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hn Berger
그리운 존을 만나는 법
이제 생을 떠난 존 버거. 나는 몇 시간째 컴퓨터 앞에 앉아 있지만 글을 쓰지 못하고 있다. 그 이유를 안다. 우선 그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다. 둘째, 나는 만나보지도 못한 그를 깊이 사랑했고 그의 사랑도 받고 싶어 했다. 그와 한 번만이라도 좋으니 만나고 싶었다. 그는 내 인생의 롤모델이었고 부모였고 친구였고 스승이었다. ‘내가 이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을 그가 알면 얼마나 좋을까? 혹시 나를 좋아할까? 싫어하면 난 너무 슬플 거야.’ 그래서, 이제 나는 단지 ‘그’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우리에 대해서 하고 싶은 말이 많다. 그는 나에게 ‘그’가 아니라 ‘그와 나’ 우리다. 우리는 만나기만 했다면 많은 것을 함께 이야기 나눠볼 수 있었을 것이다. 푸른빛이 도는 도시에서 새나 바다를 보면서 맥주도 한잔했을 것이다. ‘우리’ 이제 들판을 뒤덮은 야생화에 대해서 이야기해요. ‘우리’ 이제 여행에 대해서 이야기해요. 우리 이제 ‘행복’에 대해서 이야기해요. 우리 이제 송아지에 대해서 이야기해요. 사진 이야기는 어때요? 희망에 대해서는요? 죽은 사람들에 대해서도 이야기해볼까요? 죽은 사람들과도 친구가 될 수 있나요? 모터사이클을 탈 때 장갑을 끼는 이유와 드로잉을 하는 이유에 대해서도 이야기 더 나누고 싶어요.
존 버거는 늘 뭔가를 ‘나누고’ 싶은 사람이었다. 그에게 ‘나눔’, 우리가 무언가를 나눠 갖는다는 것, 그것은 현실 감각을 나누어 갖는 것이었다.
그는 모든 것에 대해서 함께 이야기해보고 싶은 사람이었다. 그가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는 뜻이 아니다. 반대로 그는 앎에 아주 조심스러웠다. 이를테면 그가 친구인 리카르도의 어머니에 대해서 쓴 글을 보자. 나는 그녀에 대해서 두 가지밖에 모른다. 첫째는 그녀가 리카르도의 어머니라는 것, 둘째는 ‘1년 반 전에 리카르도의 어머니는 혼자 한 가지 결단을 내린다. 재스민 나무 묘목을 한 그루 샀다. 자신이 태어난 길 끝 집으로 가서 남으로 난 문 옆 양지바른 땅에 나무를 심은 후 바람 불고 비 올 때를 대비해 막대기를 세우고 라피아 야자 노끈으로 묶었다. 재스민은 잘 자랐다. 50cm가 되었다. 이것이 내가 확실히 아는 두 번째 사실이다’.
존 버거는 상상으로 덧붙이는 사람이 아니었다. 단순하고 정확했다. 그리고 우리가 그토록 무시하는 그것, 바로 ‘사소함’ ‘사소한 차이’를 중시했다.
여기, 우리가 만나는 곳> 리스본 편에서 그는 10여 년 전에 죽은 어머니를 리스본에서 만난다. 글에서 존 버거는 어머니에게 “어머니, 진짜로 여기 계시는 건 아니죠?”라고 묻는다.
“너는 어쩌면 그렇게 멍청할 수가 있니? 우리-우리 말이야- 우리는 모두 여기 있는 거야. 너나 살아 있는 사람이 여기 있는 것처럼. 너희와 우리, 우리는 망가진 것을 조금이라도 고치기 위해 여기 있는 거란다. 우리가 생겨난 이유는 바로 그거야. 이룰 가능성이 있는 것만을 희망하자꾸나. 조금이라도 고쳐보자. 조금도 많아. 하나를 고치면 다른 수천 가지를 변화시키지. 저기 저 개는 줄이 너무 밭아. 그걸 바꿔봐. 길게 늘여보라고. 그러면 개는 그늘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고 그러면 드러누워서 짖기를 멈추겠지. 그렇게 조용해지면 저 집의 어머니는 부엌에 카나리아 새장을 걸어놓고 싶었다는 게 기억날 거야. 카나리아가 노래를 불러주면 그녀는 다림질을 더 많이 할 수 있을 테고 새로 다린 셔츠를 입고 출근을 하는 아버지는 어깨가 조금 덜 쑤시겠지. 퇴근해서 집에 돌아오면 10대인 딸과 가끔씩 농담을 할 거야. 딸은 큰맘 먹고 이번 한 번만 남자 친구를 저녁 식사 때 집에 데려가려고 결심할 테고… 누가 알겠니? 줄을 길게 늘어뜨려보는 거야.”
