뷰티 아이템

Space Odyssey

2017.04.12

by VOGUE

    Space Odyssey

    혼잡한 도심 한가운데, 온전한 휴식을 위한 피난처가 나타났다. 파리에 단 4개월 동안만 장막을 친 ‘이솝 205’, 그 공감각적 공간으로의 초대.

    Aesop 205_공통 (2)

    사방을 막아 벽을 세우고 이름을 붙이면 ‘장소’에는 목적이 생긴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기억이 누적되면 그곳은 목적 그 이상의 추억이 된다. 이솝은 이런 ‘공간’의 의미를 가장 잘 이해하고 활용하는 뷰티 브랜드다.

    지난 3월 초 프랑스 파리에 위치한 이솝 페이셜 트리트먼트 룸에 초대받았을 때, 나는 갖가지 취재와 개인적 고민으로 바짝 긴장한 상태였다. 힐링을 위한 노력? 생토노레 205번지로 향하는 우버 안에서 ‘보습 케어를 받을까? 항산화 케어를 고를까?’ 갈등하는 정도. 잠시 몸을 누이고 남의 손을 빌려 육체적 위로를 받을 뿐인데 더 이상 고민할 것도, 기대할 것도 없지 않은가?

    생토노레 매장에는 길이가 다른 3,500개의 원목 판이 기하학적으로 쌓여 있다. 이솝의 파트너 중 하나인 마치 스튜디오의 로드니 이글스톤이 참여한 공간이다.

    생토노레 매장에는 길이가 다른 3,500개의 원목 판이 기하학적으로 쌓여 있다. 이솝의 파트너 중 하나인 마치 스튜디오의 로드니 이글스톤이 참여한 공간이다.

    그렇게 다다른 이솝 205. 무심히 들어섰다가 입구에서 들은 첫마디에 당황했다. “신발을 벗으세요.” 파리에서 굳이 동양식으로 신발을 벗어야 하는 이유를 묻자 “발바닥으로도 따뜻한 웰컴 인사를 느끼라”고 답한다. 서늘한 알루미늄 프레임에서 카펫으로 발을 옮기자, 과연 구름 위를 걷는 듯한 부드러움과 따뜻한 감촉이 “이제부터 좀 쉬세요”라고 말하는 것 같다. 긴장했던 마음이 한순간 무장 해제되며 방 안 구석구석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벽면을 가득 메운 건 재활용 왁스 소재로 만든 120개의 타일. 격자 사이로 은근한 조명이 스며들어 지금이 낮인지 밤인지도 구별할 수 없고 직선으로 연결된 세 개의 방 곳곳에는 전설의 가구 디자이너 피에르 폴랑의 작품이 무심히 놓여 있다. ‘엘리제 테이블’ ‘오사카 소파’같이 사진으로만 봐왔던 전설의 가구에 직접 몸을 맡기자,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던 걱정까지 사그라든다.

    Aesop 205_공통 (1)

    시간까지 멈춘 것 같은 카멜색 공간. 하나의 색으로 수렴되는 인테리어와 소재의 변주, 차분한 조도가 이루어내는 리듬에서 고수의 촉이 드러난다. 이런 멋진 프로젝트의 마에스트로는 대체 누구? 이솝의 인하우스 건축가 장-필립 본푸아(Jean Philippe Bonnefoi)에게 인터뷰를 청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미니멀한 매력의 마레 지구 매장. 427개의 작은 강철 파이프 뚜껑을 뒤집어서 벽에 고정한 뒤 제품을 올려놓았다. 이 강철 뚜껑은 파리 전역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배관 파이프라고.

    미니멀한 매력의 마레 지구 매장. 427개의 작은 강철 파이프 뚜껑을 뒤집어서 벽에 고정한 뒤 제품을 올려놓았다. 이 강철 뚜껑은 파리 전역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배관 파이프라고.

    VOGUE 인하우스에 건축가를 갖춘 브랜드라니. 이솝에 있어 ‘공간’은 특별한 의미인 것 같다.
    BONNEFOI
    굉장히! 내가 이솝을 알게 된 것도 그 때문이었으니까. 다니던 학교 근처에 이솝의 첫 번째 파리 스토어, 생제르맹 데프레 지점이 있었다. 건축 학도가 보기에도 감탄이 절로 나오는 멋진 곳이라 다짜고짜 일자리가 있느냐고 물었고, 아르바이트를 시작하게 됐다. 지금 생각해도 정말 운이 좋았다.

