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Stitch in Time
크리스토퍼 베일리는 패션쇼가 열리는 동시에 컬렉션 룩을 살 수 있는 ‘See Now, Buy Now’ 시스템을 도입해 패션 캘린더를 뒤흔들었다. 버버리의 셉템버 컬렉션 일부를 〈보그〉가 독점 공개한다.
A Stitch in Time
“꼭 <찰리와 초콜릿 공장> 같죠!” 크리스토퍼 베일리는 빛이 환하게 들어오는 버버리 런던 본사 디자인 실험실로 나를 안내하며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영국의 빗소리를 증폭시키기 위한(그래서 이곳을 방문하는 모든 이에게 브랜드의 뿌리가 대영제국의 우천용 의류 공급업체였다는 걸 상기시키기 위해) 물결 모양 투명 플라스틱 지붕이 특징인 웅장한 이 건물은 제2차 세계대전 전에 지어졌으며 지금의 인테리어는 베일리가 직접 고안한 것이다. “이곳엔 페인트칠하는 사람을 비롯해 3D 프린터 프로그래머, 수놓는 사람, 포장 디자이너에 이르기까지 다 있습니다. 컴퓨터 프로그래머, 사진, 음악, 건축과 관련된 전문가들이 다 모여 있죠. 우리는 가구와 건물을 직접 꾸몄어요. 사진과 영화 스튜디오도 있습니다. 한마디로 소규모 디자인 스쿨인 셈이죠.”
베일리는 장인들의 솜씨를 지지하는 동시에 기술 혁신의 선구자였다. 예를 들어 2009년 버버리는 런웨이 쇼를 생방송으로 스트리밍한 최초의 브랜드였다. 그래서 그는 패션계가 기술 변화를 잘 수용하지 않으려 한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하다. “발전을 사랑하는 산업(새로움과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는 것이 중요한)으로서 어떻게 우리의 모든 삶에 변화를 가져온 신기술에 흥분하지 않을 수 있죠?”라고 그는 묻는다. “저에게 그건 정말 짜릿한 일이에요. 예전에는 해외여행을 할 때 빌어먹을 CD 컬렉션을 다 들고 다녔어요. 그래서 사람들이 저를 비웃었죠. 지금은 그 모든 음악이 이 작은 아이폰에 다 담겨 있습니다. 정말 멋진 일이죠! 언젠가 위대한 산업혁명 시대를 돌아보듯 지금을 뒤돌아볼 겁니다. 실제로 그렇거든요. 우리의 삶은 아주 극적으로 변하고 있어요. 정말 신나는 일이죠.”
그러나 지금은 패러다임의 변화를 목표로 하고 있다. 이 기사를 위해 독점으로 촬영한 룩은 9월 19일 런웨이에서 선보일 예정이다. 다른 브랜드에서 2017 S/S 컬렉션을 선보일 때 말이다. 그리고 그 옷은 쇼 바로 당일, 전 세계 버버리 매장과 온라인을 통해 살 수 있다. 이 컬렉션(과거 프로섬, 런던과 브릿 라인을 버버리 레이블로 단일화한)은 ‘셉템버(September)’로 불릴 것이며 내년 초에는 ‘페브러리(February)’ 컬렉션을 선보일 것이다. “저는 계절이라는 개념이 매우 혼란스러워요.” 그는 1990년대에 도나 카란의 디자이너로 처음 일할 때 노동절(미국과 캐나다에서는 9월 첫째 월요일) 다음 날 모든 사람들이 여름 옷을 치우고 가을 옷을 꺼내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 “우리가 지금도 그런 식으로 살고 있는지 잘 모르겠어요. 오늘날은 각자의 ‘유니폼’ 같은 게 있어요. 그리고 거기에 새로움과 패션을 첨가합니다. 그래서 계절과 무관한 컬렉션을 선보이는 게 우리에게 더 타당하게 느껴지죠.” 셉템버 컬렉션은 베일리가 고향 요크셔에 있는 시골집(1636년에 지어진)에 와이파이를 설치하며 경험한 좌절감에서 시작됐다. 그 집은 그가 최근까지 파트너인 배우 사이먼 우즈 그리고 어린 두 딸과 살던 곳이다(그 후 그들은 출퇴근이 보다 용이한 코츠월드로 이사했다). “정말 끔찍하게 힘들었어요. 벽이 너무 두꺼웠거든요. 그걸 계기로 그 집이 경험한 다른 모든 삶에 대해 생각하게 됐어요.”
