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 트렌드

Recessionista Theory

2017.03.13

by VOGUE

    Recessionista Theory

    2017년 세계 경기는 회복세지만 여전히 불안할 예정이다. 그래서 치마 길이는 짧아질까, 길어질까? 신발 굽은 높아질까, 낮아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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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립스틱 효과를 체감하는 중이다. 작년 말에 부모님 대출로 집을 사면서 월급의 3분의 1을 꼬박꼬박 엄마 은행에 헌납하고 있기 때문이다(사실 갚고 있는 돈이 이자인지 원금인지도 불확실하다). 1년 전 이맘땐 파이널 세일에 들어간 겨울옷을 사느라 온라인 쇼핑몰을 휘젓고 다니며 정신없이 카드를 긁고 있었다. 그렇지만 지금은 올리브영에서 1만2,000원짜리 발뒤꿈치 각질 제거제나 맥의 신제품 스틱형 멀티밤 따위를 기웃거리는 게 전부다. 심지어 4만원대인 멀티밤은 너무 비싸게 느껴진다. 이게 립스틱 효과가 아니라면 뭐란 말인가?

    잘 알다시피 경기 불황일 때 가격 부담은 적으면서 높은 만족을 주는 제품이 잘 팔리는 현상이 립스틱 효과다. 일부에서는 립스틱보다 매니큐어 판매율이 더 정확하다고도 하고, 최근 한 일간지는 립스틱의 대체물로 휴대폰 케이스나 양말을 꼽기도 했다. 비슷하게 1926년에는 치마 길이가 주식시장을 반영한다는 치마 길이 이론이 등장했다. 치마 길이가 길어지면 주가가 하락하고, 치마 길이가 짧아지면 주식시장이 활발해지고 경기가 좋아진다는 주장이다. 당시 경제적으로 여유로운 시기에는 여자들이 값비싼 실크 스타킹을 보여주려고 짧은 치마를 입지만, 경기가 어려워지면 스타킹 살 여유조차 없어서 맨다리를 감추기 위해 긴치마를 입었다는 데서 착안한 이론이다.

    그렇다면 이번 S/S 시즌 들쭉날쭉한 행커치프 헴라인은 대관절 어찌된 일일까? 영국 <보그>의 분석은 다음과 같다. 브렉시트,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 시리아 내전 등 전 세계의 불안정한 움직임을 소름 끼칠 정도로 정확하게 반영한 디자인!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라고 코웃음 칠 수 있지만 지금의 어수선한 세계 경제를 보여주는 또 다른 패션 품목이 있다. 2011년에 IBM의 소비재 전문가 트레버 데이비스(Trevor Davis) 박사는 경제가 어려울수록 여자들의 굽이 높아진다는 하이힐 이론을 발표한 바 있다. 그의 연구에 따르면 1920년대에는 납작하거나 낮은 굽이 유행했지만 1930년 대공황, 1973년 석유파동 때는 높은 하이힐과 플랫폼이 인기였고 2009년 경기 침체가 최고조였을 때는 굽 높이가 최고 18cm까지 치솟았다고 한다. 이번 S/S 시즌에는 그동안 유행한 납작한 신발, 적당한 키튼 힐과 함께 어마어마한 플랫폼, 뾰족한 하이힐이 동시에 등장했다. 바닥에 붙었다가 어느새 공중 부양하는 신상 구두의 굽 높이는 발목과 허벅지를 정신없이 오르내리는 치마 길이만큼 불안정하다. 경기가 좋지 않을 때 굽이 높아진다는 게 조금 이해되지 않는다. 그러나 학자들은 경제 상황이 어려울수록 소비자들이 현실의 도피처로 화려한 패션을 추구하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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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이렇듯 궁핍한 와중에도 적은 예산으로 어떻게 해서든 멋을 부리는 이들에게는 ‘리세셔니스타’라는 맞춤 별명이 주어졌다. 불경기라는 뜻의 리세션과 패셔니스타를 조합한 표현이다. 살뜰하게 돈을 아끼면서도 멋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긍정적 의미로 다가오지만 사실 그게 전부는 아니다. “소비자들의 소비 습관을 정당화시켜주는 겁니다.” 신조어와 속어를 전문으로 다루는 사전 편찬자 그랜트 바렛(Grant Barrett)은 ‘가격이 싸거나 같은 가격에 더 많은 양을 살 수 있다면 사도 괜찮다’는 발상에서 등장한 표현이라고 설명했다. “자기중심적인 메시지인 거죠.”

