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

소설가의 새해 계획

2017.01.11

소설가의 새해 계획

믿기지 않는 일들의 연속으로 2016년을 마무리했다. 내년이라고 뭐가 다를까 싶다가도, 어떤 해를 맞이할지 생각하는 자체에 의미가 있지 않을까. 그리하여 사람과 세상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이 숙명인 소설가 3인에게 새해 계획을 들었다.

지갑과 노트, 그린 파우치는 에르메스(Hermès). 만년필, 잉크, 폴 스미스 펜과 케이스는 까렌다쉬(Caran d’Ache). 달력은 길종상가(Kiljong Arcade). 투명 볼, 삼각뿔 거울, 미니 거울, 도형 모양의 주얼리 트레이 3종은 쿨 이너프 스튜디오(Cool Enough Studio). 염소뿔과 공룡 장식품, 모래시계, 캔들은 까사 알렉시스(Casa Alexis). 컵과 스탠드는 마켓엠(Market M), 파일 꽂이와 삼각자는 에잇컬러스(8colors). 미니 달력은 렌토(Lento). 휴지 케이스와 사각 트레이, 파일 케이스는 피브레노(Fibreno).

지갑과 노트, 그린 파우치는 에르메스(Hermès). 만년필, 잉크, 폴 스미스 펜과 케이스는 까렌다쉬(Caran d’Ache). 달력은 길종상가(Kiljong Arcade). 투명 볼, 삼각뿔 거울, 미니 거울, 도형 모양의 주얼리 트레이 3종은 쿨 이너프 스튜디오(Cool Enough Studio). 염소뿔과 공룡 장식품, 모래시계, 캔들은 까사 알렉시스(Casa Alexis). 컵과 스탠드는 마켓엠(Market M), 파일 꽂이와 삼각자는 에잇컬러스(8colors). 미니 달력은 렌토(Lento). 휴지 케이스와 사각 트레이, 파일 케이스는 피브레노(Fibreno).

지금 좋은 것이 새해에도 쭉

어릴 때 새해 소망이나 계획에 대한 질문을 받으면 긴장되고 마음이 설릐다. 새해란 뭔가 대단한 것 같았다. 연말이 되면 어른들은 새해가 오기 전에 무슨 일이 있어도 그건 싹 정리해야 한다는 둥, 새해가 오면 만사 제쳐두고 그것부터 딱 시작해야 한다는 둥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른들은 어디 새로운 시간으로 이사라도 가는 듯, 혹시라도 자신들의 부주의나 게으름으로 뭔가 중요한 걸 올해에 두고 가거나 쓸데없는 걸 새해에 가져가게 될까 봐 노심초사하는 듯 보였다. 연말의 잔뜩 들뜬 분위기 속에는 뭔가 입술을 깨무는 비장함과 결연함도 섞여 있었다.

그러나 막상 새해가 밝아오면 달라지는 게 없었다. 졸린 눈을 비비고 억지로 일어나는 것도, 오들오들 떨며 옷을 갈아입고 이부자리를 개고 세수하는 것도 똑같았다. 아침으로 떡국을 먹는 것과 어른들께 세배하는 것만 달랐다. 새해가 이게 뭐야? 점점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오늘 다음에 내일이 오듯 올해 마지막 날 다음이 새해 첫날인 것뿐인데 어른들은 마치 두 해 사이에 칼 같은 경계선이라도 그어진 듯이 호들갑을 떨었다. 우리 부모님도 마찬가지여서 나는 어릴 때 한 해의 마지막 날에는 언제나 추위와 먼지구덩이 속에서 대청소를 한 기억밖에 없다. 생각해보면 한 해의 마지막 날도 새해의 첫날만큼 중요한 날인데 언제나 그렇게 정신없이 후딱 지나가버리곤 했다.

