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냉면 호불호
오랜만에 만난 후배 K는 요즘 평양냉면 때문에 짜증이 난다는 얘길 털어놓았다. 날이 더워지니 만나는 사람들마다 평양냉면을 먹으러 가자고 그러는데 자신은 평양냉면이 맛있는 줄 모르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평양냉면 안 좋아한다고, 다른 메뉴 먹으러 가자 그러면 하나같이 두 눈을 똥그랗게 뜬다는 거다. “그 맛있는 걸 왜 안 먹어? 아직 평양냉면의 맛을 모르는구나. 초딩 입맛 같으니라고. 내 말 믿고 딱 세 번만 먹어봐. 그 맛에 푹 빠질 테니까.” 평양냉면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건 곧 미식의 세계에 둔감하다는 증거가 되고, 이는 곧 다른 취향까지 보나 마나일 거라는 의심까지 불러온다고 했다. “선배, 전 함흥냉면이 좋거든요? 왜 좋아하는 걸 좋아한다고 말도 못해요?“ 억울해하는 후배에게 새빨간 가자미 회가 듬뿍 올라간 함흥냉면을 사줬다.
얼마 전 <테이스티로드>에 출연해 평양냉면이 곧 ‘스웨그’라며 평양냉면에 대한 애정을 드러낸 딘딘의 경우는 더 심각하다. 래퍼들 사이에는 ‘평사모’라는 평양냉면을 사랑하는 모임이 있는데 비빔냉면을 먹을 경우 멤버들이 이틀 동안 안 놀아준다고 했다. 함흥냉면을 먹지 않는 건 불문율이다. 따돌림을 당하지 않기 위해 딘딘은 평양냉면을 먹기 시작했고 지금은 쇠젓가락이 국물 맛을 해친다며 항상 나무젓가락을 들고 다닌다. 놀이에 가깝겠지만 이쯤 되면 취향의 강요를 넘어선다. 평양냉면, 니들이 뭔데 날 판단해.
사람들이 평양냉면을 미식가의 음식으로 찬양하며 유난을 떨기 시작한 건, 돌이켜보면 채 5년이 되지 않았다. 그전까지 냉면계의 주인공은 함흥냉면이었다. 얇고 쫄깃한 면발을 매콤 새콤한 양념에 비벼 먹는 비빔냉면. 실제 함흥에는 함흥냉면이 없고, 감자 녹말가루로 만든 농마국수가 그 원형임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함흥냉면집에선 시원한 고기 육수를 부은 물냉면도 팔기 시작했고 대중적으로 냉면은 물냉면과 비빔냉면으로 양분화되었다. 속 시원하게 감칠맛 나거나 속이 뻥 뚫릴 정도로 매콤한 맛. 한국 사람 중에 함흥냉면의 맛을 싫어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거다. 전분을 사용하는 함흥냉면은 맛을 표준화하기 용이했고 역사가 깊은 평양냉면보다 빠르게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고깃집, 분식집에 냉면 메뉴가 등장했고 칡냉면, 세숫대야 냉면, 육쌈냉면 등 함흥냉면은 숱한 아류작을 탄생시켰다. 사실 지금도 함흥냉면은 주류를 벗어나지 않았다. 함흥냉면의 맛을 모르는 사람이 없고 늘 손 닿는 곳에 있기에 굳이 장점을 거듭 설파할 필요가 없을 뿐이다.