    VOGUE 운이 아니라 인연 아니었을까? 며칠에 걸쳐 생토노레, 생쉴피스, 콩도르세, 티크톤느, 마레 등 파리 대부분의 매장을 돌아봤다. 각 스토어의 컨셉과 생김새가 모두 다르더라.
    BONNEFOI
    이솝 매장은 나무 들보 하나, 소재 하나마다 각각의 존재 이유와 사연이 있다. 혹시 콩도르세 스토어의 1970년대 스타일 바닥을 기억하나?

    VOGUE 오래된 타일이었던 것 같다.
    BONNEFOI
    작업에 착수하러 건물주를 찾아갔더니 85세의 미망인이 우리를 맞아주었다. 건물의 파사드와 바닥을 볼 때마다 남편과 함께한 시간이 떠오른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솝은 그녀의 추억을 그대로 보존하기로 했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는 ‘존중’이니까.이솝 티크톤느 공통 (2)

    VOGUE 마레 매장의 천장 기둥이 수백 년 동안 그 건물을 횡으로 가로지르며 이웃한 모든 숍을 연결하고 있다는 설명도 들었다. 오목한 곳에는 볼록하게 접근하고 볼록한 곳에는 오목하게 합을 맞추는 브랜드구나 싶어 조금 뭉클했다. 하지만 건축가 입장에서는 고민이 많을 거 같다. 각 매장이 달라도 너무 다르지 않나? 제품 패키지만 유일한 공통점인 것 같아 보일 정도다.
    BONNEFOI
    그게 우리가 추구하는 바다. 다른 브랜드는 규격화된 가이드에 공간을 맞추지만 이솝은 매장이 들어서는 지역적 특색을 반영해 각기 다른 건축을 선보이는 브랜드다.

    VOGUE 사실 요즘 매장의 트렌드 자체가 교육, 판매, 감정의 힐링이 동시에 이루어지고, 디지털과 오프라인 구매가 교차하는 ‘옴니’를 지향한다. 건축가로서 이솝의 공간을 이런 다면적 채널로 구현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나?
    BONNEFOI
    옴니? 글쎄, 무엇이 유행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우리가 관심을 갖는 건, ‘이솝 매장이 이웃들에게 좋은 영향을 주고 있는가’이다. 우리 매장이 들어서서 그 거리에 있는 가게와 주민들이 함께 행복해졌는지가 중요하다. 그래서 최대한 지역 문화가 잘 드러나도록 디자인하고 주변 상인들과도 친밀하게 지낸다. 아마 다른 브랜드에는 없는 독특한 문화일 거다.

    이솝 205에 대해 장 필립 본푸아는 이렇게 설명했다. “이곳의 목표는 다양한 질감을 하나의 색감으로 묶어 고객의 오감을 만족시키는 것이다.” 모든 것은 경험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전제로, 디자인과 미학적 요소를 치밀하게 설계한 결과다.

    이솝 205에 대해 장 필립 본푸아는 이렇게 설명했다. “이곳의 목표는 다양한 질감을 하나의 색감으로 묶어 고객의 오감을 만족시키는 것이다.”
    모든 것은 경험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전제로, 디자인과 미학적 요소를 치밀하게 설계한 결과다.

    VOGUE 사실 아까부터 아스티에 드 빌라트의 향이 났다. 묻고 싶었지만 예의가 아닌 것 같아 꾹 참고 있었는데 혹시 그 브랜드와도 친구인가?
    BONNEFOI
    옆집이고 아주 친하다. 이따 함께 쇼핑 갈까?

    VOGUE 착한 건가, 천진난만한 건가?
    BONNEFOI
    이솝의 고객과 친구들이 모두 함께 행복해지길 바랄 뿐이다.

    VOGUE 이제 예민한 질문을 해야겠다. 이솝의 패키지가 모두 비슷하게 생긴 건 그 돈을 아껴 제품 개발에 더 투자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라 들었다. 하지만 공간에는 엄청난 투자를 하고 있지 않나? 매장 자체가 곧 비주얼 마케팅인 셈이니 시각에 따라 이솝의 ‘소박한 진실성’은 오해받기 딱 좋다. 어떻게 생각하나?
    BONNEFOI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다. 이솝이라는 브랜드에 있어 스토어는 남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고, 돈을 많이 쓰는 것도 사실이니까. 하지만 분명한 건 제품에 대한 투자가 가장 우선이라는 거다. 잘 만들어진 제품은 이솝의 심장이다. 좋은 제품을 아름다운 공간에서 직접 만나보도록 하는 감각적인 경험이 바로 브랜드 철학이며, 이솝이 지향하는 ‘휴먼 터치’이다. 대신 이솝은 광고에 돈을 쓰지 않는다.

    과거 장인들과 무역상들의 근거지였던 티크톤느 스토어는 시구 스튜디오와 협업해 만들었다. 소소한 행복이 가득한 서민들의 동네라 ‘못’이라는 평범한 자재로 스타일리시한 선반을 연출했다.

