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and Time
자전적인 이야기로 영화 같은 음악을 들려주는 자이언티. 자신의 아이덴티티가 된 아버지의 동그란 안경을 앨범 제목에 새긴 〈OO〉으로 돌아온 그가 써 내려간 건 평범한 한 남자의 특별한 인생이다.
자이언티의 노래는 반전 없는 영화 같다. 어느 잊힌 골목의 작고 허름한 극장에서 혼자 보는 영화. 한낮의 극장 안은 무덤만큼 조용하고, 눅눅한 팝콘 냄새가 밴 낡은 의자에선 가끔 삐거덕 소리가 난다. 스크린에서는 누군가의 이야기가 흘러나온다. 잘생긴 배우도, 자극적인 장면도, 숨 막히는 스릴도 없다. 그저 누군가의 평범한 하루, 한순간을 시시콜콜 늘어놓을 뿐이다. 시시한 일상이 모여 특별하게 완결되는 우리의 인생처럼 말이다. 지난 2월 1일 자정 공개된 자이언티의 새 앨범 <OO>은 영화 <시네마 천국>을 연상시키는 영사기 필름 소리로 시작된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물론 자이언티다.
“어릴 때 살던 동네가 여기랑 비슷했어요. 고모네 집도 바로 이 근처고요.” 이제 막 잠에서 깬 듯 머리에 까치집을 짓고 나타난 그가 말했다. 과거와 현재가 미로처럼 얽힌 익선동의 오래된 가게들 중엔 그의 고모가 20년 넘게 운영하고 있는 칼국숫집도 있다. “음악을 시작한 열아홉 살 때, 첫 키보드를 산 곳도 낙원상가예요. 근데 여기도 많이 변했네요.” 옛날식 빨간 벽돌집과 근사한 카페가 이웃한 좁은 골목길은 맛집 탐방에 나선 젊은 블로거들로 북적거렸다. 한껏 차려입은 관광객들 틈에 낀 터줏대감 어르신들은 스마트폰으로 연신 사진을 찍어대는 그들을 가끔 쳐다보며 길가의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소주잔을 기울였다. 서로 다른 두 세대가 뒤섞인다. 자이언티는 모처럼 밖에서 만난 아버지와 이 기묘한 길을 나란히 걸었다.
자이언티에게 아버지와 함께 하는 촬영을 제안한 건 그의 노래 때문이다. 일기 쓰듯 자신의 이야기를 노랫말로 옮기는 그에게 있어 가족은 가장 중요한 음악적 화두이자 삶의 중심이다. 그의 음악 활동의 전환점이 된 곡, ‘양화대교’엔 택시 기사였던 아버지가 등장하기도 한다. “처음에 그 노래 듣고 진짜 감동했죠. 회사 차고지가 강남이라 그런지 퇴근길에 해솔이랑 통화를 하면 우연찮게도 성수대교 아니면 양화대교였어요. 옛날 생각 하니까 눈물도 좀 나고. 그런 게 있었죠.” 같은 추억을 공유하는 아버지와 아들은 닮은 듯도 하고 다른 듯도 하다. 눈이 작고 피부가 하얀 자이언티와 달리 김기창은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목소리나 걸음걸이도 시원시원하다. 또 날씬한 체형과 전체적인 분위기는 비슷하다.
하지만 누가 뭐래도 아들은 아버지를 닮는 법. 노래 솜씨는 아버지의 유전자다. “저도 노래하는 걸 좋아했거든요. 노래방 안 간 지가 10여년이라 지금은 자신 없지만 제가 군대 훈련소에 있을 땐 가수였습니다. 하하.” 자이언티의 아버지가 말했다. 아들을 위해 잠시 출연한 ‘무한도전 가요제’에서 피처링까지 소화하며 화제를 불러일으킨 그는 사진가의 카메라 앞에서도 어색함이 없었다. 스웨그가 넘친다고나 할까. 아버지는 이제 아들을 닮아간다. 힙합 뮤지션을 자식으로 둔 부모답게 즐겨 듣는 노래도 힙합, 패션 스타일도 힙합이다. 캐주얼한 패딩 조끼에 스냅백을 쓰고 온 그는 자이언티의 노래는 물론 아들이 속한 비비드 크루 멤버들의 신곡도 매번 꼭 찾아 듣는다고 했다.