그는 과정을 중시했다. 이 말이 진부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까? 그걸 누가 모르는 줄 아나 봐? 하지만 우리는 뜻밖에도 잘 모를 수 있다. 과정은 그저 미래의 무언가에 이르기 위한, 어떤 목표를 향한 기나긴 노정. 혹은 인과론의 사슬이거나 우연의 개입, 더도 덜도 아닌. 하지만 존 버거는 미래를 위한 희생을 믿지 않았고 각자 현재를 구원하길 바랐다. 과정은 무엇인가요? 그에게 묻는다면 그는 과정이란 현재의 ‘사소한’ 구원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가 깊이 고민한 질문은 ‘사소한’이란 형용사를 가지고 어떻게 살 것인가?였다. 더 나은 나, 더 나은 미래를 위해서 한 번이라도 진지하게 고민해본 사람이라면 이 ‘사소한’이란 형용사에서 자신의 경험을 숱하게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사소한’이란 단어를 무심코 ‘시시한’으로 혼동하지만 사소한은 시시한 것이 아니라 거창하게 과장하지도 포장하지도, 결과에 대한 엄청난 기대와 환상을 품지도 않는다는 뜻에 더 가깝다. 나는 존 버거가 ‘사소한’이란 형용사를 안고 어떻게 살 것인가 그 문제를 스스로 풀어나갔다고 느낀다. 이를테면 성적 경험을 떠올려보자. 손을 잡고 얼굴을 쓰다듬고 옷을 하나씩 벗고 입술을 포개고 이런 과정을 하나씩 떼어놓으면 몹시 평범하고 진부한 것이 되고 안타깝게도 강렬함은 차갑게 식어버린다. 성적 경험을 아름답고 신비롭고 강렬하게 하는 것은 상대방의 땀구멍까지 강력하게 느끼는 전체 과정의 ‘연결’ 속에 있다. 그에게 현재를 사소하게 구원하는 방법은 연결이었다.
바로 그 연결 능력에서 존 버거만큼 뛰어난 사람이 금세기에 또 있을까 싶다. 그의 모든 글은 그가 삶에서 경험한 것, 읽은 것, 보고 느낀 것, 순간과 절대적인 깨달음, 현재에 충실함과 현재를 뛰어넘음의 생생한 연결이다. 그는 가장 아름다운 것과 가장 마음을 사로잡은 것, 가장 눈을 뗄 수 없는 것을 연결시킬 줄 알았다. 그래서 그의 모든 글은 가장 분노하고 가장 슬퍼하고 가장 예리하고 날카로운 정치적인 글에서조차 사랑의 느낌, 부드러운 애무의 느낌이 난다. 마른 꽃 한 다발과 찬물로 하는 아침의 세수, 오래된 길을 걷는 소박한 행복을 아는 사람이, 매일매일은 똑같은 날이지만 또 다른 날이란 것을 정확하게 아는 사람이, 사람의 곤경만큼이나 사람을 위로하는 수천 가지 방법의 다양성을 아는 사람이 정직하고 주의 깊게 쓴 글이라는 것을 우리는 금방 느낄 수 있다.
그와는 모든 것을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이제 그럴 수는 없다. 그러나 그럴 수 있다. 그가 책을 남겼기 때문이다. 이토록 불만과 불행으로 가득한 시대에 존 버거 같은 사람이 태어나고 자라 글을 썼고 그것을 우리가 읽을 수 있다는 것은 우리 삶이 얻을 수 있는 커다란 행복이다. (존 버거는 행복은 깜짝 놀라는 것이라고 했다. 나도 그의 책을 읽을 때마다 깜짝 놀라고 행복하다고 느낀다. 이런 글을 못 읽고 죽었으면 원통해서 어쩔 뻔했니! 안도감이 든다.) 태어날 때부터 자신이 죽을 것을 알았던 사람처럼 그는 지상의 모두를 위해서, 거의 아무도, 어떤 생명도 빼놓지 않고 관찰하고 글을 썼다. 가난한 사람, 산 위의 양치기, 친구의 어머니, 새해 첫날에 죽은 송아지, 시인, 사진작가, 무명의 화가, 한 번도 빛을 보지 못한 사람들, 아깝게 죽은 사람들, 체온과 친밀감을 나누길 갈망하는 사람들, 존재 이유를 찾아 헤매는 사람들, 분노하거나 좌절하는 사람들. 우리 모두를 위해서 쓴 거나 다름없는 문장을 나는 그의 책에서 쉽게 알아볼 수 있다.
‘거기 좀 앉아요. 가서 뭘 좀 가져올게요.’
우리는 목이 마른 날 일단 그에게로 가면 된다. 그럼 그는 물과 갓 구운 비스킷을 가져오고 그다음에 뒤적뒤적 기억의 앨범과 책장을 뒤져서, 가장 좋은 이야기를 가져올 것이다. “무엇이 당신을 힘들게 하나요?”
자기 연민과 나약함과 쓸데없는 말로 치장하는 것을 싫어하는 그는 그 무엇으로 환원되지 않는 한 사람 한 사람의 본질을 진심으로 사랑했다. 한 사람의 껍데기가 아니라.