    과거 장인들과 무역상들의 근거지였던 티크톤느 스토어는 시구 스튜디오와 협업해 만들었다. 소소한 행복이 가득한 서민들의 동네라 ‘못’이라는 평범한 자재로 스타일리시한 선반을 연출했다.

    VOGUE 오픈하는 이 트리트먼트 룸에서도 당신이 강조하는 진한 인간미가 느껴진다. 딱 4개월만 오픈하기엔 아까울 정도로 디테일이 좋다.
    BONNEFOI
    원래 ‘이솝 205’는 이솝 프랑스의 사무실이었다. 페이셜 트리트먼트 서비스를 본격적으로 도입하기 전에 팝업 스토어로 꾸민 곳이라 진행 기간이 끝나면 철거해야 한다.

    VOGUE 그러기엔 너무 웰메이드인걸! 폴랑, 폴랑, 폴랑이 큐레이션한 이 전설의 가구를 좀 보라. 콩도르세 매장에서도 폴랑의 소파를 본 것 같은데 혹시 관련이 있나?
    BONNEFOI 사실 그 핑크 의자가 시발점이었다. 폴랑의 아들이 매장에서 우연히 아버지의 의자를 목격하고 나서 협업이 시작됐으니까. 이후 고(故) 피에르 폴랑의 작업실을 복원할 때 이솝 프랑스 팀이 지원을 했고, 이솝 제품의 론칭 행사를 아들인 벤자민 폴랑의 파리 스튜디오에서 진행하면서 점점 더 끈끈한 관계가 됐다.

    18세기 프랑스 개혁가 마르퀴스 드 콩도르세의 이름이 붙은 거리에 자리 잡은 스토어. 기존의 메탈 외관과 회색 타일 바닥을 그대로 사용해 1970년대 느낌을 보존했다.

    18세기 프랑스 개혁가 마르퀴스 드 콩도르세의 이름이 붙은 거리에 자리 잡은 스토어. 기존의 메탈 외관과 회색 타일 바닥을 그대로 사용해 1970년대 느낌을 보존했다.

    VOGUE 이번 공간은 좀더 적극적인 형태의 콜라보레이션이군!
    BONNEFOI 그렇다. 우리는 고객의 경험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브랜드니까 폴랑의 가구도 직접 사용할 수 있도록 공간을 꾸민 거다.

    VOGUE 이솝은 세계 유수의 디자이너 혹은 건축가들과 협업을 하고 있다. 혹시 파트너에게 요구하는 가이드라인이 있나?
    BONNEFOI 단순히 얼마나 일을 잘하는지보다 성격, 커뮤니케이션 능력 그리고 이솝과 얼마나 잘 맞는지를 본다. 경쟁 프레젠테이션을 하거나 가격 흥정을 하는 일은 없다. 요즘 읽고 있는 책이 무엇인지, 주말에는 어떤 취미 활동을 하는지 등 너무나 사소해 보이는 질문을 하기 때문에 건축가들이 당황하고 낯설어한다.

    스튜디오 디모레와의 콜라보레이션으로 탄생한 공간. 부유한 생쉴피스 거리와 톤을 맞춰 청동, 대리석, 벨벳 같은 고급스러운 소재를 사용했다.

    스튜디오 디모레와의 콜라보레이션으로 탄생한 공간. 부유한 생쉴피스 거리와 톤을 맞춰 청동, 대리석, 벨벳 같은 고급스러운 소재를 사용했다.

    VOGUE 알면 알수록 이솝은 그냥 한 명의 사람 같다. 자기만의 고집이 있고 취향을 드러내는 데 주저함이 없으며, 가끔은 충동적으로 비치기까지 하는 행보를 보인다. 브랜드를 경험하는 게 아니라 그냥 굉장히 매력 있는 친구를 사귀고 있는 기분이다.
    BONNEFOI 그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것 하나는 확실하다. ‘진정성’에 있어서 만큼은 양보가 없다는 것. 스토어를 장식하는 꽃을 살 때도 네덜란드산 장미를 사용하지 않는다. 대량 생산된 꽃을 매장에 들이지 않겠다는 거다. 그냥 조금 소박해도 동네 마켓에서 판매하는 내추럴한 꽃을 쓴다.

    VOGUE 진정성이 있다면 완벽하지 않아도 아름다우니까?
    BONNEFOI 정답. 그냥 있는 그대로의 이솝과 우리의 공간, 무드를 즐겨주면 좋겠다.

      에디터
      백지수
      포토그래퍼
      COURTESY PHOT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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