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w Normal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반영하는 패션. 더 바르고 정직한 패션을 위해 모델의 역할이 더욱 커졌다. 금발에 푸른 눈만이 아름다움을 대변하지 않는 시대가 원하는 새로운 모델에 관한 이야기.
캘빈 클라인과 라프 시몬스의 힘은 대단했다. 지난 2월 10일 시몬스가 선보이는 첫 번째 CK 쇼를 보기 위해서 패션계 유목민들은 폭설을 뚫고 어떻게든 뉴욕으로 날아갔다. 누군가는 눈 쌓인 JFK 공항 위를 1시간 동안 맴돌았다고 불평했고, 누군가는 새벽 6시에 도착해 호텔에 짐만 던져놓고 달려왔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기대만큼이나 쇼는 훌륭했다. 90년대 헬무트 랭을 떠올리게 하는 미니멀리즘과 미국적인 스타일의 만남은 지금 필요한 패션 그 자체였다. 커다란 환호성과 함께 쇼가 끝날 때쯤 옆자리에 앉았던 미국의 에디터가 말했다. “정말 좋죠? 특히 모델 캐스팅이 정말 좋았어요. 지금 미국을 대변할 만하니까요.”
패션은 언제나 당시의 사회를 대변한다. 그 패션 전선의 맨 앞에는 모델이 있다. 모델은 디자이너가 동시대의 여성을 위해 만든 옷을 입고 런웨이에 오른다. 또 모델은 패션지가 이달을 위해 촬영한 이미지 속에서 포즈를 취하고, 올봄을 위한 광고 속에서도 우리를 바라본다. 2009년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뮤지엄에서 <Model As Muse>라는 모델을 주제로 한 대규모 패션 전시를 기획했던 큐레이터 해롤드 코다는 이렇게 말했다. “당시의 패션과 동일시하는 특정한 시기의 특정한 여성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 모델들은 패션을 대표하는 패션 그 자체가 되곤 하죠.” 그렇다면 지금 2017년 패션을 대표하는 모델은 누가 될까?
라프 시몬스의 캐스팅에 대해 덧붙였던 에디터의 한마디는 지금 패션계가 주목하는 ‘다양성(Diversity)’에 대한 코멘트였다. 그녀의 말대로 시몬스의 쇼에는 애리조나를 고향으로 둔 스케이드보더 나탈리 웨슬링, 호주 출신의 의학박사 줄리아 노비스 등 백인 모델은 물론, 에티오피아에서 온 슈퍼모델 리야 케베데, 중국에서 더 큰 인기를 누리는 페이 페이 순, 그리고 아프리카 앙골라의 초원 속 작은 마을에서 막 뉴욕으로 건너온 신인 블레즈니아 미녜르도 함께 무대에 올랐다. 이러한 라인업은 아마도 캐스팅 디렉터인 애슐리 브로카우의 역할이 컸을 것. 색다른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그녀에게 다양성은 단순히 정치적인 이슈가 아니다. 브로카우는 한 인터뷰에서 이러한 캐스팅이 “우연한 일이며 진보적이고 자연적인 선호도”일 뿐이라 말한 바 있다.
