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세대의 패션 정치학
정치판이 패셔너블해졌다. 샴페인 잔 대신 플래카드를 들고 거리로 나선 패션 액티비스트들. 거리낌 없이 제 목소리를 내는 새로운 세대의 패션 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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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지금 이 글을 쓰는 동안, 영국이 EU(유럽연합)를 떠나기로 투표했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저를 비롯한 창조적인 업계의 사람들이 바란 것과 정반대의 결과입니다. 또 이번 결과는 세상이 암울할 때 예술적 창조력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려주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패션은 실용적 차원에서도 그렇지만, 표현의 방법으로서 삶의 커다란 즐거움 중 하나입니다. 이번 사태는 패션이 불러일으키는 다양한 아이디어와 영감이 함께 뒤섞인 사건입니다.” 9월호 편집장의 글을 쓰던 영국 <보그> 편집장 알렉산드라 슐먼은 ‘브렉시트(Brexit)’를 두고 이렇게 평했다.
영국패션협회의 설문 조사에 따르면 290여 개 브랜드와 디자이너 중 90%가 EU에 남기를 희망한다고 밝혔다. 왜 패션계 사람들이 국제적 정치 사안에 민감하게 굴었던 걸까. 6월 23일 국민투표가 시작되기 전 열린 런던 남성복 컬렉션에서 이유가 발견됐다. 다양한 유럽 국가 출신의 디자이너들과 함께 일하는 젊은 디자이너, 유럽 곳곳에서 제품을 생산하는 럭셔리 브랜드 모두 영국의 EU 탈퇴를 반대하는 목소리를 높였기 때문이다. 가장 적극적으로 ‘Remain’ 의견을 대변한 사진가 볼프강 틸먼스가 런던 패션협회 건물에 정치적 구호를 담은 포스터를 전시한 것이 시작이다.
시블링의 듀오 디자이너와 E. 타우츠의 패트릭 그랜트는 ‘In’이라는 단어를 새긴 티셔츠 차림으로 피날레 인사를 건넸다. 또 크리스토퍼 래번은 아예 ‘In’을 반복적으로 사용한 옷을 선보였고, 새로운 악동 찰스 제프리는 여러 방법으로 ‘영국다움’이라는 것에 대한 의문을 컬렉션에 담았다. EU 학생들을 지원하는 프로그램, 에라스무스를 통해 파리에서 패션을 배울 수 있었던 다니엘 W. 플레처는 거리에서 ‘Stay’를 주제로 게릴라 프레젠테이션을 열었다.
패션계 선배들 역시 극도의 상실감을 표했다. “정말 슬픕니다. 사람들은 대체 무엇 때문에 투표를 하는지 모르는 것 같아요.” 로에베 프레젠테이션 현장에서 만난 조나단 앤더슨은 절망적 표정으로 덧붙였다. “이건 악몽이에요.” 같은 날 디올 옴므 쇼장에 나타난 칼 라거펠트 역시 이번 사태를 “광기의 순간”이라 꼬집었다. 꼼데가르쏭의 대표이자 레이 가와쿠보의 남편 애드리언 조프는 새로운 중세 시대가 펼쳐졌다며 분노했다. “이제 더 이상 현대적인 세계는 없습니다. 현대적인 세계는 함께 있고 함께 일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패션과 정치는 어울리는 한 쌍은 아니다. 영국의 신임 총리가 마르니풍의 거대한 목걸이를 즐기고, 미국 <보그>의 안나 윈투어가 미국 대선 후보의 의상을 지휘한다고 평하는 건 단편적 패션의 역할을 논하는 것에 그친다. 하지만 정치의 정의를 정부와 국가 활동 이상으로 확대해보면, 패션과의 연관성은 높아진다. 문화적 현상, 성 역할의 변화, 사회의 진화 등을 정치로 보면 패션은 생각보다 긴밀한 관계를 지닌다. 캐서린 햄넷의 슬로건 티셔츠, 비비안 웨스트우드의 게릴라 시위 뒤를 잇는 후배들의 패션 정치학은 꽤 다양한 방향으로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지금 미국에서 가장 중요한 사회적 이슈는 바로 ‘Black Lives Matter’ 운동이다. 경찰의 무자비한 폭력에 희생된 흑인들을 추모하기 위해 시작된 운동으로 대단한 사회적 반향을 일으켰다. 비욘세와 킴 카다시안은 ‘#BLACKLIVESMATTER’라는 해시태그를 수천만 명의 팔로워에게 전했고, 애덤 셀먼, 잭 포즌, 맥스웰 오스본 등의 디자이너가 재빨리 그 뒤를 이었다. 조단 던, 그레이스 볼, 그레이스 마하리 등 흑인 모델 역시 다양한 이미지로 자신의 의견을 표했다. 선배 모델 나오미 캠벨은 불필요한 경찰 폭력으로 사망한 130명이 넘는 흑인들의 이름을 일일이 적어 올리며 이렇게 덧붙였다. “제 마음은 부서집니다.”
