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꾸뛰르 다이어리 – ③ 꾸뛰르 주간 셋째 날
파리 오뜨 꾸뛰르를 취재하기 위해 오랜만에 파리에 왔다. 익숙한 호텔 풍경과 쇼장의 열기, 익숙하지 않은 파리의 여름과 달라진 중국인들의 위상, 프레타 포르테와는 다른 꾸뛰르 쇼의 사소한 풍경들… 한여름 파리 꾸뛰르 주간엔 어떤 일들이 벌어졌나? ▷ ③ 꾸뛰르 주간 셋째 날
7월 5일, 꾸뛰르 주간 셋째 날
10시 셋째 날 첫 쇼는 샤넬이다! 전날부터 여권을 꼭 갖고 오라는 샤넬 측 전언이 이어졌다. 어제 지나다 보니 쇼장인 그랑 팔레 입구엔 검은 장막이 쳐 있고 출입을 철저히 통제하고 있었다. 하긴 유럽의 도시들이 테러 초비상이다 보니 검문검색은 필수다. 수백 명이 일시에 모이는 쇼장 같은 곳은 더더욱 그렇다. 테러를 예방할 수 있다면 패스포트 확인하고 백을 열어보는 정도가 아니라 공항 수준의 검문이라도 즐겁게 응하겠다. 과연 이번엔 어떤 놀라운 세트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까? 초청장엔 일러스트로 보디가 그려져 있었는데 혹시 공방? 예상이 적중했다. 이번엔 샤넬의 공방들을 그랑 팔레에 가져왔다. 그동안 샤넬은 아주 높은 돔형 유리 천장을 가진 엄청나게 넓은 그랑 팔레의 공간감을 최대한 살려 파리의 쇼핑 대로, 초대형 카지노, 초대형 2.55와 재킷, 우주선, 비행기 등을 건설했는데 이번엔 공방. 그러니 스케일을 포기한 대신 디테일에 집중해야만 했다. 사방에 벽을 치고 객석을 가운데로 몰고 빙 둘러 공방들을 배치한 구조. 각자 정해진 섹션에 앉아 사진을 찍으면 여기가 쇼장이 아니라 그대로 공방이다. 디테일은 과연 치밀했다. 자유롭게 예산을 쓸 수 있다는 샤넬 크리에이티브 팀은 공방의 모든 것들을 그대로 옮겨왔다. 온갖 집기들, 옷감 더미, 테이블과 미싱, 자수 재료들과 잡동사니들. 켜켜이 쌓인 오래된 누런 봉투들과 휴지통 속 천 조각과 휴지까지 가져왔으니 통째로 공간 이동했다는 게 정확한 표현이다. 여기에 공방의 모든 장인들과 스태프들까지.
내 눈 바로 앞에선 검정 테 안경을 쓴 단발머리 여자가 모델을 세워놓고 가봉 작업을 하고 있고, 옆 테이블에선 줄자를 목에 두르고 돋보기를 코끝에 걸친 여자들이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다. 리얼리티 프로 출연자들처럼 그들은 쇼장임을 전혀 의식하지 않은 채 작업에만 열중했다.
클래식 연주가 아닌, 파리지엔 취향의 팝송으로 쇼가 시작됐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푸프 헤어처럼 부풀린 머리와 인형 속눈썹 모델들이 공방들 앞을 지나 워킹했다. 하나같이 딱 달라붙는 검정 키튼힐 스키니 부츠를 신고. 주얼리 장식의 전형적인 샤넬 트위드 소재 재킷과 드레스들 뒤를 이어 어깨에 깃털 장식을 한 검정이나 흰색 슬림한 엠파이어 라인 보석 장식 드레스들이 등장했고, 끝으로 갈수록 점점 화려해진 주얼리 장식들이 샤넬 공방의 눈부신 솜씨를 자랑했다.
쇼 중간쯤 가장 튀는 옷인 연분홍 새틴 드레스를 입고 수주가 등장했다. 벌써 몇 시즌째 샤넬 쇼에 꾸준히 서는 수주의 워킹은 자신감이 넘쳐 보였다. 플래티넘 골드 헤어 역시 중국 모델들의 새까만 머리보다 훨씬 세련돼 보였다. 지디만큼이나 샤넬과는 각별한 사이가 된 수주. <보그 코리아>가 거기에 일조한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마리아칼라도 오랜만에 등장했다. 그녀는 주얼리 장식이 군데군데 들어간 흰 칼라의 검정 스커트 수트를 입었는데, 그녀의 날씬한 몸매를 가려버려 유감이었다. 에디 캠벨의 화려한 스팽글과 주얼리로 장식된 핑크색 깃털 가운 드레스를 마지막으로 쇼가 끝난 후, 예정된 순서로 라거펠트가 죽 늘어선 공방들 앞을 지나가며 네 명의 여자 장인들을 차례로 불러내 함께 걸었다. 언제나 여유만만한 백전노장. 샤넬 쇼에서 그를 앞으로 얼마나 더 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는 패션계의 살아 있는 전설이 됐다.
밖으로 나오니 파파라치들이 전 세계 멋쟁이들을 찍느라 난리 북새통이었다. 밀라 요보비치가 아홉 살 딸 에버와 함께 왔고, 윌 스미스와 딸 윌로우 스미스도 왔다. 사람들이 셀럽 2세들에게 왜 열광하는지 알 것 같았다. 엄마와 눈매가 꼭 닮은 에버는 신비롭게 예쁜 소녀였고, 곱슬머리의 가무잡잡한 윌로우는 통통 튀는 매력의 아가씨였다. 우월한 유전자를 갖고 태어난 빼어난 미모의 청춘들에게 환호를 보내는 것은 당연했다.
6시 호텔로 돌아와 잠시 쉬다가 아르마니 프리베 쇼장으로 갔다. 격자무늬 간유리벽이 과연 아르마니 쇼장다웠다. 나는 두 번째 줄에 앉았는데 세상에나! 건너편 프런트 로에 새까만 머리의 아시아 여자들이 엄청 많았다. 쇼마다 나타나는 예쁘고 통통한 중국 아가씨도 이미 와 있었다. 다른 아시아인들은 없고 중국인들만 우글거린다고 하니 옆자리 <더블유> 기자가 나직한 목소리로 “우리에겐 한류가 있잖아요”라고 대꾸했다. 쇼가 시작되자 아르마니 프리베 특유의 고급스러운 팬츠 수트와 드레스들이 쏟아졌다. 하운드투스 비슷한 체크 패턴과 커다란 도트 패턴, 검정 벨벳과 크리스털, 리본 장식 등을 이용한 화려한 이브닝 룩. 특히 크리스털 재킷과 검정 벨벳 할렘 팬츠, 리본 장식 크리스털 드레스, 크리스털 장식 검정 벨벳 백리스 드레스 등은 고객들의 마음을 뒤흔들 것이다.
그 옷들은 특별한 패션 감각 없이 누구나 소화할 수 있는 이브닝 룩이었다. 화려한 파티 룩이 필요하면 가장 먼저 시도해볼 만한 옷. 디자인이 튀거나 부담스럽지 않으면서 충분히 파티의 여왕이 될 수 있는 옷. 자신의 이름을 딴 ‘아르마니 룩’이란 단어를 패션 사전에 남긴 남자의 완성도 만점 옷. 아르마니 제국의 해는 아직 지지 않았다.
- 에디터
- 이명희 (두산매거진 에디토리얼 디렉터)
- 포토그래퍼
- JAMES COCHRANE, LEE MYUNG HEE, INDIGIT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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