글 | 정혜윤(CBS 라디오 PD, <사생활의 천재들><삶을 바꾸는 책 읽기><여행, 혹은 여행처럼><침대와 책> 저자)
존 버거의 책을 만든다는 것
2016년 12월 30일. “최근 아버지의 건강이 좋지 않아요. 지금은 퇴원했지만 아주 불안정한 상태예요. 그의 기나긴 인생의 마지막에 다다르고 있어요. 아버지에게 남겨진 시간 동안 가능한 한 많은 기쁨을 나누고 함께 즐겨야겠지요. 우리가 진행하는 전시와 책 작업이 그를 향한 우리들 사랑의 한 방식이라고 생각해요.” 올 3월에 열기로 한 존 버거의 드로잉전을 위해 그의 아들이자 화가인 이브 버거와 메일을 주고받던 중이었다. 3년 전 그의 아내 베벌리의 부고도 급작스럽게 날아왔던 터라 불안했다. 하지만 지난가을, 기운이 없을 뿐 아픈 것은 아니라고 했고 그간 워낙 건강한 모습을 보여왔기에, 곧 회복하리라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1월 3일 아침, 이브에게서 온 메일을 클릭했다. “오늘 아침 아버지가 평온하게 떠나셨어요. 그의 시간은 거기까지였어요. 사라진 것보다 그가 남긴 것이 훨씬 클 거예요. 함께 연대하며.” 그의 죽음을 알리는 외신 뉴스가 빠르게 올라오고 있었다. 그날 오후, 공식적인 부고 메일이 도착했다. 아들이 그린 아버지의 마지막 초상화와 함께. “그는 눈을 감았습니다, 다시 한 번 적절한 단어를 찾아야 할 것처럼.”
지난 몇 주 동안 그의 부고 및 특집 기사를 쓰기 위해 신문사, 잡지사에서 전화와 자료 요청이 끊이지 않았고, SNS에는 독자들이 올린 추모 글과 사진이 가득했다. 한 작가의 죽음이 그의 책을 만들어온 나에게는 이렇게 실감되는구나. 묘한 기분이었다. 존 버거를 좋아하는 독자층은 분명 존재하지만, 그가 대중적인 작가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90년대에 굵직한 문학 출판사에서 나온 그의 대표작들이 이내 절판된 경우가 많았던 이유다. 그랬기에 작가의 죽음 뒤 접한 이러한 반응이 처음엔 좀 생소했다. 나도 깨닫지 못하는 사이, 그는 ‘드러나기보다는 은근하게’ ‘서로의 지평이 뒤섞이듯’ 사람들 마음 깊숙이 스며들어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2008년 3월이니 벌써 9년 전이다, 여든한 살의 존 버거를 만났던 때가. 그때 쓴 글과 사진이 자세한 기록을 담고 있지만, 세월이 흐를수록 그날의 풍성했던 저녁 식사는 나에게 하나의 이미지처럼 남아 있다. 그를 만나러 가는 택시에서 내다본 파리 교외의 한적한 초저녁 풍경, 문밖으로 나와 반갑게 맞이하는 그의 큰 웃음과 투박한 손, 오렌지빛 조명이 비추는 거실, 소파 위의 고양이, 사진과 그림으로 빼곡한 벽과 책장, 벽난로 앞 나지막한 의자, 러시아식 전채 요리, 생선찜, 치즈와 케이크로 가득한 식탁, 부엌 찬장 아래 초록색 드로잉, 끊임없이 채워지는 와인 잔, 그리고 담배 연기… 너무 많이 마신 포도주 탓일지도, 세월 탓일지도 모르겠다.
통역을 도와줄 파리에 사는 선생님과 동행해도 되겠느냐고 했을 때 그는 말했다. “통역이오? 우리에게 무슨 통역이 필요한가요?” 물론 함께 많은 대화를 나누었지만, 그의 반문처럼 그날의 초대는 말 이상의 것이었다. 헤어지면서 그는 우리를 모두 안아주었다. 서양식 인사로서의 가벼운 포옹이 아닌, 아주 길고 힘 있는 포옹. 그 순간 전해진 그의 진심은 지금까지도 생생하게 남아 있다.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그날의 기억을 짧은 글로 기록했고, 이 에세이가 실린 출판사 소식지 <책과 선택>과 몇 장의 사진을 메일로 보냈다. 존 버거는 답례로 나의 초상을 그려 보내주었다. 지금 돌아보니, 이 모든 것은 그때의 나에게 너무 과분한 선물이었다.
2004년이니 벌써 13년 전이다, 함께 만든 첫 번째 책이 나온 때가. <그리고 사진처럼 덧없는 우리들의 얼굴, 내 가슴> 첫 페이지에 만년필로 눌러 적은 존 버거의 문장을 손끝으로 만져본다. “이 책은 나의 것인 만큼 당신의 것이기도 합니다.” 그 후로 열네 권을 더 만들었고, 오늘도 나는 그의 것인 만큼 나의 것이기도 한, 그리고 그 책을 읽게 될 모든 이의 것이기도 한, 존 버거의 책을 만들고 있다. 아버지의 죽음을 알리며 이브가 보낸 연대의 메시지처럼, 지금 여기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글 | 이수정(열화당 기획실장)
- 에디터
- 윤혜정
- 포토그래퍼
- JEAN MOHR, 열화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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