이런 역사의 결을 살피며 깨달은 변화와 혁신(배관, 전기, 인터넷)은 그에게 <올란도(Orlando)>를 떠올리게 했다. <올란도>는 성별이 모호한 인물의 시간 여행을 그린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이다. 여기서 주인공은 엘리자베스 1세 궁정에서 아름다운 급사로 시작해 1928년 무렵엔 성공한 여성 작가가 된다. 이 책을 각색한 샐리 포터 감독의 1993년 영화에선 젊은 틸다 스윈튼이 주인공 역을 맡았다. “저는 세월의 켜를 벗겨내고 과거에서 미래로 나아가는 것에 대해 우리 팀과 얘기를 나눴어요.” 그는 팀원들이 울프의 책을 읽게 했다. 여러 명의 디자이너들이 컬렉션에 영감을 줄 아이디어를 함께 모았고 거기에는 원예의 대가인 낸시 랭커스터가 계획한 조경 이미지, 19세기 초의 군복, 엘리자베스 시대의 드레스, 빅토리아 앤 앨버트 뮤지엄에서 연구한 옛 벽지 그리고 사내에서 탄생한 낭만적인 장미 프린트가 포함됐다. 이런 아이디어는 겹쳐 입도록 디자인한 남녀 의상 모두에 독창적으로 반영됐다. 새로 선보이는 ‘Bridle’ 백 역시 남녀 모두를 위한 스타일로 디자인했다. “성별은 더 이상 나뉜 게 아니에요.” 남성복과 여성복 캠페인을 늘 함께 찍어왔고 두 컬렉션의 동시 작업을 겁내지 않은 베일리는 말한다. “어쨌든 늘 그렇게 해왔으니까요. 건물이든 컬렉션이든 가구든 향수든 책을 디자인할 때든.”
2001년 디자인 디렉터로 버버리에 합류한 베일리는 2014년에 이 회사의 CEO가 됐다. 그러나 7월에 마르코 고베티(과거에 지방시와 셀린에서 일했던)가 내년부터 그 역할을 맡게 될 거라는 발표가 있었다. 베일리는 수석 디자이너로서의 자리를 유지할 뿐만 아니라 이 회사의 사장으로 일할 예정이다. “저는 고객이 보고, 느끼고, 만지고, 냄새 맡는 것에 더 집중할 필요가 있어요. 그래야 우리가 하고 있는 일, 다시 말해 기술과 아름다운 장인 정신을 결합하는 작업을 제가 열광하는 삶에 적절하게 어울리도록 만들 수 있을 테니까요.”
The ‘September’
8월의 어느 날, 버버리 PR팀이 <보그> 사무실을 방문했다. 여름 드레스로 입기 좋은 얇은 버버리 코트 차림의 두 여인은 커다란 박스를 소중하게 안고 있었는데, 비밀스러운 상자를 열기에 앞서 문서 한 장을 조심스럽게 내밀었다. 그것은 앞으로 보게 될 내용을 공개하지 않겠다는 비밀 유지 각서. 보기만 해도 엄숙한 종이에 사인을 하지 않는 이상 나는 결코 판도라(모든 매력과 파괴적인 호기심까지 두루 갖춘!)가 될 수 없을 것이다. 사실상 선택의 여지는 없지만 괜스레 머뭇거리며 사인을 하자, 비밀의 문처럼 묵직해 보이던 빳빳한 종이 상자는 예상외로 가볍게 열렸다. 그 안에는 ‘셉템버’ 컬렉션을 위한 크리스토퍼 베일리의 인스피레이션 북과 당시 아직 공개 전인 컬렉션 데이터가 담긴 아이패드가 들어 있었다. “영국 본사에서 상자째 받았죠. 이 아이패드도 함께요.”
컬렉션 쇼가 공개되기 전에 미리 옷을 본다는 건 매우 이례적인 경험이다. 바로 전 시즌까지만 해도 아주 중요한 위치에 있는 극소수의 에디터들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 버버리 덕에 우리는 컬렉션 티켓이 귀하디 귀하던 시절, 수많은 군중을 뒤로하고 유유히 쇼장 안으로 들어가던 기분을 다시 만끽할 수 있었다. 유후! 그렇지만 이 허영심이 쇼장에서의 가슴 두근거리는 긴장감과 기대감이 반 이하로 줄어드는 아쉬움을 동반한다는 것은 또 다른 아이러니다.