쉰이 넘은 지금도 나는 모든 날은 평등하다는 신념으로 살고 있다. 그래서 새해가 된다고 해서 별스러운 계획을 세울 생각은 없다. 세워봤자 소용없다는 것도 알고 있다. 새해가 뭐? 2016년에서 2017년으로 바뀐다는 것, 그래서 신년 수첩과 가계부를 준비해두어야 한다는 것, 올해 달력을 떼고 새 달력을 걸어놓아야 한다는 것, 누가 나이를 물으면 한 살을 더해서 대답해야 한다는 것. 그 이상은 잘 모르겠다. 흐르는 시간에 어느 정도 구획을 짓는 일이 필요하고, 또 그 구획에 맞게 계획을 세우는 일도 필요하겠지만, 그게 꼭 새해여야 한다는 법은 없다. 누군가 새해에 뭐할 거냐고 물으면 나는 그냥 ‘쭉’ 살던 대로 살 거라고 대답할 것이다. 혹시 오해할까 봐 그러는데, 나는 만사에 시들하고 시큰둥한 중년이 아니다. 나는 호기심도 많고 감각도 섬세하고 아직도 꿈이 많은 중년이다. 그리고 ‘쭉’이라는 대답이야말로 가장 거창한 새해 계획이라고 생각한다.

유대교에서는 미래를 말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다는 글을 읽은 적 있다. 유대교에 대해 잘 모르니 그게 사실인지, 그 깊은 뜻이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하여튼 나는 “미래를 말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다”는 문장을 읽고 이거 참 괜찮구나 생각했다. 나는 미래에 관해 적게 말하면 말할수록 현재에 더 집중하게 되고, 그러면 우리 삶이 더 명확하고 투명해진다고 생각한다. 그동안 우리는 미래에 대해 너무 많이 말하면서 살아왔다. 현재의 삶을 너무 많이 미래에 저당 잡힌 채 살아왔다. 그래서 현재라는 건 미래로 건너가기 위한 징검다리로 여겨졌고, 그 미래가 현재가 되면 그건 다시 더 새로운 미래로 건너가기 위한 징검다리가 되었고, 이런 식으로 급하게 시간의 레일을 돌리다 보니 우리가 존재하고 있는 현재 시간은 낡은 것이나 곧 버려질 것으로 생각되었고, 우리의 관심사에서 점점 멀어졌고 희미해졌고 마침내는 사라지기까지 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내가 몸담고 있는 현재가 사라진다는 것, 그 생생한 감각의 현재성이 하찮게 취급된다는 건 참 슬픈 일이다.

어젯밤 나는 오늘 아침에 먹을 국을 끓이기 위해 콩나물 한 봉지를 다듬고 있었다. 옆에서 남편은 내 휴대폰과 자기 휴대폰 두 대를 놓고 자칭 ‘폰테크’라 부르는 일을 하고 있었다. 그 어렵고 복잡한 작업에 대해서 나는 자세히 알지 못하는데, 거칠게 설명하자면 폰에 어떤 앱을 깔고 하루에 한 번 그 앱에서 행운의 로또를 클릭하는 일 비슷한 것이다. 로또의 액수는 10원, 50원, 100원으로 정해져 있는데, 남편은 그런 앱을 내 폰과 자기 폰에 두세 개씩 깔아놓고 매일 밤 마음을 졸이며 클릭을 했다. 앱의 개수는 매번 바뀐다. 어젯밤엔 앱이 내 폰에 두 개, 그의 폰에 세 개 깔려 있었는데, 내 폰은 운이 나빠 10원, 50원이 나왔고, 그의 폰은 50원, 100원, 100원이 나왔다. 합이 310원. 우리는 늘 그 귀여운 액수에 웃는다. 좋다.

