 미국 크리에이터들의 산실로 꼽히는 로드아일랜드 디자인스쿨의 총장으로 임명됐을 때 그의 역할은 분명했다. 이 미래의 예술가들이 디지털 시대의 최신 과학기술을 스케치 연필처럼 자유자재로 쓸 수 있게 하는 것. 젊은 예술가 집단이 디지털 기술로 이뤄내는 신세계를 보고 있자면 패션 역시 21세기 기술을 실과 바늘처럼 쓸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작년 7월 샤넬의 2015년 오뜨 꾸뛰르 컬렉션에서 칼 라거펠트는 3D 프린터를 이용한 열 벌의 트위드 수트를 선보였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초기 3D 프린터의 적층 방식보다 훨씬 견고하고 정밀한 SLS(Selective Laser Sintering) 방식을 이용해 만든 사각 어깨의 트위드 재킷은 바느질 선 없이 단 하나의 피스로 되어 있다. 라거펠트는 “20세기의 가장 아이코닉한 재킷을, 당시에는 기술적으로 상상할 수 없던 21세기 버전으로 만들고 싶었다”고 전했다.
샤넬의 3D 꾸뛰르 컬렉션은 5월에 시작되는 메트로폴리탄 뮤지엄 오브 아트의 전시 <Manus×Machina: Fashion in an Age of Technology>에서 중요하게 다뤄질 예정이다. 이 재킷이 여타의 하이테크 패션 총아들의 옷과 다른 점은 전통적인 샤넬 꾸뛰르 기술과 하이테크의 융합이기 때문이다. 타이틀에서 짐작할 수 있듯 메트의 이번 전시는 손(Manus)으로 상징되는 전통 기술과, 기계(Machina)로 상징되는 최신 기술이 어떻게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패션을 이끌고 있는가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한편 니콜라 제스키에르는 디지털 시대를 사는 여자들의 상황에 관심을 기울이는 듯 보인다. 2016 봄 컬렉션에서 모델들을 모두 가상현실속 캐릭터처럼 보이게 만든 그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모두 디지털, 가상, 사이버라는 개념과 우리의 진짜 삶을 조화시키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비디오 게임 ‘파이널 판타지’의 캐릭터 라이트닝을 메인 모델로 기용했다.
3D 모델링이나 3D 스캐닝 부스, 디지털 패턴 메이킹 같은 기술은 확실히 요즘 패션 풍경을 21세기적으로 만든다. 그러나 역시 가장 드라마틱한 것은 3D 프린팅이다. 벨기에의 3D 프린팅 전문 회사 머티리얼라이즈는 유튜브에 ‘하이테크 괴짜’로 통하는 디자이너 아이리스 반 헤르펜(그녀가 3D 프린터를 이용해 만든 뼈 모양의 드레스는 2011년 <타임>지에 의해 ‘올해의 50대 발명’에 꼽혔다.
그런가 하면 이스라엘 셴카 칼리지 출신의 젊은 디자이너 대니트 펠렉(Danit Peleg)은 아주 흥미로운 시도를 했다. 바로 저렴한 가정용 3D 프린터로 졸업 작품 다섯 벌을 만든 것! 3D 프린터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던 디자이너가 9개월 만에 이룬 쾌거(아, 솔직히 그 과정은 표현하기 힘든 어떤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여섯 대의 프린터가 24시간 동안 쉴 새 없이 움직였고, 다섯 벌의 옷을 완성하기 위해 2,000시간이 걸렸다)에 <워싱턴 포스트>나 <블룸버그> 같은 매체가 찬사를 보냈다. 그녀의 작업이 상징하는 바는 이렇다. “미래에는 평범한 사람들도 자기만의 설계도를 갖고 집에서 혼자 3D 프린터로 옷을 만들 수 있습니다. 미래에는 여행 갈 때 무겁게 짐을 쌀 필요가 없어요. 호텔 방에 프린터를 놓고 그때그때 원하는 대로 만들어 입으면 되죠!”
패션에서 출발한 것이 아닌, 기술에서 출발한 하이테크 패션(대표적으로 그 많은 웨어러블 테크)의 최근 성과에 입이 떡 벌어진다. 핵심은 사람과의 상호작용. 옷이 사람의 신체적 상태나 감정 표현을 대신한다. 예를 들어 입은 사람의 기분에 따라 색이 변하는 스웨터나 체온에 따라 칼라에 특정 문양이 나타나는 블라우스 같은 것을 예로 들 수 있다. 아드레날린 분비에 반응하는 기술을 적용해, 다른 사람이 필요 이상 가까이 다가오면 고슴도치처럼 뾰족한 가시가 돋아나는 옷도 있다.
전문가들은 웨어러블 테크 기술이 애플 워치처럼 몸에 착용하는 제품이 아닌, 옷이나 섬유 자체에 적용되리라 예측한다. 옷은 사람에게 아주 친숙해서 디지털 세계와 실제 세계 사이의 공백을 메워주는 좋은 매개체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의 하이테크 패션은 아직 아이폰이 되지 못한, 철기시대의 봉화 같다. 아이리스 반 헤르펜은 미래의 디자이너는 전통적 디자인 기술과 21세기 과학기술에 모두 능통해야한다고 주장한다. 나는 거기에 더해 지금은 질문과 답이 필요한 때인 것 같다. 미래를 사는 여자들의 다양한 요구와 필요, 그에 대한 가장 창조적이고 예술적인 대답 말이다. 대체 몇 번의 질문과 답이 오고 가야 우리가 사랑해 마지않는 익숙한 과거 같은 미래가 오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