인스피레이션 북은 코발트색 꽃무늬 실크(새 컬렉션의 대표적 원단)로 시작됐다. 베일리의 첫 번째 시즌리스 컬렉션에 영감을 준 인물은 영국의 인테리어 디자이너이자 정원 디자이너 낸시 랭커스터. 그녀는 인테리어 디자인사에서 ‘The English’ 혹은 ‘English Country House’라 불리는 스타일을 정립한 여인이다. 1930년대에 그녀의 스타일은 햇볕에 바랜 듯한 친츠 원단과 선명한 색의 벽지, 서로 다른 시대의 가구를 캐주얼하게 믹스해 흐트러진 듯 안락한 분위기의 실내를 연출하는 식이다. 향수를 불러일으키면서도 편안하고 실험적인, 영국 특유의 쿨한 절충주의는 클래식한 업홀스터리용 원단과 헌팅 재킷, 스웨트셔츠 같은 캐주얼한 아이템의 믹스, 실크 파자마와 두툼한 아우터의 매치에서 드러난다.
미국 <보그> 해미시 보울스의 기사에서도 언급했듯이 베일리는 새로운 컬렉션 스케줄에 대해 설명하며 각각의 컬렉션이 명확하게 여름과 겨울 날씨를 반영하는 것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날씨와 격식, 성별, 국적, 모든 경계가 흐려지는 시대를 살고 있는 지금, 베일리의 버버리 컬렉션은 패션에 있어 가장 시의적절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버지니아 울프의 <올란도>는 시대뿐 아니라 성별까지 넘나드는 인물을 그리고 있습니다. 여성스러운 러플 장식과 부드럽게 흐르는 실루엣의 남성복은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로맨틱한 정서를 담고 있죠.”
그리고 광고 속 모델 진 캠벨은 아이코닉한 영국군의 레드 코트를 재해석한 푸른색 밀리터리 재킷을 실크 파자마 위에 걸치고 있다. 재킷은 섬세하고 복잡한 매듭 자수로 장식돼 있고 새로운 디자인의 ‘브라이들’ 숄더백의 스트랩에는 태슬이 달랑거린다. 인스피레이션 북의 한 페이지에는 이런 글귀가 쓰여 있다. “고도의 수공예 기술이 적용된 컬렉션에는 장인의 손으로 만든, 역사적인 디테일의 장식이 가미돼 있다. 이 컬렉션은 의상과 액세서리 사이에 대조를 이루며, 과거의 지나간 순간으로부터 (또 다른) 새로운 현실을 만들어내기 위해 모든 것이 서로 뒤섞여 있다.”
크리스토퍼 베일리가 온 이후로 버버리의 매출에서 의상이 차지하는 비율은 드라마틱한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그 어떤 패션 브랜드도 안정적 수익 구조를 위해 가방 컬렉션을 소홀히 하는 일은 없다. 새로운 시스템과 함께 선보인 브라이들 백은 셉템버 컬렉션과 동일 선상에 있다. 버버리와 영국의 전통을 반영한 승마용 새들백 형태로 디자인 했지만 화려한 스터드 장식 스트랩은 요즘 가장 트렌디한 디테일. 스트랩과 가방을 잇는 크고 둥근 링도 말안장의 금속 고리에서 따왔다. 남성용은 형태가 조금 더 길고 두께는 비교적 얇다. 그렇지만 여전히 남성용과 여성용이라는 구분은 무의미하다. 남성용 가방에 대한 버버리 PR 담당자와 나의 의견이 일치했으므로. “이것도 실용적일 것 같은데요! 내가 들어도 되겠어요.” 21세기의 이상적인 패션 인류는 버버리 룩의 올란도인지 모른다.
- 에디터
- 송보라
- 포토그래퍼
- ANNIE LEIBOVITZ, CHUNG WOO YOUNG, COURTESY OF BURBERRY
- 글
- 해미시 보울스(Hamish Bowles) (A Stitch in Time)
- 헤어
- 도모히로 오하시 (Tomohiro Ohashi)
- 메이크업
- 리사 휴튼(Lisa Houghton)
- 세트 디자이너
- 메리 하워드 (Mary Howa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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