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 Rouge
크리스찬 루부탱을 정의할 색은 ‘빨강’이다. 뒤로 돌아야만 바라볼 수 있는 관능의 빨강 밑창은 루부탱의 상징. 우리 여자들에게 빨강의 쾌락을 선물한 그를 파리에서 만났다.
크리스찬 루부탱을 만나는 과정은 보물찾기 퀘스트를 깨는 듯했다. 지난가을 파리 패션 위크 둘째 날, 1992년부터 장자크 루소 거리를 지킨 루부탱의 첫 매장으로 향했다. 19세기 초에 만든 파사주(상점이 늘어선 통로) 갤러리 베로 도다의 입구를 의기양양하게 지키고 있기에 찾는 데 어렵지 않았다. 굳게 닫힌 문이 뜻밖이었지만 옆으로 이어지는 빨간색 발자국 스티커가 눈에 띄었다. 발자국이 끝나는 곳에서 커다란 문을 열자 야자나무가 드리워진 중정과 사무실이 보였다. 그러나 분주해 보이는 사무실 어디에도 루부탱은 없었다. “저쪽으로 올라가면 돼요.” 비밀 다락방으로 향하듯 가파르고 좁은 계단을 올라가자 슈즈 디자인에 영감을 줄 각종 사진과 메모, 예술 작품으로 꽉 찬 그의 공간이 나타났다. “봉주르! 제가 크리스찬입니다.” 악수를 건네는 손 너머로 시간대별로 빽빽하게 채워진 스케줄표가 보였다. 어릴 때 <보그>를 본 적도 없을 만큼 패션 외에 다른 데 관심이 많았던 그가 어떻게 세상에서 가장 바쁜 구두 디자이너가 됐을까? 무희들의 신발을 만들고 싶어 극장 폴리 베르제르에 들어가고, 찰스 주르당에서 인턴으로 일하던 시절부터 전 세계 100여 개의 매장을 갖고 있는 지금까지 그의 호기심은 신발을 넘어 전방위로 확장되는 중이다. 루부탱의 구두를 그저 ‘<섹스 앤 더 시티>에 나와 유명해진 신발’로 설명하기엔 부족한 이유가 여기 있다.
VOGUE KOREA(이하 VK) 2017 S/S 시즌 역시 여러 도시 패션 위크에서 당신의 구두를 볼 수 있었어요. 파리에서 열린 크리스찬 루부탱 프레젠테이션은 물론, 다른 브랜드의 구두까지 준비하느라 바빴을 것 같군요.
CHRISTIAN LOUBOUTIN(이하 CL) 정말 얼마 전까지는 바쁜 일정의 연속이었죠. 하지만 캣워크가 시작되기전에 모든 걸 끝내야 하는 특성상, 패션 위크가 열리는 지금 제가 할 일은 끝난 거나 마찬가지예요.
VK 뉴욕에서는 잭 포즌, 런던에서는 데이비드 코마, 파리에서는 올림피아 르탱 등과 협업했어요. 같이 작업하는 대상을 선정하는 기준이 있나요?
CL 우선 젊은 디자이너들과 작업하려고 해요. 그들을 키우고 돕는 게 중요하니까요. 때로 젊은 디자이너들의 쇼를 보면 아무리 아름다운 드레스를 선보여도 예산 등의 이유로 액세서리 디테일이 떨어져 보일 때가 있어요. 신발이 옷의 아름다움을 깎는 요소가 될 수 있다는 얘기죠. 그래서 작업 성과가 좋고 능력 있는 젊은이들과 함께하려고 해요. 그리고 또 하나의 기준, 여자에게 의미가 있어야 해요. 최근 어려움에 처한 세네갈의 여자와 소녀를 돕는 단체 ‘라 메종 로즈(La Maison Rose)’와의 협업이 또 다른 예가 되겠네요. 단체의 대표 발레리 슐름베르거와는 10대부터 친구예요. 그녀와 함께한 프로젝트는 루부탱 제작 기술을 직업 교육에 응용해 여자들이 공예품을 만들어 사회에 진출할 수 있도록 돕는 취지죠.
VK 그렇다면 언젠가 한국의 젊은 디자이너들과 작업하는 건 어때요?
