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 너머, 헤더윅 세상
테드 강연과 BBC 인터뷰에서도 비슷한 스타일의 수트 베스트를 입은 걸 봤다.
그런가?(웃음) 주머니가 많아 펜이나 여러 물품을 보관하는 데 편리하다. 스마트해 보이기도 한 것 같고. 타이나 재킷을 좋아하지 않다 보니 이 베스트가 가장 스마트한 아이템이다. 서울은 처음이라 알고 있다. 전시를 앞두고 있는 소감이 어떤가? 몇 년 전부터 세계적으로 헤더윅 스튜디오 전시를 진행 중이다. 이번에 한국에서 여는 전시는 그중 최대 규모가 될예정이다. 작년에 중국과 싱가포르에서 열렸고, 최근 북미 투어를 마치면서 운 좋게 모든 전시 작품을 모을 수 있었다. 한국 독자들이 아주 흥미롭게 전시를 즐기길 바란다. 우리 스튜디오가 그간 어떤 작업을 해왔는지 살펴보는 자리가 될 거다. 서울은 오래된 전통 건축과 새로 지은 현대 건축물이 공존하는 도시라고 들었고, 특히 음식이 맛있다고 하더라. 한국이 단기간에 이룬 특별한 성장에 대해서도 익히 알고 있다.
이번 전시 중에서 가장 눈여겨볼 만한 섹션이 있다면?
프로젝트 24개가 소개되고 세부 오브제만 200여 점이 넘을 예정이다. 그중 ‘스스로 움직이는 의자’가 있다(정식 명칭은 ‘Spun Chair’). 앉으면 넘어지지 않고 빙글빙글 돌아가는 의자로, 이번 전시를 위해 20~30점 정도 새롭게 디자인했다. 그 의자에 직접 앉아 체험해보길 권한다. 누구나 멈출 수 있고 다시 움직여 의자를 돌릴 수도 있다. 많은 사람이 그 의자에 앉아 있으면 전체적인 움직임이 아주 아름다울 거다. 그 모습을 하루빨리 보고 싶다.(웃음)
이 재미난 의자 디자인은 어디에서 영감을 얻었나?
사무실 근처에 광장이 새로 생겼다. 매일 분홍색 옷을 입고 훌라우프를 돌리는 여인이 있었는데, 그녀에게서 영감을 얻었다. 전시에 소개하는 프로젝트 24개의 선정 기준은? 로열아카데미 출신의 헤드 큐레이터가 도맡아 진행했다. 큐레이터는 타계한 아티스트의 작품을 전시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이번처럼 살아 있는 사람의 전시는 특별한 경험이라고 하더라. 물론 난 전시가 끝날 때까지 계속 살아 있고 싶다.(웃음) 그녀와의 협의를 통해 아카이브 가운데 디자인 과정을 잘 보여줄 수 있는 프로젝트에 집중했다. 단순히 독립된 결과물이 아니라 그것을 만들기까지 얼마나 많은 과정을 거쳤는지 단계별로 소개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아이디어는 물론이고 우리 스튜디오가 무엇을 했는지, 디자인이 대중과 어떻게 교감하고 있는지, 스토리와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프로젝트를 엄선했다. 전시를 준비하다 보니 어느 순간 발가벗겨지는 기분이 든 것도 사실이지만 그조차도 흥미로운 경험이었다.
그간의 프로젝트 가운데 특히 개인적으로 의미 있는 작품을 꼽으라면?
초기 작품에 애착이 큰데, 내가 스물한 살 때 만든 첫 번째 빌딩을 꼽고 싶다. 대학 시절,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디자인 빌딩을 만드는지 훈련만 받았지 정작 열정적으로 실행하지는 않는다는 걸 느꼈다. 그래서 진짜 빌딩을 만들기로 결심하고 1992년 함께 공부하던 학생들과 실제 건물(Pavilion Building)을 지었다. 지금은 서펜타인 갤러리에서도 매년 파빌리온 빌딩을 선보이는 등 가건물이 일반화됐지만 당시엔 누구도 그런 시도를 하지 않았다. 건물을 만들기 시작하자 많은 이들이 모델만 만들어도 충분할 거라고들 말렸지만 어쨌든 난 결과물을 만들어보고 싶었다. 아이디어가 현실로 구현되자 자신감이 붙었고, 이것이 오늘날까지 내 작업의 원동력이 되고 있는 것 같다. 그때 아주 작은 씨앗을 활용했는데, 25년이 지난 후 씨앗 성당의 오리지널 모티브가 될 수 있었다. 서툰 학생 작품이지만, 그 파빌리온 모델을 이번 전시에서 만날 수 있을 거다.