내 새해 소망은 이런 삶이 올해에도 쭉 지속되는 것이다. 한밤중에 출출할 때 떡라면 1인분을 끓여 나눠 먹고, 내가 글을 쓰러 도서관에 가면 그는 청소를 하고, 일주일에 두 번 장을 보고, 일주일에 세 번 조금 특별한 안주를 만들어 술을 마시고, 한 달에 한 번 단골 횟집에서 회와 해산물을 먹고, 두어 달에 한 번 단골 정육점에서 한우 안창살을 사다 구워 먹는 일. 아! 그런 일이 올해에도 이어지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올해에도 그런 일상의 작은 사치를 누릴 수 있기를, 더 욕심내지 않기를, 조금 포기해야 할 것이 생기면 기꺼이 포기하기를, 하루하루 살아 있음에 기쁨을 느끼고 한 끼 한 끼 행복을 맛보기를 바란다. 지금 좋은 것이 올해에도 좋은 것이다. 물론 올해가 지난해와 절대 같지 않기를 바라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만일 당신이 그렇다면, 그건 당신이 지난해 너무도 극심한 고통과 슬픔을 겪었기 때문일 것이다. 진심으로 위로를 보낸다. 그게 아니라면 지난해가 당신에게 선사한 작은 기쁨과 행복을 당신이 자주 놓쳤기 때문일 수도 있다. 어쨌든 그 이유가 지난해에 당신이 올해를 위해 멋지고 치밀한 계획을 세우지 않아서는 아닐 것이다. 삶 속에는 기쁨과 행복도 있지만 슬픔과 고통도 있고, 이별과 가난, 질병과 죽음은 필연적이다. 아무도 나쁜 것을 계획하지는 않으니, 계획하지 않았는데 오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미리 근심할 필요도 없다. 그때 가서 부딪쳐 겪어내는 수밖에. 그래서 나는 계획을 세우는 대신 지금 좋은 것만 생각하고 그것에 오롯이 집중하려고 한다. 나는 미래에 대해 적게 말하면 말할수록, 적게 근심하면 근심할수록, 현재가 더 파릇파릇하게 살아난다고, 더 풍요롭게 피어난다고 믿는 현재주의자이다. 아니, 그렇게 되려고 한다.

나는 지금 동네 카페 2층에 앉아 아메리카노 커피를 마시며 책을 읽고 있다. 이 커피는 남편이 ‘폰테크’로 눈물겹게 모은 포인트 머니로 산 것이다. 문득 주위를 돌아보니 지금 내가 살아 있어서 누릴 수 있는 좋은 것들 투성이다. 진한 커피 맛, 방금 책에서 읽은 건조한 문장의 여운, 음악의 리듬, 창밖엔 곧 눈이라도 내릴 듯 흐린 날씨, 소곤거리는 대화 소리, 저녁에 만들어 먹을 매운 꼬막조림에 대한 생각, 이 모든 것이 내 새해 소망이자 신년 계획의 내용이다. 살아온 대로 쭉 살고 싶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실로 거창한 소망 아닐까. 점점 나빠져만 가는 세상에서.

글 | 권여선(소설가, 소설 〈안녕 주정뱅이〉, 〈토우의 집〉 등)

기초적 존엄의 세계로

따뜻하고 조금은 쑥스럽게 원고 청탁에 응하고 전화를 끊자마자, 실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2017년의 전망이라니, 계획이라니, 태도라니. 혼돈의 아수라장 한가운데 놓인 우리에게, 나에게 그런 여유가 존재할 리가. 그보다도 실은 나부터가 이미 수차례 잡지와의 인터뷰 및 기고-무엇보다 지속적으로 소설-를 통해 말해오지 않았던가. 우리는 이제 틀렸고 이 세상은 수습 가능한 사태의 차원을 한참 전에 지나쳤으며, 살아 있는 사람에게 남은 의무라곤 다만 파국과 종말을 응시하는 일이라고. 그러니 지금 와서 한 해의 풍요를 기원하는 몸짓이나 어떤 건설적인 기대조차 일종의 기만일지 모른다는 죄의식이 솟았다.