CL 물론 좋죠! 저는 늘 열려 있어요. 협업을 통해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저 역시 개인적으로 교류할 수 있는 인연을 만드는 거니까요.
VK 최근 파리 봉 마르셰에서 팝업 스토어를 열었어요.
CL 그 이벤트는 파리를 기념하는 게 목적이었어요. 올해 파리에서는 테러 등 정말 많은 일이 일어났죠. 자신이 사는 도시에 그토록 힘든 일이 닥치면 그 도시를 사랑하는 마음이 더 커지잖아요? 파리지앵은 파리에 대한 사랑이 남달라요. ‘Made in Paris’라는 주제로 구두 열다섯 가지를 선보이는데 봉 마르셰처럼 파리지앵에게 오래 사랑받은 백화점은 없었죠.
VK 당신은 매번 신발에 재치 있고 독창적인 이름을 부여해요. 유투(YouToo), 튜더 영 플랫(Tudor Young Flat) 등등. 이런 ‘네이밍’은 어떤 과정을 거치나요?
CL 상황에 따라 달라요. 영감은 어떤 형태로든 받을 수 있죠. 그래서 특정한 규칙이 없어요. 이건 제가 일하는 방식입니다. 2004년에 처음 선보인 펌프스 ‘피갈(Pigalle)’에 얽힌 에피소드를 들려줄까요? 50년대 파리의 홍등가 피갈을 배경으로 한 뮤지컬 영화 <당신에게 오늘 밤을>(1963)에서 영감을 받았어요. 매춘부로 등장하는 주인공 셜리 맥클레인은 초록색 스타킹과 허벅지가 드러나는 스커트, 검은색 하이힐을 신고 나오죠. 미국 영화라 프랑스 여자를 몹시 과장해서 섹시하게 표현했더군요. 또 어릴 때 저는 친구들과 피갈의 어느 신발 가게에 가서 하이힐을 구경하곤 했어요. 그런 경험과 감상도 반영했습니다.
VK 예전에 힐이 점점 더 높아지는 것에 대해 어떤 면에선 책임을 느낀다고 말한 적이 있어요. 하이힐을 유행시킨 사람이 당신이라 그럴까요? 당신이 생각하는 하이힐의 매력은 뭐죠?
CL 하이힐이 지닌 특별한 점은 여자의 걷는 방식을 바꾸는 데 있어요. ‘보디랭귀지’라는 점에서 저는 하이힐을 신는 게 긍정적 변화라고 말하고 싶어요. 저도 물론 편안한 플랫 슈즈가 좋아요. 다만 하이힐을 신으면 자신의 몸에 대해 의식적으로 생각하게 되는 경향이 있어요. 또 가슴과 엉덩이의 라인을 살려준다는 점에서 매력적이죠.
VK 많은 뮤지션의 노래에 루부탱이 등장해요. 제니퍼 로페즈는 ‘루부탱’이라는 노래를 발표했고 칸예 웨스트, 제이지 같은 힙합 아티스트의 노래에도 루부탱이 언급돼요. 여기서는 아무나 갖기 힘든 럭셔리 슈즈라는 의미가 강한데, 이와 달리 ‘루부탱’이라는 단어가 함축했으면 하는 의미가 있나요?
CL 저라는 인물은 어릴 때부터 꿈꾸던 신발 디자인을 계속해왔고, 마침내 꿈을 이뤘어요. 디자이너의 성공 이야기는 그저 동화 속 이야기인 줄 알았죠. 자신의 마음이 원하는 대로 일하는 것만큼 좋은 건 없어요. 24년간 일해온 제가 바로 살아 있는 증거니까요. 규칙을 따르지 않고 자유롭게 일하며 같이 일하는 사람을 존중하는 것. 그게 컴퍼니 루부탱이 전하고 싶은 메시지예요.
VK 그렇다면 크리스찬 루부탱이 생각하는 장인 정신은 뭔가요?
CL 아버지가 목수였어요. 가족적인 배경이 작용해서인지 저는 제품을 볼 때 디테일을 보는 버릇이 생겼죠. 장인 정신은 인간이 하는 노동의 정수예요. 컴퓨터로 신발을 디자인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저는 아직도 드로잉으로 디자인을 시작해요. 수작업이 들어가지 않으면 어떤 것도 흥미롭지 않아요. 모든 게 표준화되기 때문입니다.