많은 이들이 헤더윅 스튜디오의 작업 환경을 궁금해할 거란 생각이 든다.
대학에서 공부할 때 학생들이 나란히 모여 앉아 작업하곤 했는데 그 풍경이 마음에 들었다. 각각 따로 앉아 혼자 아이디어와 씨름하는 것보단 자유롭게 의견을 주고받는 방식이 더 효율적이라 생각했다. 그때 기준으로 지금 스튜디오 자리를 배치했다. 함께 앉으면 나는 디자이너이고 너는 엔지니어라는 식의 역할 구분보다는 오로지 ‘우리’가 문제점을 풀어낼까에 집중할 수 있다. 아이디어는 대화 중간, 우리 사이의 어느 지점에서 탄생하는 것이지 오로지 나의 것, 너의 것은 아니다. 누구나 조사한 자료를 벽에 자유롭게 붙이고, 디자인 디테일이나 문제에 대해 수시로 프레젠테이션을 하며 문제를 풀어간다. 학생들을 스튜디오로 초대해 교감하는 시간을 정기적으로 갖기도 한다. 개인적으로 그 순간이 참 소중하다. 토론은 디자인 결과물을 도출해내는 한 부분이고, 우리 프로젝트는 세상과 협업하는 일이기 때문에 어린 친구들의 의견은 늘 좋은 참고가 된다.
팀워크가 굉장히 중요한 작업 방식이다. 동료들을 뽑을 때 주로 어떤 부분을 가장 먼저 고려하나?
건축부터 조경 디자인이나 공공 디자인 등 전공이 다양하다. 무엇보다 어떤 아이디어를 갖고 있는지를 살핀다. 현실성(Practicality)과 결정력(Determination)도 본다. 자신의 아이디어를 세상에 구현하기 위해선 구체적인 방법에 대한 전략이 있어야 하고, 그를 위해선 투지와 결정력이 요구된다.
‘세계의 디자인 수도’라 불리는 런던은 디자이너에게 기회의 공간이자 치열한 경쟁의 공간이기도 할 것 같다. 본인의 스튜디오가 성공할 수 있었던 가장 큰 동력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글쎄,(웃음) 처음부터 런던에 큰 회사를 차려야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시작한 일이 아니었다. 단지 런던이라는 세상의 한 공간에 산다는 느낌으로 일해온 게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이 도시는 동시대 현상을 포착하고 세상 너머의 것을 보여준다. 전 세계에서 모여든 사람들이 다인종을 이루고 새로운 컨셉, 음식, 전시, 모든 것이 지금의 스튜디오를 운영할 수 있는 자원이 되어준 것 같다. 유년 시절부터 우리가 겪어온 다양한 앵글이 모여서 지금의 아이디어를 내주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꿈꾼 디자이너의 모습과 지금 본인의 모습은 얼마나 다른가?
어린 시절 나는 좀 지루하고 따분한 아이였다.(웃음) 무언가 문제점을 도출해 풀어가는 일에 매력을 느껴서인지 발명가가 되고 싶었다. 생각하고 만들어 테스트하고 실패하다 결국 성공하는 과정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자라면서 발명가의 영역이 한정적이란 사실을 깨닫고는 디자인에 더 많은 매력을 느꼈다. 불가능할 것 같은 세상의 어떤 문제점을 현실화해 해결하고 그 결과물로 사람들을 한자리에 모으는 일이 좋았다.
다리, 건물, 대중교통, 위스키 증류소, 크리스마스카드… 장르를 불문하고 다양한 작업을 해왔다. 더 시도하고 싶은 프로젝트가 있나.