그런 개인 사정은 접어두고 돌이켜보니, 살아온 패턴이 대체로 그랬던 듯싶다. 당장 올지 안 올지 장담할 수 없는 내년이나 심지어 내일보다 오늘이, 그보다는 지금 이 순간이 가장 중요했다. 그것은 오늘을 충실하게 살(아서 내일을 도모하)자는 낙관적 현실주의로서의 의미가 아니라, 구체적으로는 생존에 필수적이지 않다고 여겨지는 개인의 취향이나 개성을 지우는 한편, 새로운 관심사를 찾으려 애쓰지 않는 행위에 가까웠으므로, 사실 지나고 나면 오늘이나 내일 그 어느 쪽에도 그다지 도움 되지 않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를테면 적빈의 시절, 월급이 4개월 남짓 체불되면서 그동안 모은 푼돈을 까먹고 있었을 때. 나는 지금의 허기를 해결해줄 끼니를 사고 수도 요금이나 전기료 같은 사회 법률적 구속을 이행할 돈을 봉투에 배분해두었다. 그 대신 미용실에 가서 머리를 매만지지도, 마음에 드는 옷을 구입하지도 않았다. 1,000원짜리 아이들 장난감 같은 화장 도구로 간신히 눈썹과 입술을 그리고 다녔다. 머리는 자라는 대로 내버려두고, 보풀이 일어난 칙칙한 색깔의 단벌옷을 입었다. 어딘가에서 얻은 녹슬고 찌그러진 양은 냄비와 코팅이 벗겨져 일어난 프라이팬을 그대로 사용하고, 거기서 조리된 내용물을 꽃 그림이 그려진 그릇에 옮겨 담아 먹는 일 또한 없었다. 영화를 보러 가지도 않았으며 어딘가로 훌쩍 떠나 경험과 견문을 충족하는 여행이란 두말하면 잔소리였다. 말하자면 최소한의 장식이나 생활의 작은 탈출구 같은 것들을 꼭 막아두고 거친 식사를 때운 뒤 어디 가서 누구에게 보이기 힘든 꼴을 하고 다니면서 그게 최선의 선택이라 여겼으며, 사실 지난 시절에 어른들이(학교나 가정은 물론 이른바 성공했다는 기업인들의 자서전이 요즘도 많이 있는데) 주입한 가르침이 그런 내용이었다. 배고파야 일하고 고생해야 성공하고 오늘의 눈물 젖은 빵이 내일의 양식, 운운하며 구두닦이, 신문 배달, 우유 배달하면서 공부해야 인간이 되는 법인데 요즘 애들은 나약하고 배불러서 뭘 몰라, 식의 서사들. 그런 삶의 방침에 공감했다기보다는, 어차피 나는 소설을 쓸 거니까 그 밖의 상태는 뭐가 됐든 그 무렵의 내겐 상관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지내는 동안 친구가 이사 축하 선물로 준 조그만 허브 화분은 반지하 방에서 빛을 받지 못하고 죽어갔다. 친구에게 미안하다는 생각과, 한편으론 이곳은 빛이 들지 않고 물이 새며 곰팡이가 핀 반지하 방이니까 별수 없는 일이라는 체념도 들었다. 일단 내 몸부터 볼품없는 데다 건강이 망가져가던 참이라, 벽지와 장판만 바른 삭막한 반지하 방과 외적으로 애당초 어울리지 않았던 화분에 눈 돌릴 겨를은 더욱이 없었을 것이다.