하지만 지금 패션계는 의도적이라 할지라도 정치적으로 올바른 다양성을 필요로 한다. 고루한 패션의 법칙을 깨는 신선한 시도가 필요한 때. 미국 <보그>는 3월호 커버에 모델 일곱 명을 내세우며 ‘뷰티 레볼루션’을 선언했다. 주근깨 가득한 반항적인 영국 모델 애드와 아보아, 미국적인 건강함을 대표하는 지지 하디드와 켄달 제너, 그리고 놀라울 정도로 관능적인 모델 이만 하맘 등이 혁명의 주도자. 여기엔 처음으로 미국 <보그> 커버에 등장한 아시아인으로 기록될 중국 모델 리우 웬, 최초의 플러스 사이즈(더 이상 이 단어가 올바르지 않은 것도 2017년의 경향) 모델 애슐리 그레이엄도 포함되어 있다. 비록 몇몇 언론은 이러한 시도를 표면적인 것이라 비난했지만, 적어도 다양한 외모를 지닌 모델들이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패션지의 표지를 장식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대서양 건너 파리 <보그>의 엠마뉴엘 알트는 좀더 파격적인 진보를 꿈꿨다. 3월호 커버 모델로 브라질 출신의 트랜스젠더 모델 발렌티나 삼파이우를 점찍은 것. 편집장의 글 속에서 알트는 삼파이우가 런던 스튜디오에 도착했을 때의 모습이 프랑스 <보그>가 지향하는 아름다움 그대로였다고 밝혔다. “그녀가 지젤, 다리아, 에디 혹은 안나와 다른 건 없었어요. 단 하나 그녀가 소년으로 태어났다는 점을 제외하고 말입니다.” 생로랑의 골드 라메 블라우스를 입고 있는 삼파이우의 모습은 톱 모델과 다를 바 없다. 알트는 이러한 시도가 앞으로 나아가는 발걸음 중 하나일 뿐이라 덧붙였다. “트랜스젠더 여성이 잡지에 등장해도 그것에 대해 따로 기사를 적을 필요가 없을 때, 우리는 전투에서 승리했음을 알 수 있을 겁니다.”
유색인종과 트랜스젠더, 현실적인 몸매의 여성 등은 지금 우리가 패션에 투영하고 싶은 현실의 모습이다. 뉴욕에서부터 시작된 2017년 가을 컬렉션에서 그 변화의 시도가 곳곳에서 눈에 띄었다. 마이클 코어스와 프라발 구룽은 그레이엄을 비롯한 풍성한 몸의 모델을 런웨이에 세웠고, 마크 제이콥스와 프로엔자 스쿨러 무대 위에는 트랜스젠더 모델들이 차례대로 기다란 무대를 거닐었다. 특히 제이콥스의 무대에는 세 명의 트랜스 모델이 등장해 시선을 끌었다. 또 첫 번째 컬렉션을 백인으로만 가득 채워 비난을 받았던 발렌시아가의 뎀나 바잘리아 역시 훨씬 더 다채로운 인종을 포용하는 캐스팅을 선보였다. 인도에서 온 라디카 나이르와 한국에서 온 이지가 함께 무대에 오른 모습은 바잘리아가 그토록 이야기하던 새로운 시대의 패션을 상징하기에 충분했다.
이런 캐스팅은 우리처럼 패션을 긴밀하게 지켜보고 있는 이들에게 놀라운 희망을 준다. 소라와 윤영, 현지와 호연을 비롯한 한국 모델이 패션쇼에 등장하는 순간, 우리 역시 하이패션 세계에 입성한 듯한 착각을 선사한다. 이건 모든 소수자에게 비슷한 기분일 것. 삼파이우가 <보그> 커버에 등장한 걸 바라보는 또 다른 트랜스젠더가 느낄 수 있는 용기, 히잡을 쓴 채 막스마라 무대에 오른 아랍 모델 할리마 아덴을 보는 어린 아랍 소녀의 흥분은 값을 매길 수 없다.
이 과정 속에 소음도 존재한다. 요즘 모든 논란과 마찬가지로 그 시작은 인스타그램이었다. 스텔라 맥카트니, 톰 포드 등을 맡고 있는 캐스팅 디렉터 제임스 스컬리가 지난 2월 말 올린 포스팅이 그 시발점. 그는 발렌시아가의 캐스팅을 맡고 있는 듀오 디렉터 메이다 그레고리 보이나와 라미 페르난데스가 오디션을 위해 찾은 모델들을 무책임하게 대접했다고 고발했다. 패션계는 금세 끓어올랐다. 곧 발렌시아가의 사과와 듀오의 해임으로 이어졌고, 에르메스와 랑방의 캐스팅도 맡고 있는 보이나는 서둘러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 또 한 가지 논란은 그녀가 캐스팅을 맡은 랑방을 비롯한 몇몇 하우스가 ‘유색 인종 모델’들과 엮이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 물론 랑방은 그 루머를 극렬히 부인했다. 하지만 디자이너 부크라 자라가 디자인한 총 마흔네 벌의 옷을 입은 모델 중 흑인 모델은 단 두 명, 아시아 모델 역시 단 두 명뿐이었다.
