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fining Moment
‘비틀스의 철학자’ 조지 해리슨, ‘기타의 신’ 에릭 클랩튼 그리고 패티 보이드의 삼각관계가 팝 역사에 끼친 영향은 지대하다. 희대의 러브 스토리의 주인공이 천재 뮤지션들의 찬란했던 시기를 사진으로 남기지 않았더라면 미처 몰랐을 비밀의 순간들. 패티 보이드가 서울 사진전에 앞서 〈보그〉에 먼저 독점 공개한다.
열아홉 살에 영국 <보그> 커버 모델이 된 지 수십 년 만에 다시 <보그 코리아>의 카메라 앞에 섰습니다. 그날 대체 무슨 일이 있었죠?
기억나요. 데이비드 베일리라는 사진가가 사진을 찍었어요. 장난기 많고, 잘생겼으며, 섹시했어요. 모든 여자들이 ‘베일리’ 이름을 외칠 정도였다니까요. 런던 하노버 스퀘어의 높은 빌딩에 있었던 <보그> 사무실 안에 에디터들과 카피라이터들이 많았죠. 또 한 번의 커버는 모스크바에서 촬영했어요.
당시 새로운 차원의 매력을 가진 모델로 각광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모르겠어요.(웃음) 당시 나의 영웅은 진 쉬림튼이었어요. <보그>에서 사진을 보고는, 진심으로 그녀처럼 되고 싶었죠. 오늘, 헤어, 메이크업을 하고 근사한 옷까지 입으니 50년 전 모델 시절로 돌아간 것 같아요. 물론 사진을 찍는 입장이었다면 더 좋았을 테지만요.
니트 톱은 에스까다(Escada), 가죽 팬츠는 셀린(Celine), 반지는 티로즈(TRose), 신발은 쥬세페 자노티(Giuseppe Zanotti).
어제 토크 콘서트에 지방에서 올라온 분도, 10대 소년도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나요?
정말요? 놀랍군요! 그들이 나를 어떻게 알죠?(웃음) 사실 그런 자리는 항상 긴장돼요. 저는 현재를 살기 위해 노력하고 있거든요. 과거를 이야기한다는 건 엄청난 에너지를 요하는, 쉽지 않은 일이에요. 나는 과거에만 살고 싶지는 않아요. 어제도 한국의 뮤지션이 피아노 치면서 부르는 ‘Something’과 ‘Layla’를 그냥 즐겼어요.
하지만 여전히 세상은 당신의 과거를 궁금해해요.
그래도 오히려 지금 훨씬 더 편안하게 과거 얘기를 할 수 있어요. 게다가 요즘 더 뚜렷하고 생생하게 기억나니, 신기한 일이죠.
이번 전시의 부제는 ‘팝 역사상 가장 위험한 뮤즈’입니다. 맘에 드나요?
그럼요! 그렇게 불리는 게 영광스러운 일인 것은 분명해요. 하지만 솔직히 제가 왜 위대하다, 위험하다고 불리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전 아무것도 안 했어요.(웃음)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명곡을 탄생하게끔 영감을 주었죠.
알지만, 받아들이기는 어려워요. 사람들이 이 노래를 즐기는 데 그런 스토리가 도움이 된다면 다행이에요.
뮤즈라는 말은 너무 흔해졌지만 모두들 뮤즈가 되고 싶어 해요.
이번 전시를 통해 그런 한국의 관객들과 어떻게 소통하고 싶은가요? 수동적인 뮤즈가 아니라 사진을 찍는, 순간을 잡아내는 사람으로 알아주기를 원해요. 제가 뮤즈를 넘어서서 뮤지션들의 가장 아름답고 찬란한 순간을 찍었다는 것을 보아주길 바랍니다. 말씀대로, 세상엔 수많은 뮤즈들이 있죠. 뮤즈를 그린 화가는 또 얼마나 많았나요. 사실 제가 그들과 무엇이 달랐는지는 모르겠어요. 저는 셀리브리티도 아니고 배우도 아니에요.
이 두 명의 전남편을 옛 남자 그 이상으로 여기고 있는 건 아닐까 생각해봤습니다만.