늘 그래왔듯 자이언티는 이번에도 앨범 공개를 앞두고 부모님에게 먼저 노래를 들려드렸다. 아버지의 평은 정확하다. “해솔이 엄마랑 새벽 2시까지 전 트랙을 몇 번씩 들었어요. 내 아들이라서 하는 얘기가 아니라 참 좋더군요. 곡마다 색깔이 뚜렷하고 전보다 완성도도 더 높아진 것 같고. 그중에서도 ‘영화관’이랑 ‘바람’이 참 마음에 와 닿아요.” <OO>의 반응은 뜨거웠다. 특히 “유명해지지 않았으면 해”라던 그 노래 ‘노래’는 음원 발매와 동시에 라디오 채널을 틀기만 하면 나오는 유명한 노래가 됐다.
<OO>은 정규 2집, 미니 혹은 EP 앨범 같은 타이틀이 없다. 그냥 ‘새 앨범’이다. “사이즈가 좀 애매해진 부분이 있죠.” 이번 앨범은 7곡의 신곡과 인스트루멘털로 구성되어 있다. “원래는 다른 곡도 많았어요. 그런데 작업 막바지가 되면서 앨범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분명해지니까 다른 것이 끼어들 자리가 없었어요. 그냥 은근슬쩍 저 혼자 정규 2집이라고 생각하려고요.“ 단순히 곡 수의 많고 적음을 떠나 이번 앨범은 첫 번째 트랙 ‘O’로 시작되는 1집 앨범 <Red Light>와 하나의 시리즈처럼 연결된다. 1집 재킷 일러스트에서 영상 카메라를 들고 서 있던 그는 이번 앨범 재킷 사진에선 안경만 쓰고 있다. 카메라라는 필터가 사라진 셈이다. 전보다 시야가 확장된 느낌이다. 수록곡 역시 좀더 일상과 맞닿아 있다. 멜로디는 한결 편안해졌고 노랫말은 보편적인 감성을 담고 있다. 탁자 위에 잔을 내려놓고 물 따르는 소리, 통화 중의 신호음, 아침 새소리, 서툰 휘파람, 영사기 필름 소리 등 우리 주변의 소리가 음악과 섞이기도 한다.
“사실 OO은 어디 갖다 붙여도 의미가 통하거든요. 안경뿐 아니라 저기 탁자 옆의 전기 콘센트, 자동차 바퀴가 되기도 하고, 여자 가슴이 될 수도 있고요. 어디에나 있죠. 나한테도 있고, 너한테도 있는 그런 거. 한동안은 이번 앨범을 놓고 제 음악을 얘기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2013년 1집 이후 자이언티를 둘러싼 상황은 180도로 달라졌다. ‘양화대교’는 자이언티를 대표하는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비슷한 상품을 원하는 시장의 요구가 생겼다. 덩달아 그에 대한 대중의 기대도 커졌다. “그러니까 거기서부터 어려워지는 것 같아요. 내가 진짜 하고 싶은 걸 마음껏 보여주고 싶은데, 사람들이 원하는 부분도 무시할 수 없으니까.” 그가 찾은 방법은 더 솔직해지는 것이다. 공감은 두 번째 문제다. “저 자신에게 좀더 집중하고, 솔직한 이야기로 저 스스로 떳떳한 결과물을 만드는 것. 이 떳떳함이 중요한 것 같아요.”
이번 앨범은 그가 YG 산하의 더블랙레이블로 소속사를 옮긴 후 처음 선보이는 작품이기도 하다. “이제 1년 정도 됐죠. 확실히 배우는 게 많아요. 매일 회사원처럼 출퇴근하며 회사가 어떻게 운영되는지 직접 보고 사람들과 계속 일을 꾸미고 있어요. 제가 진짜 좋아하는 프로듀서들이 모두 소속된 회사이기도 하고요. 그런 뛰어난 분들이 내 옆에 있다는 게 너무 행복하죠. ‘바로 건넌방에 그가 있다!’ 이런 느낌이오.” 자이언티에게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는 더블랙레이블의 수장 테디뿐 아니라 전부터 같이 작업해오던 쿠시, 피제이, 서원진도 같은 소속이다.
