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이가 싫어서
오이를 싫어한다는 이유로 인격과 인성을 무시하는 세상, 정말 실망입니다. 무엇을 싫어하든 말든, 그게 유전적 결과든 개인적 취향이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세상이 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점심시간에 방문한 식당. 신선한 오이와 당근을 막대형으로 썰어 쌈장과 함께 내는 서비스 메뉴가 식탁에 오른다. 점심 멤버들이 기다렸다는 듯 오이를 집어가는 가운데, 나는 친절한 누군가가 덥석 오이를 권할까 봐 불안한 표정으로 앉아 있다. “제가 오이를 못 먹어서요”라는 말과 호의를 거절할 때 돌아오는 반응이 예측 가능하다. “아니, 편식하는 다섯 살 어린아이도 아니고 왜 채소를 안 먹어요?”
그렇다. 오이를 거부하는 순간, 세상은 당신을 음식 투정이나 하는 어린이로 취급해버린다. 오이 혐오는 어른의 세계에서는 용납될 수 없는 취향이다. 거기에다 오이가 채소 대표라도 되는 듯 건강에 대한 잔소리까지 더해진다. 당근을 먹어야 눈이 좋아지고, 오이를 먹어야 피부가 깨끗해지고 등 어린 시절부터 들었던 진부한 조언이 식사 시간을 장악한다. 김밥을 누군가와 함께 먹을 때면 더 심각한 상황이 펼쳐진다. 잘 말아놓은 김밥 사이에서 오이와 당근을 빼내는 모습을 보는 어른들은 백이면 백, 혀를 찬다. 음식의 외관을 중요시하는 나도 김밥의 모양을 흐트러뜨리고 싶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먹을 수 없는 걸 덜어내야만 한다. 왜 싫어하는 것을 거부하겠다는데 세상 사람들의 눈치를 봐야 하는 걸까? 왜 한국에선 <섹스 앤 더 시티>의 캐리처럼 무엇과 무엇을 넣지 말아달라는 식의 주문을 하기 어려운 걸까? 돌솥비빔밥에서 당근을 빼달라는 주문을 해본 적이 있는가? 주문 받는 직원에게 최대한 미안해하며 주문해야 한다. 어째서 싫어하는 음식을 안 먹는 게 이렇게 힘들단 말인가!
누구도 오랫동안 내가 겪어온 오이와 당근 거부 투쟁(?)을 이해해줄 것 같지 않았다. 페이스북에 ‘오이를 싫어하는 사람들의 모임(이하 ‘오싫모’)’이 등장하기 전까진 말이다. 지난 3월 ‘오싫모’ 페이지를 론칭하자마자 1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기꺼이 ‘좋아요’를 누르며 팔로어가 되었다. 기록적인 팔로어 증가 속도 때문에 기사화되면서 더욱더 유명해지는 추세다. ‘오싫모’ 페이지에 합세한 ‘오이 혐오자들(해시태그는 Cucumber Haters)’은 수십 년의 한을 푸는 듯 성토대회를 이어간다. 짜장면과 냉면을 먹을 때마다 고명으로 얹은 오이 때문에 괴로워하고 오이에 대한 상처가 깊어서 오이 사진을 볼 때조차 힘겨워하는 이들이 서로를 위로한다. 이곳에선 오이가 등장하는 사진에 모자이크를 해야 하는 오‘ 자이크’가 예의다. 오이를 싫어한다는 이유로 고통을 받았던 사람들이 모여 ‘혼자가 아니다’를 확인하고 서로의 존재를 격려한다. 오‘ 싫모’의 선언에 따르면, 이들은 오이가 들어가지 않은 냉면, 샌드위치, 김밥, 학교 급식을 요구하며 더 나아가 오이를 싫어하는 사람도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세상’을 꿈꾼다. 이들을 ‘미성숙하다’고 폄하하는 시선을 거부하면서 다양성이 공존하는 사회에 대한 논의로 발전시킨다. 이에 고무된 사람들이 하나둘 ‘당근을 싫어하는 모임’ ‘가지를 싫어하는 모임’ ‘버섯을 싫어하는 모임’ ‘술을 싫어하는 모임’ 페이지를 개설했고 수만 번의 좋‘ 아요’를 얻고 있다. 무언가를 싫어하는 모임이 인기를 얻는 걸 목격하면서 음식 하나조차 ‘싫어한다’고 말하는 게 얼마나 힘든 사회였나 깨닫는다. 오이를 싫어한다는 이유로 나의 인격과 인성이 무시되지 않는 세상, 그렇게 이뤄지기 힘든 바람일까?