반대죠.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게 아니라 그저 내가 사랑한 이들의 면면을 사진에 담은 거예요. 이번 전시도 내가 사랑했던 그들의 모습, 사적인 순간을 가감 없이 보여주는 거라고 생각해요. 이들의 음악을 듣는 것도 좋지만, 사진을 통해 느끼는 것도 색다를 거에요.
어떤 기준으로 사진을 골랐나요?
이번 사진전은 노르웨이에서 열린 대규모 전시 때 선보였던 사진에서 출발했어요. 그런데 한국 전시를 준비하면서 그동안 존재조차 잊고 있었던 박스를 찾아냈죠. 그 안에서 폴라로이드 사진이 대거 쏟아졌고, 이번에 한 번도 공개된 적 없는 20여 점의 사진이 한국 관객들을 만나게 되었어요.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적이었던 사진이 있다면요?
조지의 사진 중에서 제가 가장 좋아하는 건 그가 침대에 누운 채 편안하게 포즈를 취한 모습을 찍은 거예요. 당시 히말라야에서 몇 개월 동안 명상을 하면서 몸과 마음이 모두 편안한 상태였지요. 그때의 시간이 너무 좋았던지라 돌아가는 대신 바로 남인도로 가서 지내다 왔어요. 당시는 엡스타인이 사망한 후 비틀스가 ‘애플’이라는 회사를 세워 적극적으로 음악 사업을 해보려던 시기였는데, 조지는 히말라야에서 시간을 보낸 이후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했죠.
조지 해리슨을 블루, 에릭 클랩튼을 레드로 묘사하기도 했는데, 둘이 카메라 앞에서도 많이 달랐나요?
조지는 사진 찍히는 걸 좋아하지 않아 완벽한 순간이 왔을 때 몰래 훔치듯 셔터를 눌렀어요. 에릭은 옷도 잘 입은 데다 포즈도 곧잘 취해주었어요. 하지만 너무 많이 찍어서 그랬는지, 한번은 폴라로이드 카메라를 빼앗아 휴지통에 넣어버리더군요.
에릭 클랩튼은 자신이 찍힌 사진이 전 세계를 돌아다니고 있다는 걸 알고 있나요?
그럼요. 5~6년 전인가, 런던 로열 앨버트 홀에서 열린 콘서트 백스테이지에서 그를 만났어요. 하지만 그는 예나 지금이나 사진에 별 관심이 없어요.(웃음) 지금도 종종 연락하고 지내요. 감히 뭐라고 하지는 않을 거예요. 우리는 여전히 친구예요.
쉽게 이해할 수는 없지만 지향할 만한 관계로군요.
에릭과 결혼한 후, 점심을 먹던 중이었어요. 조지가 갑자기 찾아왔는데, 에릭은 전혀 언짢아하지 않았죠. 오히려 고기 많이 먹지 말라고 서로 트집을 잡는 통에 다들 한바탕 웃었어요. 우리 사이, 괜찮아요.
“우리가 살아 있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다”라고 말씀하신 인터뷰를 봤어요. 60년대는 역사적, 문화적으로 요동치던 시대이고 이렇게 그때를 회상할 수 있다는 것이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행운은 아니죠. 무엇이 가장 기억나나요?
매우 다채로웠어요. 재능 있는 인물들이 많았고, 놀라울 정도로 자유로웠죠. 뭐든 할 수 있었어요. 모든 게 재미있었고, 창의력이 넘쳤으며, 사랑으로 가득 차 있었어요. 우린 서로 비슷한 사상과 성격을 가진 많은 이들을 만났어요. 부모로부터 독립해 간섭도 덜 받았죠. 짧은 치마를 입은 소녀들은 말을 걸 수 없을 정도로 당돌했고요. 우리는 그렇게 어른이 되어갔어요.
당신은 그 시절을 어떻게 즐겼나요?