수백 가지가 넘지만 원칙은 있다. 사적인 공간보다는 공공 환경에 관심을 갖고 이와 관련된 것을 작업하려 한다. 왜 사람들은 더 나은 교육과 의료 혜택을 받지 못할까? 세상은 왜 죄를 저지른 이들에게 기회를 주기보다는 감옥으로 보내는 것을 우선할까? 이처럼 사회에 대한 생각이 내게 자극을 주고 더 많은 공공건물을 통해 인류에 더 나은 행복을 주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지난 50년간 수많은 건물이 탄생했지만 몇몇 사람들의 사적인 부와 행복을 위한 건물이 더 많다. 나는 죽은 공간이 아닌 소통하고 즐길 수 있는 공간을 디자인하고 싶다. 우리 사회가 다 같이 잘 살 수 있도록 문제를 해결하는 데 아이디어를 더하고, 그 간극을 메우고 싶다. 우리는 더 많은 훌륭한 공공건물을 지어서 후대에 물려줄 의무가 있다.
많고 많은 디자인 사무소 가운데 ‘헤더윅 스튜디오’를 선택한 특별한 이유가 있었나.
내가 입사했던 10년 전에는 우리 스튜디오가 지금처럼 유명하지 않았다. 열다섯 명의 직원이 근무하고 있었으니까.(웃음) 골드스미스 칼리지에서 가구와 패션 디자인을 공부하던 어느 늦은 밤, 마감에 쫓겨 일하던 와중에 TV에 나온 토머스를 봤다. 그가 프로젝트 진행과정을 설명하는 방법, 물질과 방법론 등이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1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열정을 갖고 일할 수 있는 건 이곳에 몸담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단지 빌딩만 디자인하는 게 아니라 핸드백, 의자, 버스, 다리 모든 것을 만든다. 모든 프로젝트를 소화하는 다양한 기술을 배우는 데 최적의 스튜디오다.
디자이너 180여 명과 소통하고 의견을 조율한다는 것이 쉽지 않을 것 같다. 헤더윅 스튜디오에서 실질적인 토론은 어떻게 이루어지나?
커뮤니케이션이 가장 중요하다. 모든 팀원은 반드시 목소리를 내야 하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스튜디오의 모든 벽을 마그네틱 보드로 마감했다. 자신의 아이디어를 벽에 고정해 즉흥적으로 프레젠테이션을 하고 의견도 교환할 수 있다. 두세 명의 인원, 팀원 전체, 때로는 토머스를 불러와 즉흥적으로 리뷰를 하기도 한다. 토머스가 디자인을 스케치해 우리에게 전달하는 수직 방식이 아니라는 것이다. 한 사람이 하나의 프로젝트를 3주씩 오랫동안 들여다보는 것도 원치 않는다. 아이디어가 어느 순간 틀에 갇혀버리기 때문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디자인 스튜디오이니만큼 아무래도 디자이너의 역할이 가장 중요하거나 중심에 있지 않을까?
우리는 팀원 모두가 디자이너라고 생각한다. 크게 건축과 디자인의 경계를 구분하지 않는다. 단지 디자인 스튜디오라 명명한 것은 3면으로 되어 있는 세상의 모든 것이 건축물과 디자인이 될 수 있고, 반대로 각각의 단면을 독립적인 디자인이라 부를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의 오브제가 크기가 달라지고 그 안에 무언가를 담게 되면 건축물이 될 수 있다. 디자인과 건축, 모든 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스튜디오에서 우리가 가장 집중하는 건 ‘무언가를 만드는 행위(Doing)’다. 이곳은 스튜디오이므로 오피스 근무가 아닌 무언가를 만드는 장소여야만 한다.
이번 전시에서 헤더윅 스튜디오의 철학을 가장 잘 보여줄 만한 작품을 하나만 꼽는다면?
싱가포르의 ‘Nanyang Technological University’ 건물이 아닐까. 대형 토네이도의 움직임을 모티브로 삼은 빌딩으로 우리가 소재에 대해 얼마나 고민하는지 알 수 있는 작품이다. 이번 전시에서 실제 건물과 흡사한 소재와 사이즈의 모형을 전시할 예정이다. 전시용 작품이지만 우리가 얼마나 소재를 중시하는지, 쇼 너머에 얼마나 많은 공정이 숨어있는지 등 우리 스튜디오의 센스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을 거다.
이번 전시는 단순한 프로젝트의 나열보다는 진행 과정을 보여주는 데 집중한다는 점에서 여느 디자인 전시와 차별화된다. 알고 보면 더 좋을 만한 힌트는 없을까?