평양냉면의 사정은 좀 다르다. 메밀가루를 반죽해 면을 뽑고 차가운 고기육수에 말아 내는 평양냉면은 첫술에 모든 이를 사로잡기엔 어쩐지 좀 복잡하다. ‘슴슴하다’ 정도로 표현할 수 있는 평양냉면은 그동안 우리가 익숙하게 먹어왔던 짠맛, 매운맛, 단맛, 신맛, 쓴맛 중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 어린아이가 가장 먼저 배우는 맛이 단맛임을 떠올린다면, 세상의 모든 맛을 다 경험하고 나서야 비로소 알게 되는 최후의 맛 같은 것이다. 함흥냉면에 본능이 작동한다면 평양냉면에는 본능이 미처 찾아내지 못한 영역에 지성을 동원해야 한다. “세 번은 먹어봐야 평양냉면의 맛을 안다”는 속담 같은 조언은 실상 사실이다. 평양냉면의 맛에는 결이 많다. 함흥냉면이 강렬한 양념과 완벽한 비율로 빈틈을 주지 않는다면 평양냉면은 첫술부터 다 먹을 때까지도 변화한다. 면을 국물에 풀기 전과 후, 식초 한 방울이 닿기 전과 후… 그 미묘한 차이가 미식가들의 전의를 불태운다. 영화감독 C는 자신이야말로 얼마 전까지 평양냉면으로 맛을 가르치려고 드는 부류였다고 말한다. “부산 출신이라 20대 후반에 서울에 올라와서 처음으로 평양냉면을 먹었어요. 평생 밀면, 분식집 냉면만 먹었으니 평양냉면을 먹고 어땠겠어요. 정말 무(無)맛이었죠. 그런데 한 번, 두 번 먹다 보니 너무 맛있는 거예요. 뭔가 입맛이 진화했다는 생각이 들어 스스로 뿌듯하고 대견했어요.” 껍질을 깨고 나아간 느낌, 미식의 새로운 차원으로 들어선 것 같은 감동이 있었다. 그 감동을 다른 사람과도 나눠야겠다는 책임감이 샘솟았고 자신이 설파한 걸 듣고 평양냉면에 빠져드는 사람들을 보며 또 한 번 미식 전도사로서 우월감과 뿌듯함을 느꼈다.
우리나라 전체 인구를 놓고 본다면 여전히 평양냉면보다 함흥냉면을 좋아하는 사람이 훨씬 많다. 말하자면 지금은 평양냉면으로 진입하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는 과정에 있기 때문에 선구자들로서 말이 많은 거다. “절대 식초를 넣으면 안 된다” “절대로 숟가락으로 국물을 떠먹지 말고 그릇째 들이켜라” 같은 팁이 반드시 지켜야 할 중대한 법칙처럼 떠도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평양냉면 선구자들의 오지랖 넓은 선교 활동으로 인해 요즘 서울에는 하루가 멀다고 평양냉면 분점이 생긴다. 도도해 보이던 평양냉면집 역시 진입 장벽을 낮추기 위해 함흥냉면의 감칠맛을 받아들여 예전보다 국물에 간을 더 하기 시작했다. 평양냉면의 신흥 강자라고 불리는 능라도가 그렇다.
몇 년 동안 평양냉면만 파던 영화감독 C는 얼마 전 오랜만에 함흥냉면을 먹었다. 그리고 다시 깨달음을 얻었다. 함흥냉면은 그 자체로 충분히 맛있었다. “함흥냉면과 평양냉면은 완전히 다른 음식인데 그동안 냉면이라는 글자에 갇혀 있었던 것 같아요. 평양냉면 좋아하는 사람이 쫄면을 좋아한다고 해서 부끄러움을 느끼는 건 아니잖아요.” ‘평뽕 공력’이 강하다고 은근 잘난 척하는 건 매운 음식을 잘 먹는 걸 자랑스러워했던 과거의 한순간과 다를 바 없다. 지금 평양냉면을 향한 뜨거운 마음은 더 불타오를 수도 있지만 그냥 그렇게 사그라들 수도 있다. 평양냉면은 미식가의 척도가 아니라 사랑받을 가능성이 있는 그냥 음식일 뿐이다. 세상의 모든 맛있는 음식은 이 세상 모든 사람의 혀의 숫자와 동일하다. 냉면에 귀천은 없다.
- 에디터
- 조소현
- 포토그래퍼
- HWANG IN WOO
- 푸드 스타일리스트
- 김보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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