알다시피 모델로 일했고, 비틀스를 만났으며, 많은 뮤지션들과도 교류했어요. 사진가, 화가, 영화감독들이 주위에 많아 즐거운 시간을 보냈죠. 어느 날 몇몇이 그 시대를 담겠답시고 영화 <Blow-Up>을 만들었는데, 정말 끔찍했어요. 시대의 분위기란 사각형의 스크린 안에 담을 수 없을 만큼 살아 있는 것이니까요.
지금 인터넷에는 두 남자와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가 풍문처럼 많이 떠돌고 있어요. 정정하고 싶은 내용도 있지 않을까 싶더군요. 이를테면 패티 보이드를 차지하기 위해서 조지 해리슨과 에릭 클랩튼이 기타를 경쟁적으로 연주했다 등등.
읽어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어요. 전 구글링도 안 해요. 내 삶을 사는 데도 바쁘거든요.
어떤 일로 특히 바쁜가요?
난 런던과 시골을 오가며 지내고 있어요. 시골에서는 채소와 과실나무를 기르고, 강아지를 키워요. 그냥 아담한 집에서 조용히 요리를 해요. 그러다 런던에 가면 사진을 찍죠. 친구들 만나 극장 가서 영화 보고, 저녁도 먹고…
당신은 훌륭한 셰프인가요?
난 요리를 매우 즐겨요. 사람들이 책을 내야 한다고들 하더군요.(웃음) 그래서 시도해볼까 하고 있어요. 조만간 한국 재료도 써봐야겠어요. 매운 것도 좋아하는 데다 잘 먹거든요.
처음 모델 활동을 할 때부터 사진을 찍었다고 들었어요. 어떻게 처음 카메라를 접하게 되었나요?
자연스럽게요. 사진작가인 남자 친구도 있었고, 항상 친구들이 사진에 대해 이야기하곤 했어요. 내가 카메라 살 돈이 없다고 하니 도와주더군요.
조지 해리슨과 에릭 클랩튼이 담기지 않은 사진을 찍은 건 언제부터였나요?
에릭과 이혼한 후, 너무 우울한 나머지 남은 인생을 어떻게 해야 할지 도무지 모르겠더군요. 무언가를 한다는 것 자체를 생각할 수가 없었어요. 이러다가는 미쳐버릴 것 같았어요. 그러다 우연히 내가 사진 찍는 걸 좋아했다는 걸 새삼 떠올렸죠. 그래서 다시 사진을 찍게 된 거예요. 모델과 다른 사람들 모습을요. 몇 개월 동안 사진 찍는 기술을 공부하기도 했고, 암실에서 며칠 동안 안 나오기도 하면서요.
비로소 본인 인생의 주체가 되었을 때, 어떻게 중심을 잡았나요?
에릭을 여전히 사랑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어요. 하지만 그는 마약에 빠져 있었어요. 함께하길 원했지만 그 사람이 너무 망가져 있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게 없었어요. 그래서 결국은 헤어졌죠. 굉장히 외로운 시간이었지만 그 시간을 견디며 많은 걸 배웠어요. 10여 년 동안 에릭과 함께 있을 때 주로 뮤지션 친구들과만 어울리곤 했는데, 혼자가 된 후 다양한 사람을 만나며 오히려 사회 활동의 범위도 넓어졌고요. 여전히 퀸의 로저 테일러 같은 뮤지션 친구들이 있었지만요. 어쨌든 어느 순간부터 이혼으로 내 삶이 끝나버린 게 아니라 새롭게 시작할 뿐 아니라 더 확장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어요.
혼자가 되면서 가장 먼저 배워야 했던 건 뭔가요?
알고 보니 그 누구도 제 전화요금, 전기세, 수도세 같은 공과금을 내주지 않더군요. 이런 돈을 지불하는 방법부터 배워야 했어요. 항상 해오던 게 아니어서 번번이 잊어버리곤 했죠. 가혹한 현실이었어요. 어떻게든 기억할 수밖에 없었어요. 이날은 자동차 세금 내는 날, 이날은 주유하는 날.
그렇게 두문불출하다가 세상에 나가야겠다 결심한 계기가 있었나요?