미국 <보그>의 에디터 사라 무어는 랑방 컬렉션 리뷰 기사에서 이렇게 꼬집었다. “요즘 같은 시대에 패션은 여성을 어떻게 표현할지에 대해 책임이 있습니다.” 즉, 전 세계 여성에게 호소하기 위해서는 어떤 여성들이 이 옷을 보고 있을지를 고려해야 한다는 것. “패션의 무지개와 같은 모든 구성원을 기념하는 건 우리가 꼭 항상 지켜야 하는 정치적인 메시지입니다.” 같은 의미에서 단 세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백인이었던 크리스토퍼 케인, 고작 네 명의 유색 모델만 무대에 오른 메종 마르지엘라도 비난받을 여지가 있다. 무어는 마르지엘라의 백인 잔치에 대해 이렇게 충고했다. “갈리아노(를 비롯한 모든 디자이너)가 고쳐야 할 점이다.”
이 모든 긍정적인 변화에도 불구하고, 패션이 모두를 위한 놀이터가 될 수는 없다. 예를 들어 이번 시즌 돌체앤가바나는 모델 대신 전 세계의 ‘인플루언서’를 초대했다. 미국의 스타일리스트와 러시아의 팝 가수, 두바이의 패션 스타와 중국의 블로거가 모두 무대에 올랐다. 신선한 실험이지만, 그들은 모델이 아니었다. “패션과 아름다움이 민주화된다는 것과 모든 것이 통한다는 것 사이에는 아주 분명한 선이 있습니다. 패션은 조금은 현실과 동떨어져야 하거든요.” 프라다, 루이 비통, 로에베 등 쇼의 캐스팅을 맡고 있는 브로카우의 의견이다. 즉, 제아무리 다양성이 인정된다 하더라도 모델이라는 직업의 조건은 사라질 수 없다는 것. 다만 여기서 그녀가 말하는 비현실적인 아름다움은 90년대 슈퍼모델 시대의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가 아니다. 이 시대의 모델들은 지나치게 아름답지만 우리의 친구가 될 수 있을 법하다(인스타그램을 비롯한 SNS를 통해서라도). 지난 시대의 모델이 무대 위의 인형 같았다면, 지금은 함께 어깨동무를 할 수 있을 것 같은 친근함이 매력. 그 친근함이 더 다양한 ‘오디언스’에게 동질감을 선사한다면, 그건 이제 패션의 새로운 순기능이라 해도 좋다.
최근 패션 속 또 다른 기준이 무너졌다. 지난 1월 ‘인터섹스’로 태어났음을 밝힌 톱 모델 한느 개비 오딜이 그 주인공. “저에 대한 사실을 밝히는 건 매우 중요했어요. 전 인터섹스 사람들이 겪어야만 하는 장애를 없앨 수 있도록 돕고 싶습니다.” 오딜은 자신이 다른 것이 아니라 특별하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그 특별함이 개성일 뿐이라 말했다. 그리고 그 개성 때문에 그녀가 전광판 속에서 환한 미소를 짓는 모습을 보거나, 당당하게 런웨이를 거니는 것만으로도 세상의 편견은 조금씩 없어질 수 있다. “저와 비슷한 고통을 겪었던 이들에게 모두 말하고 싶어요. 어떤 모습이라도 인정받을 수 있어요! ‘일반적인 것’은 더 이상 예전과 같지 않아요!”
- 에디터
- 손기호
- 포토그래퍼
- INDIGIT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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