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또 보고
요즘 뮤지컬이나 연극 티켓을 예매하다 보면 마케팅계 브레인들이 모여 방구석 아이디어를 실험해보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 가령 이런 것이다. 지금 뮤지컬 <난쟁이들>에 할인을 받기 위한 방법은 자그마치 10가지다.이름에 O자가 포함된다면, 마법의 골드바를 가지고 있다면, EU(이유) 없이… 누구라도 10가지 중에 하나는 걸릴 수 있도록 인심 좋게 촘촘한 그물을 걸어놓았다. 이밖에도 많은 공연이 귀여운 할인 혜택을 제공하고 있는데 공통적으로 진행하는 건 ‘재관람 카드’다. “쿠폰 만들어드릴까요?” “카드 가지고 오셨어요?”요즘 극장에서는 커피전문점에서 들릴법한 대화가 오고간다. 재관람 카드는 공연을 여러 번 보는 관객들에게 혜택을 제공하는 카드다. ‘프리퀀시 카드’ ‘마니아 카드’ 등 이름은 여럿이지만 대부분 커피 쿠폰의 원리를 따른다.“3회 관람 시 30% 할인, 5회 관람 시 50% 할인, 10번 관람 시 선물 제공”과 같은 식으로 관람 횟수가 더해질수록 혜택의 범위가 커진다. 재미있는 건 형태다. 공연의 특징이 압축적으로, 위트있게 담겨 있다. 연극 <러브레터>의 재관람 카드는 도서관 대여 카드이고, <거미 여인의 키스>는 면회 기록부다. <마이 버킷 리스트>에는 10가지 버킷 리스트가 적혀 있다. 도장이나 스티커는 기본. <빨래>는 빨래집게 모양 도장을, <엘리펀트 송>은 견과류 도장을, <사랑은 비를 타고>는 우산 도장을 찍어준다. <원스>는 매번 다른 악기 도장을 찍어주고 <유블 패스포트>는 도시별로 출입국 도장을 찍어줘서 완성의 욕구를 불러일으킨다. 목표 지점마다 배우 사진을 넣는 방식은 흔하고도 호응 높은 방식이다. <술과 눈물과 지킬앤하이드>는 중국집처럼 1만원당 쿠폰을 1매씩 제공하고 “쿠폰 합산 가능, 타인에게 양도 가능합니다”라고 통 큰 메시지를 적어놓기도 했다. 과거 한 공연기획사가 인터파크와 함께 재관람카드를 온라인에서 시스템화한 적 있었는데 크게 호응이 없었다고 한 걸 보면 지금 재관람 카드는 일종의 ‘추억템’이자 수집거리이기도하다.
재관람 카드의 시작은 2005년 <오페라의 유령>과 <헤드윅>으로 알려져 있다. <오페라의 유령>은 400회 이상 공연에 재관람률이 15%에 달해 당시 공연계의 전설로 기록됐고 <헤드윅>은 10회를 관람하면 1회 무료 관람이라는 조건을 내걸어 한 공연을 10회 이상 관람하는 관객이 있음을 세상에 알렸다. <캣츠> 등이 그 여세를 이어가 재관람은 마니아가 공연을 보는 하나의 방식으로 자리 잡히기 시작했다. 이후 관객층이 점점 더 넓어지면서 재관람 카드는 대형 극장의 라이선스 뮤지컬보다는 창작공연이나 소극장 공연의 대표적인 이벤트 수단으로 자리를 옮겼다. 당신이 1년에 뮤지컬이나 연극을 보는 횟수가 다섯 손가락 안에 꼽는다면 지금까지 설명한 재관람 카드가 상당히 소소해 보일 것이다. ‘도장 하나 받자고 공연을 한 번 더 본다고?’라고 생각하는 관객은 사실 재관람 카드의 대상이 아니다. 처음에는 모객 마케팅으로 시작했을지 몰라도 지금 재관람 카드는 ‘회전문 관객’을 위해 극단이 준비하는 서비스에 가깝다. 신규 관객을 늘리기보다 재관람 관객의 마음을 견고히 하기 위한 것이다.“2주 전에 <마마 돈 크라이> 개막을 앞두고 사전 티켓 이벤트를 열었는데 60% 이상이 재관람 관객이었어요. 공연기획사 입장에서는 재관람 관객들을 케어하는 프로그램을 만들 필요가 있는 거죠.” 클립서비스 김인혜 팀장의 의견이다. 재관람 관객들은 횟수가 거듭될수록 주변인들을 데려올 확률이 높아지기 때문에 입소문의 일등 공신이기도하다. 초대권 증정이나 MD 상품 제공에서 나아가 이들 관객만을 위한 콘서트를 열고 관객과 대화 자리나 백스테이지 투어를 기획하고 ‘밥차 이벤트’등을 여는 건 “있을 때 잘하자”는 공연계의 진심 어린 마음이다.
‘덕후’ 중에 ‘뮤덕(뮤지컬 덕후)’의 내공이 가장 강하며 이들은 대부분 20~30대 여성이라는 건 사실이기도 하고 사실이 아니기도 하다.“처음에는 특정 배우 때문에 보러 가요. 그랬다가 공연이 너무 좋으면 다른 캐스팅을 찾아서 보러 가게 돼요. 그러다가 다른 페어가 궁금해서 또 가고… 사실 배우가 좋아서 보는 데는 한계가 있어요. 작품 자체에 빠져드는 경우가 더 많아요.” 뮤지컬 팬 H의 얘기다. 그날의 공연을 결정짓는 요소는 그야말로 무수하다. 똑같은 공연이란 있을 수 없다. 재관람은 작품을 다양한 방향에서 느끼고 감동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 “촬영할 수도 없기 때문에 공연을 보는 그 시간을 제외하고는 감동이 허락되지 않거든요. 배우의 숨소리까지 공유했던 그 순간의 감동을 느끼고 싶어서 재관람을 해요”라고 H는 덧붙였다. 초반에는 마니아들만의 문화였을지 모르지만 재관람 카드를 비롯한 공연 환경은 재관람의 문턱을 낮춰가고 있다. <난쟁이들>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매회 다른 카메오를 출연시켜 공연을 볼 때마다 다른 재미를 느낄 수 있도록 한 것이다. 관객이 찾는 새로움, 작품이 제공하는 새로움이 어우러져 재관람의 맛을 더해 가고 있다. 몇 달 전 만난 작곡가 프랭크 와일드혼은 “뮤지컬은 살아 숨쉬고 있어요. 조명이 꺼지면 수백 명이 한 공간에서 동시에 감동의 순간을 맞아요. 배우의 기분이 어떤지, 그날 저녁에 무엇을 먹었는지에 따라서도 달라질 수 있는 게 공연이에요. 살아 숨 쉬는 것만이 가질 수 있는 마법이라고 생각해요”라고 말했다. 배우와 관객이 만들어가는 마법의 순간을,재관람 카드가 널리 퍼뜨리고있다.
- 에디터
- 조소현
- 포토그래퍼
- HWANG IN W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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