난 내 삶이 공개되는 걸 원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사진가로서 활동을 시작할 때에야 적극적으로 대중에게 다가갔어요. 첫 번째 전시가 1995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렸는데, 사람들이 유명인의 아내가 아닌 나 자체를 좋아한다는 걸 깨닫고 나의 이야기를 담은 책을 쓰기로 결심했어요. 그들이 나의 사진을 마음에 들어 할 때, 정말 행복했어요. 유명하지 않은 사람들을 기쁘게 해줄 수 있다는 점에 새삼 감사했죠.
에릭 클랩튼은 블루스로 상처를 치유했다고 했는데, 당신에게는 바로 사진이 그런 존재였겠군요.
모든 상황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준 게 사진이니, 나를 구원한 셈이에요. 사진을 찍는다는 건 매우 흥미로운 일이에요. 어떤 것에 집중할 수 있게 해주고 내가 이 세상에 줄 수 있는 무언가를 발견하게 해줘요.
최근에 찍은 사진은 어떤 건가요?
히말라야 부탄에서 찍은 수도승의 사진이에요. 그가 잔잔하게 걸어가고 있었는데, 어디선가 부는 바람에 그의 옷자락이 팔랑거려요. 매우 고요하면서도 자연스러워, 가장 맘에 드는 사진으로 꼽곤 해요.
어떤 사진이 좋은 사진이라고 생각하나요?
빛과 디자인이 돋보이는 사진이죠. 자연광이든 플래시든 빛은 사진을 살아 있게 하고, 풍경 사진도 실제 모양이 아닌 고유의 구도를 갖고 있어요. 같은 꽃이라도 줄기를 찍을 수도, 꽃봉오리만 찍을 수도 있어요. 그런 점에서 사진가들은 모두 디자이너이기도 해요.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사진가는 누군가요?
남아프리카 출신인 세바스치앙 살가두를 좋아해요.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도 그만이죠. 모두 여전히 대단한, 클래식한 사진가들이에요.
세상을 바꾸는 일에도 어느 정도 참여했다고 들었어요.
내 여동생은 결국 알코올과 마약 때문에 세상을 떠났어요. 그들은 도움이 필요해요. 60년대에는 마리화나를 피우는게 재미있었어요. 하지만 지금 마약은 매우 심각하게 모든 사람과 국가를 망치죠. 그래서 예전에 링고 스타의 아내인 바바라 바흐 등 친구들과 함께 알코올과 마약 중독자들의 치료를 돕는 단체 ‘SHARP’를 설립했어요. 후에 정부가 관여하면서 자연스럽게 빠지게 되었지만, 지금도 관심 있어요. GMO도 반대해요. 이를테면 미국의 대기업인 몬산토(Monsanto)는 정말 나쁜 기업이에요. 가난한 농부들로부터 땅을 갈취해 유전자 변형 옥수수를 재배하죠. 삶과 땅의 생명력 모두를 망치는 일이에요.
사르트르는 인생이란 “B(Birth)와 D(Death) 사이의 C(Choice)다”라고 했어요. 어떤 정의를 내릴 건가요?
저에게 인생이란… 우리에게 주어진 것을 하나하나 발견해가는 과정이라 생각해요. 이미 주변에 있지만 자각하지 못한 아름다운 풍경이나 사랑하는 사람들을 조금씩 발견하고 깨닫는 거랄까요. 제가 혼자가 된 후에 그랬듯이 말이죠. 눈만 뜨면 보이는데도,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 주어진 것을 즐기지 못해요.
나이 드는 것은 어떤가요?
지혜로워지고 여유로워지는 건 좋지만 몸이 늙어가는 건 아무래도 슬프네요. 마음은 아직 괜찮아요.
요즘 읽고 있는 책이 있다면 소개해줄 수 있나요?
<Catherine the Great>라는 러시아의 오래된 역사책이에요.
올해 또 어떤 일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나요?
가을에 스웨덴에서 사진전이 있을 예정이고요. 그전에 남프랑스와 뉴욕으로 여행을 가려고 해요. 환상적일 거라 기대하지만, 이번 봄의 서울 여행만 할까 모르겠군요.(웃음)
- 에디터
- 윤혜정
- 포토그래퍼
- HONG JANG HYUN, ⓒ PATTIE BOY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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