VK 루부탱의 아찔한 구두는 극도로 여성성을 내포합니다. 최근 유니섹스나 젠더리스 같은 트렌드에는 별로 개의치 않나요?
CL 저에게 트렌드는 저기서 오는 게 보이고, 또 언젠가 저기로 갈 게 보이는 존재예요. 디자이너로서 중요한 건 자신이 뭘 좋아하는지 알고 자신에게 솔직해지는 겁니다. 저는 트렌드세터도 아니고, 그랬던 적도 없어요. 여자든 남자든 크리스찬 루부탱을 사러 오는 사람들은 트렌드를 찾으러 오는 게 아닌, 루부탱이 주는 이미지를 위해 옵니다. 트렌드는 곧 죽을 운명이기에 제 디자인에 큰 영향을 주지 않아요. 아, 죽는다는 건 너무 심한 표현이니 ‘사라질 운명’쯤이라고 해두죠. 하하.
VK 남자 구두, 가방을 넘어 향수, 매니큐어, 립스틱 등도 론칭했어요. 신발과 다른 장르의 준비 과정은 어땠나요?
CL 물론 어려웠죠. 하지만 흥미로운 지점은 ‘모르는 상태에서 새로운 걸 시작하는 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뷰티라는 영역도 신발과 같은 DNA를 지녔다고 생각해요. 여자가 자신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도구로 삼는다는 점에서 말이죠. 버건디 컬러 아이섀도를 바르든, 투명 메이크업을 하든, 뭘 하든지요. 포장에도 신경을 썼어요. 그전부터 아름다움에 대해 말하면서 외형이 아름답지 않은 제품도 많이 봤거든요. 향수병은 디자이너 토마스 헤더윅과 함께 만들었는데, 유리를 트위스트해 파도의 역동성을 표현했어요. 외면과 내면의 아름다움을 동시에 표현했습니다.
VK 올해 초 서울 청담동에 플래그십 부티크를 열었어요. 한국은 언제쯤 방문할 예정이죠?
CL 가까운 시일에요! 오랫동안 루부탱이 한국 고객에게 사랑받아왔다는 걸 잘 압니다. 게다가 한국 고객은 디테일과 믹스 매치를 좋아하죠. 루부탱의 신발을 단순히 신는 행위를 초월해 오브제로 여기는 점도 인상 깊었어요.
VK 당신은 전 세계에 별장을 여러 채 둘 만큼 여행을 좋아하죠. 최근의 여행은 어땠나요?
CL 지난 8월 브라질 올림픽 기간에 리우데자네이루를 방문했어요. 쿠바 국가 대표팀을 위해 프랑스 스포츠 패션 스토어 스포티앙리닷컴(sportyhenri.com)과 옷과 신발을 제작했거든요. 스포티앙리닷컴의 창립자 앙리 타이와 함께 경기를 관람했어요. 제 눈으로 올림픽 경기를 본 건 살면서 처음이었죠. 열정과 흥분을 동시에 느꼈어요. 어떤 것보다 스포츠야말로 ‘디테일’과 관련이 깊다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10m 다이빙 경기를 보고 있을 때였죠. 2초를 위해 4년 동안 연습한 사람을 보는 건 정말이지 특별한 경험이었어요. 지금 우리가 인터뷰하는 동안 화장실에 손을 씻으러 갔다 오면 2초는 아무것도 아닐 테지만, 다이빙 선수들은 이 시간 동안 그야말로 완벽하고 복잡하며 완성도 높은 일을 하는 거죠. 패션에도 6개월이라는 주기가 있지만 스포츠에서 시간은 정말 다른 개념이었습니다. 또 기능성으로 충만한 선수들의 패션을 보는 것도 흥미로웠어요.
VK 인생에서 단 하루가 남았다면 파리의 어디를 가고 싶나요?
CL 우선 좋은 레스토랑을 가거나 멋있는 장소에 가진 않을 것 같아요. 제가 평소에도 잘 하지 않는 일이니까요. 아마 매일 하는 파리 산책 정도? 그 시작은 저의 첫 매장이 있는 갤러리 베로 도다부터 시작하는 게 좋겠군요!
- 에디터
- 남현지
- 포토그래퍼
- CHRISTOPHE ROU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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