그로부터 오랜 세월이 흐르고 나서야, 실은 불과 몇 해 전쯤 이르러서야 비로소 알았다. 사람은 그렇게 살면 안 되는 거라고, 사람이 살아간다는 건 그런 게 아니라고. 최소한의 외적 가시적 존엄을 간과하고 한참을 별다른 불편 없이 지냈는데, 이제 젊음과 활력이 몸에서 살비듬처럼 떨어져 나가는 시기에 접어들고 보니, 그 시절에만 누릴 수 있는 존엄의 범위와 성격은 따로 있었음을 뒤늦게 알게 된 것이다. 이미 없이 지나가버린 존엄은 훗날 그 어떤 호화롭고 비싼 물질로도 그 빈자리를 대체하지 못한다는 것을, 바로 지금이기에 지켜내야 할 존엄이 있으며 그것은 결코 분수 넘는 사치가 아닌 최소한의 생존 조건임을, 이를 모르고 쓰는 소설은 더 이상 사람에 대한 것일 수 없다는 사실을. 내가 중요하다 여긴 오늘 바로 지금은 반쪽짜리 오늘이었음을, 그러고서야 내일이나 내년의 다이어리에 아무리 빼곡하게 계획과 실천 목록을 적은들 소용없다는 것을. 이는 눈앞의 그 어느 쪽도 함부로 포기하지 않으며 진정한 의미에서 오늘을 충실하게 살아가려는 많은 사람들-어제의 고통을 이겨내거나 혹은 그것과 여전히 투쟁 중인 이들-을 만나고 그들에게 말을 거는 동안 서서히 알게 된 것이며, 지난 한 해는 어디에 암약하고 있었는지 몰랐던 그 모습이 그 어느 때보다 많이, 사회라는 무너진 댐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들은 현실 조건에의 굴복이나 체념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살아남기를 선택한 사람들이었고, 그것은 멀고 지루하며 오래도록 길을 돌아가야 하지만 자신의 자존과 아름다움을 지켜내는 방법이었기에 빛났다. 하여 2017년은 무엇보다 일상에서 한 조각 존엄의 가치를 찾아보는 데 전념하고 싶다. 생존은 중요한 것이며 존엄이 그 생존에 양분을 준다는 것을 잊지 않고 말이다. 생존이라 하면 보통 생물학적 극한 상황에서 재 묻은 얼굴과 냄새 나는 몸으로 시신들 사이를 한없이 낮은 포복으로 기어가며 누군가의 가방에서 훔친 에너지바를 씹고 빗물을 받아 마시는 모습이 떠오르지만, 오늘날 우리가 지향해야 할 생존은 더 이상 그런 것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우아하거나 아름답지는 않더라도, 이전투구를 최소화하고 서로의 유일무이함을 인정하며 고귀한 존재로서의 자신을 각성하는 방식으로는, 정녕 생존이 어려운 걸까. 그렇지 않았으면 좋겠다. 비록 온 세상이 반지하여서 햇빛이 잘 들지 않더라도, 반지하의 절반은 (원칙상) 지상에 적을 두고 있음을 잊지 않겠다. 그날의 반지하 방처럼 눈앞의 세상에 물이 새고 썩은 물이 고이고 곰팡이가 피었더라도, 허브 한 포기의 존엄을 잊지 않고 더 이상 말려 죽이지 않도록.

글 | 구병모(소설가, 소설 〈한 스푼의 시간〉, 〈빨간구두당〉 등)

매일 하는 것의 가치

지금은 새벽 2시 17분. 낮에 쓴 졸고 때문에, 내내 찌뿌둥한 마음으로 있다가 결국 잠을 포기하고 부엌 테이블 앞에 다시 앉았다. 아내도 잠들고, 아기도 자고 있기에 행여나 타이핑 소리에 깰까 봐 조심스레 손가락을 움직이고 있다. 말하자면, 글쓰기에 굉장히 좋지 않는 환경에 처한 것이다. 게다가 나는 ‘아침형 작가’다. 밤이면 머리가 무거워지고, 쓰고픈 마음도 사라진다. 따라서 대부분의 글은 아침에 쓴다. 자, 그럼, 무엇 때문에 마음이 불편한 채 새벽에 글을 쓰게 됐는가. 그건 바로 작가의 속성 때문이다.

작가라는 족속은 희한하다. 돈이 없으면 살 수 없으면서도, 돈에 별 관심이 없다. 언제 원고료가 입금되는지, 언제 대출 이자가 나가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바지에 주름이 잡혔는지, 머리카락이 헝클어졌는지도 관심의 대상이 아니다. 부끄러워서 ‘작가들’이라며 객관화하긴 했지만, 사실 내 이야기다. 그렇다면 작가가 관심 가지는 것은 무엇인가. 이들이 원하는 것은 하나. 좋은 글을 쓰는 것이다. 자신의 마음에 흡족한 글을 쓰고자, 끊임없이 손가락을 움직이고, 모니터를 노려보고, 어디 고칠 구석이 없는지 재차 훑어보는 족속이 바로 작가다. 따라서 나는 지금 낮에 쓴 글이 마음에 들지 않아, 결국 새벽에 잠 못 들고 이렇게 다시 쓰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도대체 무슨 소재였기에, 이렇게 밤잠까지 이루지 못하는가. 작가의 입장에선 별것 아닌, 고작 2017년 새해 계획이다. 아니, ‘간단한 소재라면서 어째서 그리 고민하느냐?’고 한다면, 사실 내 새해 계획이 ‘글을 잘 쓰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앞으로는 글을 잘 써보겠습니다!’라고 선언한 글이 볼품없다면 얼마나 설득력이 떨어질 것인가. 그 결심까지 초라해 보일 것이다. 하여, 나는 두려움을 솔직히 고백하고, 작가로서의 문학적 욕심을 일절 부리지 않고 담담히 쓰기로 했다.