오이 혐오자는 한국에만 존재하는 게 아니다. 그러나 미국에선 양상이 조금 다르다. 영어로 ‘나는 오이가 싫어요(I hate cucumber)’와 ‘오이를 싫어하는 사람들(Cucumber haters)’을 검색하면 몇 개의 페이지가 뜨지만 회원 수는 몇백 명이 전부다. 오히려 배우 베네딕트 컴버배치의 외모가 오이 닮았다고 놀리는 ‘나는 큐컴버배치가 싫어요(I hate cuCumberbatch)’ 클럽이 더 인기가 많아 보인다. 저조한 참여도는 싫어하는 사람 수가 적어서가 아니라 특별히 지지를 보내야 할 만큼 한 많은 사안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미 정신분석학, 생물학, 유전과학 등 여러 분야의 연구자들이 오이에 대한 다수의 혐오가 ‘편식’이 아닌 과학적 사안이라는 걸 입증했다. 유전적으로 더 많은 쓴맛 수용체를 혀에 가지고 태어나거나 예민한 후각을 가진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비해 오이의 맛과 향에 민감하게 반응한다고 한다. 이런 슈퍼테이스터(Supertaster)에게 오이는 쓰고 역겨운 채소일 뿐이다. 이 연구 결과에 수긍한 사람들은 누군가 ‘오이가 싫어요’라고 말하면 개인적 알레르기의 차원으로 이해한다. 주변 미국인들만 보더라도 각자 다른 음식 알레르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특정 음식에 대한 불편을 표현할 때 타박하고 훈계하는 문화가 훨씬 덜하다.
재미있는 차이는 미국에선 오이보다 브로콜리와 브뤼셀 스프라우트(방울 양배추)를 둘러싼 비호감이 더 거세다는 점이다. 디즈니 애니메이션 <인사이드 아웃>의 주인공 소녀가 괜히 브로콜리를 싫어했던 게 아니다. 시금치만큼 아이들에게 비호감 채소인 브로콜리에도 유전적 변명의 여지는 있다. 특정 유전자를 타고난 사람들은 브로콜리, 컬리플라워, 브뤼셀 스프라우트, 케일을 먹을 때 쓴맛을 더 강하게 느낀다는 연구 결과가 존재한다. 또 다른 연구에선 고수에서 비누 냄새를 맡는 사람들이 존재하며, 어떤 이는 블랙커피를 역겨워한다고 밝힌다. 특정 음식을 ‘싫어요’라고 말하기 이전에 그 취향이 이미 선천적이라고 말하는 셈이니 인생의 오랜 비밀이 풀리는 것 같기도 하다. 앞으로 오이를 거부하는 나를 두고 어린애 취급을 할 때마다 “저는 유전적으로 초민감한 미각과 후각을 타고났기에 당신이 느끼지 못하는 맛과 향을 느낄 수 있답니다”라며 나의 신비로운 미각 초능력을 이해시켜야만 할까?
혹자는 영양 균형을 위해 대안적인 레시피를 권한다. 그리스식 오이 샐러드에 신선한 레몬과 라임을 듬뿍 뿌리고 딜(Dill)을 더하면 오이 향이 누그러지기 때문에 조금 더 편하게 먹을 수 있을 것이다. 당근에 꿀을 바르고 오븐에 구워내면 고구마로 변신한 당근을 맛볼 수 있다. 가지에 올리브유와 토마토 페이스트, 파르메산 치즈를 더해서 굽는 ‘에그플랜트 파르메산’은 가지 혐오자까지 사로잡을 수 있는 음식일지 모른다.
그러나 ‘오이를 싫어하는 사람들의 모임’의 요구는 싫어하는 음식을 먹도록 도와달라는 게 아니다. 오이를 싫어하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을 불편해하지 말 것. 당근을 싫어한다고 무시하지 말 것. 가지를 싫어한다고 사람을 이상하게 쳐다보지 말 것. 술을 싫어한다고 왕따 시키지 말 것. 그러니까 제발 무엇을 싫어하든 말든, 그게 유전적 결과든 개인적 취향이든,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달라는 것이 ‘오싫모’의 제안이다. 어차피 인간은 오이와 당근과 가지와 버섯과 술을 먹지 않아도 살 수 있는 존재가 아닌가. 이 모든 차이를 각자의 개성으로 인정한다면 나와 다른 타인을 이해하기 위해 심리학과 유전과학 논문까지 들춰가며 시간을 소모할 이유가 없다. 세상에는 짜장면에 오이를 얹는 사람과 빼는 사람이 있다. 더 나아가 오이 대신 완두콩, 고수, 파르메산 치즈, 베이컨, 옥수수, 김치 등 원하는 걸 토핑해서 먹을 수 있지 않을까? 맛이야 어떻든 단일한 짜장면보다 다양한 짜장면이 존재하는 사회가 낫다고 믿는다. 짜장면을 먹는 인간은 모두 다른 존재니까 말이다.
- 글
- 홍수경(칼럼니스트)
- 에디터
- 조소현
- 모델
- 김다영
- 포토그래퍼
- KIM YOUNG HOON
추천기사
인기기사
지금 인기 있는 뷰티 기사
PEOPLE NOW
지금, 보그가 주목하는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