그런가 하면 뉴욕의 새 브랜드, 파이어 모스(Pyer Moss)의 디자이너 커비 진-레이먼드(Kerby Jean-Raymond)는 지난해 흑인 인권의 실상을 담은 다큐멘터리와 함께 쇼를 선보였다. 암울한 현실에 절망한 채 자살한 인권 운동가의 유언을 피켓으로 들고 나온 모델도 있었다. 패션 속에 정치적인 사안을 담는 것이 두렵진 않았을까? “누구도 책임지려 하지 않아요. 다른 사람의 문제라 여기죠.” 뉴욕의 스타일리스트 한나 스타더마이어(Hannah Stoudemire) 역시 패션계가 흑인 인권을 중요시하지 않는다며 분노했다. 그래서 지난 7월 중순 뉴욕에서 열린 남성복 컬렉션에서 게릴라 시위를 벌이기로 결정했다.
2016년 테러리즘과 함께 전 세계적으로 가장 큰 사회적 이슈로 떠오른 건 페미니즘이다. 지금 여성을 둘러싼 이슈는 이른바 현대적 지성인과 구시대적 발상의 인물을 나누는 가장 큰 잣대다. 여성을 위해, 여성에 의해 움직이는 패션계가 페미니즘을 논하지 않을 이유는 없다. 샤넬은 이미 2년 전 가상의 페미니즘 시위를 그랑 팔레에서 열었고, 엠마 왓슨은 디올 수트 차림으로 UN에서 여성 인권에 대해 열변을 토했다. 비욘세는 구찌 드레스를 입고 여성의 힘에 대해 이야기하고, 미셸 오바마는 보스의 시스 드레스 차림으로 오프라 윈프리와 함께 여성 인권을 두고 대담에 참여했다.
영국 모델 조단 던은 ‘#ActuallySheCan’이라는 캠페인의 모델로 섰다. 영국의 티셔츠 브랜드 ‘르 모토(Le Motto)’와 함께 여성들에게 힘을 주는 문구를 담은 티셔츠를 준비한 것이다. “여성들이 자신의 꿈과 목표를 실현하고 성공할 수 있도록 돕고 싶어요.” 덕분에 그녀의 친구인 카라 델레빈과 알렉사 청, 칼리 클로스 등은 ‘Less Regret, More Sweat’라는 문구가 적힌 티셔츠를 입고 인스타그램에 인증하느라 바쁘다.
새로운 유럽 대륙, 흑인 인권, 페미니즘 외에도 다양한 이슈가 우리를 둘러싸고 있다. 다행히 우리는 어느 때보다 정치적 입장을 알리는 데 수월한 환경에 살고 있다. 인스타그램 포스팅 하나면 세련된 방식으로 자신의 의견을 공식화 할 수 있으니 말이다. 가령 런던 디자이너 벨라 프로이드는 일주일에 하나꼴로 다양한 사회적 이슈를 알리고 있다. 더는 정치적이라는 것이 거리에서 화염병을 던지는 것과 상관없는 세상이다.
누군가는 이러한 ‘간편한 정치적 행동’이 인스턴트적인 방식이라 비꼬지만, 어떤 식으로든 사회 변화를 인식하는 건 긍정적인 현상이다. ‘브렉시트’를 앞두고 특별히 ‘정치 스페셜’을 준비한 <i-D> 매거진은 젊은 독자들에게 이렇게 물었다. 과연 패션은 정치적일 수 있을까? 그중 한 명이 이렇게 답했다. “당연하다. 입고, 알리고, 지지하고, 사랑하라!”
- 에디터
- 손기호
- 포토그래퍼
- COURTESY PHOT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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