새해 태국 북부의 산간 마을 ‘빠이(Pai)’에 갈 것이다. 비행기 표도 사두었고, 숙소도 예약해뒀다. 빠이에 처박혀 오로지 소설을 생각하고, 소설을 쓸 작정이다. 두 달 남짓 머물며, 오전에 해가 뜨면 나도 눈을 뜨고, 세상이 하루를 시작하면 나도 집필을 시작할 것이다. 정해놓은 작업 장소로 매일 출근해 4시간이 됐든, 몇 시간이 됐든, 원고와 씨름할 것이다. 작가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시간은 글을 쓰는 시간이다. 하지만, 가장 즐거운 시간 역시 글을 쓰는 시간이다. 작가에게 창작은 섹스와 같은 것이며, 도박과 같은 것이다. 많은 유희를 얻을 수 있지만, 실패하기 쉬우며,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지만, 많은 것을 잃을 수 있다. 그렇기에 글을 쓰는 것은 즐겁지만 고통스럽다. 하지만, 이 고통이 수반된 기쁨을 겪어본 자는 안다. 도박에 중독된 자들이 결국은 그 맛을 잊지 못해 고통스러워하는 것처럼, 어렴풋이 떠오른 아이디어가 절묘한 플롯으로 맞아떨어지고, 설정해놓은 디테일이 날실과 씨실처럼 오차 없이 맞아떨어지면, 작가는 신의 감정을 조금이나마 맛본다. 물론, 그 맛을 보는 순간은 무수한 실패와 고통의 시간을 보낸 뒤 도래한다. 하지만, 그 희열을 맛본 작가라면 언제나 유황처럼 뜨겁고, 사막처럼 고독이 아득하게 기다리는 고통의 여정에 다시 오른다. 하여, 나는 작가라면 너무나 당연하기에 말하기에도 민망한 계획을 실천하려 태국으로 떠난다. 매일 아침마다 문장과 싸움하는 시간을 보낼 것이다. 봄이 되어 귀국하더라도 어딘가로 다시 떠날 것이다. 현재 생각하고 있는 곳은 지방인데, 그곳에서 삭거의 시간에 몸을 계속 맡긴 채 원고와 씨름할 것이다.

좀더 솔직히 고백하자면, 사실 내가 원하는 것은 단순하다.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고 싶은 것도, 나 스스로 뛰어넘기도 어려울 빛나는 걸작을 쓰고 싶은 것도 아니다. 내가 진짜로 바라는 것은 오직 ‘쓰는 시간, 바로 그 자체’다. 그리고 시간을 기쁨으로 알고, 언제까지나 꾸준히 쓰는 작가로 살아가는 것이다. 작가는 과거의 빛났던 재능에 기대어 평생 이름을 팔아먹고 사는 영업자가 아니다. 작가는 언젠가는 걸작을 쓸 거라고 떠벌리고 다니는 수다쟁이가 아니다. 작가는 바로, 지치지 않고, 끊임없이, 오로지 글 쓰는 그 시간 자체를 보상으로 여기고 ‘써내는 사람’이다. 자, 이제 입을 닫고 묵묵히 쓸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매일 하는 것을 지겨워하지 않는 것, 그리고 그 일의 가치를 아는 것, 작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이것이다. 어쩌면, 다른 이에게도 그럴지 모르겠다.

글 | 최민석(소설가, 소설 〈미시시피 모기떼의 역습〉 등)
    에디터
    김나랑
    포토그래퍼
    LEE HYUN SE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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