    일단 그렇다 치고. 리세셔니스타는 어려운 시기에 어떤 소비 경향을 보일까? 여기서 등장하는 또 하나의 흥미로운 경제 현상, 이름하여 ‘슈퍼 사이즈 경제학’. 1960년대 데이비드 월러스틴(David Wallerstein)이라는 인물은 어떻게 하면 영화관에 온 사람들에게 팝콘을 한 봉지 이상 팔 수 있을지 궁리했다. 온갖 방법을 시도했지만 어떤 것도 먹히지 않았는데, 팝콘을 두 봉지나 사면 탐욕스러워 보일 거라는 사람들의 염려 때문이었다. 그래서 월러스틴은 조금 더 비싼 가격의 점보 사이즈를 만들었다. 이 방법은 적중했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레귤러 사이즈 대신 2분의 1 혹은 4분의 1 가격만 추가로 더 내면 되는 점보 사이즈 팝콘을 선택했다. 이 전무후무한 ‘점보 사이즈’ 발명가는 1970년대 맥도날드의 매출이 줄어들었을 때도 똑같은 전략으로 패스트푸드점을 부활시켰다. 당신이 알고 있는 바로 그것, 약간의 추가 비용으로 프렌치프라이와 음료수 사이즈를 업그레이드하는 것 말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크기가 크든 작든 생산 비용은 똑같거나 차이가 있더라도 아주 미미하다는 사실이다. 오버사이즈 유행에 이 이론을 적용해보면 리세셔니스타들은 경기 불황 중에 옷 두 벌을 사는 부담 혹은 비난을 감수하는 대신 오버사이즈 옷 한 벌 사는 쪽을 선택할 거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그리하여 이번 S/S 시즌은 리세셔니스타들을 위한 세상 그 자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큼지막한 어깨선에 넉넉한 실루엣의 오버사이즈 파워 수트, 걸을 때마다 다리에 감길 정도로 펄럭이는 페이퍼백 팬츠 그리고 여행 가방 수준을 넘어서서 땅에 질질 끌릴 듯한 가방! 세계 경기 전망을 참고해 패션 트렌드를 결정하는 은밀한 단체나 거대한 음모가 있는 게 아닐까?

    그러나 이런 이론이 흥미로운 만큼 다수의 경제, 패션 전문가들은 그 신비주의적 상호 관계가 얼마나 허술한지를 밝혀왔다. 역사를 돌이켜보면 치마 길이, 하이힐 이론은 맞는 경우보다 틀린 경우가 더 많았다. 요즘 여자들은 비싼 실크 스타킹 대신 저렴한 나일론 스타킹을 신고, 한 명의 디자이너가 구성한 하나의 컬렉션 안에서도 치마 길이는 마이크로미니부터 맥시까지 정신없이 오르내린다. 경기가 어려워서 열심히 일해야 할 시기라면, 서 있기도 힘든 높은 굽보다는 활동하기 편한 낮은 굽을 선택하는 쪽이 더 논리적이지 않을까? 생활비에 쪼들릴 때는 관리하기 번거롭고 자주 입기 힘든 옷(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보다 당장 갈아입을 실용적인 기본 아이템에 손이 가는 게 당연하다. <텔레그래프>의 패션 디렉터 리사 암스트롱은 2000년대 초반에 리세셔니스타와 정반대 개념인 ‘리세션 시크’라는 표현을 쓴 적 있다. 그녀는 경기가 침체되자 일하는 여자들이 어두운색과 엄격한 실루엣의 테일러드 룩으로 돌아서는 실용적 추세에 리세션 시크라는 이름을 붙였다.

    물론 패션은 사회를 반영하고 경기의 흐름에 영향을 받는다. 그렇지만 패션사의 모든 추이를 주식시장과 경제 상황만으로 진단할 수 있다는 주장은 오만불손하다. 패션과 경제의 상호 관계를 연구해온 전문가들은 패션 트렌드는 경제적 상황의 영향도 받지만 그보다 심리적 영향을 훨씬 더 많이 받는다고 결론 내렸다. “패션은 대응 기제입니다.” <시장 지표의 모든 것>의 저자이자 주식 투자자인 마이클 신시어(Michael Sincere)는 그동안 지표로 삼은 패션의 기준은 사실상 유행에 기반한 것이고, 경제나 주식시장과는 무관하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이렇게 장담했다. “치마 길이나 유행 색을 눈여겨보거나 쇼핑객들을 연구하고, 디자이너 같은 내부 전문가들과 어떻게 돈을 쓰는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쪽이 훨씬 더 유용할 겁니다.”

    그리고 코코 샤넬은 늘 옳다. “패션은 하늘에도 있고, 거리에도 있다. 패션은 생각, 삶의 방식, 일어나는 모든 세상사와 관련돼 있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모두 다른 생각을 하고 각자 다른 삶을 살고 세상에는 늘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난다. 우리의 삶은 한 치 앞을 알 수 없다. 그리고 디자이너들이 다음 시즌에 어떤 옷을 갖고 나올지도 알 수 없다. 그래서 패션계는 늘 흥미진진하다.

      에디터
      송보라
      포토그래퍼
      INDIGIT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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