더블랙레이블의 큰집이라고 할 수 있는 YG엔 지드래곤도 있다. 지드래곤은 이번 앨범에 피처링(‘Complex’)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저도 무슨 생각으로 피처링을 부탁했는지 잘 모르겠어요. 될 거라곤 기대도 안 했거든요. 그런데 흔쾌히 하겠다는 거예요. “For You~!”라고 엄청 달콤하게 말씀해주셔서 그날 잠을 못 잤어요.” 자신의 2집 <쿠데타>에서 ‘너무 좋아’의 피처링을 해준 자이언티에 대한 고마움을 담아 지드래곤은 한껏 정성을 기울였다. 이번 앨범의 피처링 아티스트는 딱 두 명뿐이다. 자이언티는 “제일 멋있는 사람들이랑 같이 있고 싶었다”고 했다. ‘미안해’를 함께 한 빈지노는 자이언티가 가장 좋아하는 래퍼다. “감각적이잖아요. 음악뿐 아니라 음악 외적인 부분에서도 감각이 뛰어나고. 그처럼 다양한 멋을 알고 있다는 걸 그냥 음악으로 느낄 수 있게끔 풀어내고요.”
자이언티가 세상에 나와 맨 처음 만난 제일 멋진 남자는 아버지, 김기창 씨다. 아버지가 갖고 온 옛날 앨범 속엔 젊은 시절의 아버지와 그의 단단한 품에서 잠든 작은 아이가 있다. “얘는 젖먹이일 때 내 배 위에서 잤어요. 애가 순하니까 가만히 자는거야.” 자신의 등 위에서 가물가물 잠이 든 아들의 사진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아버지가 말했다. 아버지의 팔뚝만하던 갓난아이는 개울가에서 아버지와 파리채 낚시를 하는 소년으로, 졸업식 꽃다발을 들고 활짝 웃는 청년으로, 페이지를 한 장씩 넘길 때마다 휙휙 성장했다. 그와 달리 아버지의 모습은 거의 그대로다. 흰머리와 주름살만 늘었다.
부자가 오늘처럼 같이 사진을 찍은건 거의 처음이다. “휴대폰으로도 같이 찍은 적이 없어요. 일단 제가 사진 자체를 잘 안 찍거든요.” 자이언티의 챙 넓은 모자를 쓰고 선글라스를 낀 채 코트 자락을 휘날리는 아버지는 오늘 익선동 최고의 패셔니스타다. “제가 안경을 끼기 시작한 게 아버지의 선글라스였어요. 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랐는데 그걸 쓰고 무대에 오르니 노래하기 편하더라고요. 그때부터 아버지의 안경이 제 아이덴티티가 됐죠.” 아들의 현재는 아버지의 과거와 잠시 오버랩되고 또 다른 방향으로 나아간다. 아버지는 음악이라는 자기만의 방식으로 인생의 트랙을 통과해가는 아들이 대견하고 자랑스러우면서도 늘 안쓰럽다.
한 남자의 일생 중 몇몇 부분을 발췌한 옴니버스 영화와 같은 이번 앨범의 마지막 이야기는 ‘바람’이다. 스트레스가 극에 달했던 2년 전 어느 날 마침 작업실에 있던 기타리스트 서원진과 함께 토해내듯 부른 노래다. 걱정 없이 동네를 뛰놀던 어린 시절을 떠올린 그는 자신을 향한 사람들의 바람과 자신의 바람 사이에서 깊어지는 고민을 한 줄기 노래의 바람에 실어 날려 보낸다. 자이언티의 바람은 소박하다. “건강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정말 잘 살았으면 좋겠어요. 경제적으로 부유하단 뜻이 아니라 행복이오. 사랑하는 부인과 가정이 있고, 그들을 지켜줄 수 있는 힘이 있고, 자기 일에서도 멋있는 사람. 그런 성숙한 남자들이 부러워요. 물론 겉으로 보기에만 그럴 수도 있겠죠. 전 강한 남자이면서도 가정적이고, 건강한 사람이고 싶어요. 그리고 제 자식에겐 우리 아버지 같은 아버지가 되길 바라요.” 그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바람은 ‘해솔’이라는 이름 안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해처럼 밝고, 소나무처럼 굳세고 푸르러라.” 어떤 바람보다 따뜻한 바람이다.
- 컨트리뷰팅 에디터
- 이미혜
- 스타일리스트
- 한종완
- 헤어 스타일리스트
- 태현(미장원by태현)
- 메이크업 아티스트
- 미애(미장원by태현)
- 장소
- 익선동 ‘동남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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