메인 디자인 프로세스를 ‘Thinking’, ‘Making’, ‘Storytelling’으로 소개할 예정인데, 각 과정에서 다른 요소가 담긴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그중에서도 ‘스토리’에 집중한다면 흥미롭게 관람할 수 있을 것 같다. 누군가가 ‘하나의 스토리(a Story)’를 떠올리면 우리는 그것을 ‘그 이야기(the Story)’로 만들고 ‘프로젝트를 위한 완벽한 이야기는 무엇일까’에 집중한다. 2010년 상하이 엑스포에서 선보인 씨앗 성당을 많이들 알고 있을 거다. 가장 영국적인 아이콘으로 빨간 2층 버스나 우체통 같은 이미지를 떠올리기마련이다. 우리는 더 재미난 이야기를 찾기 위해 조사했고, 영국인들이 꽃과 식물을 가꾸는 ‘가드닝’을 즐긴다는 것에 착안했다. 이번 전시에서는 숨겨진 이야기를 전달하기 위해 프로젝트 모델의 단면을 새로 만들었다. 스펀 체어와 함께 전시의 하이라이트가 되리라 생각한다.
요즘 ‘디자인’이라는 말 자체가 지나치게 소비되는 듯한 느낌도 든다. 본인이 생각하는 ‘굿 디자인’이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베스트 디자인이란 생활 속에서 인식하지 못하게 만드는 디자인이 아닐까. 이를테면 페이퍼 클립처럼 말이다. 그러나 제품이 나오기까지 고통스러운 디자인 프로세스가 있었을 거라 확신한다. 2년간 런던 버스 디자인 작업에 참여하며 좋은 디자인이란 무엇일까를 고민한 적도 있다. 좋은 디자인이란 디테일을 보게 만들기보다는 그 모든 디테일이 하나로 응집된 것이다. 감탄사를 선사하고 감각을 일깨우며 사용했을 때 편안함을 느끼게 하는 거다. 우리는 디자인 자체보다는 아이디어와 디자인 사이의 어디 즈음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노력한다.
언젠가부터 기하학적이고 독특한 외관을 앞세워 대중의 시선을 잡아 끄는 디자인 건물이 각광을 받는 추세지만 헤더윅 스튜디오의 작품은 이와 거리가 먼 것 같다.
우리는 스타일리시한 프로젝트를 지향하지 않는다. 모든 작업이 최대한 그 프로젝트의 의도와 연관성이 있는가에 초점을 맞춘다. 그 의도가 프로젝트의 한 부분으로 작용할 수 있도록 최대한 노력한다. 어떤 문제점이 있는가에 주목해 그것을 풀어가다 보면, 이를테면 런던 가든 브리지나 다른 프로젝트의 경우 그것들이 아이디어와 디자인을 새롭게 창조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 각각의 프로젝트는 유니크해질 수 있고.
크리에이티브한 감각을 잃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다독이는 방법이 있다면?
세상의 모든 것과 소통하고 에너지를 얻는다. 매주 스튜디오에서 직원 모두와 대화하는 시간을 갖거나 정기적으로 워크숍을 떠나는 건 물론이고 관심 있는 어떤 분야가 있으면 관련 전문가를 아예 만난다. 제빵사를 초빙해 빵 만드는 법을 배우기도 하고 크리스토퍼 놀란 영화의 전문가와 영화에 대해 토론하기도 한다. 최근에는 빌딩의 창문만 수집하는 컬렉터를 만났다. 무려 1만7,000여 점을 소장하고 있어 굉장히 자극 받았다.
누구보다 가장 가까이서 토머스 헤더윅을 지켜봐왔다. 디자이너로서 그를 평가한다면?
좋은 말만 해야 하는 건 아니겠지?(웃음) 리더라 무작정 존경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와 조금만 대화를 나누면 얼마나 농담을 잘 건네고 유쾌하며 활동적인 성향인지 알게 될 거다. 200여 명에 이르는 직원의 이름을 다 기억하고 일일이 부르는 데서 인간미를 느낀다. 덕분에 모두가 편안하게 아이디어를 제시하는 완벽한 디자인 회의를 나눌 수 있다. 성격이 너무 좋다는 게 가끔 귀찮기는 한데(웃음)… 때로 마감에 시달릴 때마다 그의 유머 덕분에 에너지를 얻는다. 심각한 논쟁 없이 서로 존중하며 일한다는 건 크리에이티브를 위해 매우 중요하지만, 생각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 글
- 박나리(프리랜스 에디터)
- 에디터
- 윤혜정
- 포토그래퍼
- RA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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