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 드라마
최근 여성주의 드라마 시리즈가 연이어 제작되며 그 흐름을 가속화하기 시작했다. 여성이 그럴듯하게 포장되어 등장하는 드라마를 말하는 게 아니다. 자신의 의견을 가진, 원래 우리 여성의 모습 그대로가 등장하는 드라마다.
올해 칸 영화제의 심사위원으로 참석했던 그녀는 시상식이 끝난 후 가진 기자회견 자리에서 영화 속 여성에 대한 편견 혹은 무관심에 대해 직접적으로 ‘불편했다’고 꼬집었다. “지난 열흘간 20편이 넘는 영화를 봤습니다. 저는 영화를 정말 사랑합니다. 그러나 일부 영화를 제외하고는 여성 캐릭터들을 통해 세상이 여자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깨달았죠. 정말 불편했어요. 여성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가 더 많이 소개되길 바라고, 제가 일상에서 만나는 오늘날의 여자들이 스크린에 더 많이 등장했으면 합니다. 그저 남성들에게 반응해주는 여자들이 아니라 자신의 의견을 가진 여자들 말이죠.” 소피아 코폴라가 감독상을 받지 않았더라면 남자들의 잔치로 시작되고 끝났을지도 모를, 70년 역사의 칸 영화제 사상 겨우 두 번째 여성 감독상이라는 충격적인 기록을 상기시켜주기도 한 이번 영화제에서 제시카 차스테인은 “우리를 우리답게 그려달라”고 “우리를 그만 따돌리라”고, 세상의 절반을 차지하는 여성들의 기회에 대해 새삼스럽게 요구해야만 했다.
성차별적인 개런티, 남자 배우에 비해 한참 어린 여자 배우의 연령, 남자의 애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배역들, 여자 배우의 얼굴 대신 늘씬하고 섹시한 몸이 나와야 하는 영화 포스터, 영화계 종사자에 대한 성차별 등 아직도 넘어야 할 산이 많지만, 그래도 TV에서는 조금씩 다른 움직임이 감지되고 있다. 최근 여성주의 드라마 시리즈가 연이어 제작되며 대중과 평단으로부터 큰 호응을 얻고 있기 때문이다. 가정에서는 아버지이지만 알고보면 조폭 두목이고(<소프라노스>), 소심한 화학 선생님이 가정을 지키기 위해 어쩌다 보니 마약왕(<브레이킹 배드>)이 되고, 욕망으로 똘똘 뭉친 한 남자가 대통령이 되기 위해 살인도 마다하지 않는(<하우스 오브 카드>) 등 한 남자가 주변 상황에 의해 얼마나 악해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남성 안티 히어로가 가득했던 미국 드라마 시리즈의 트렌드가 조금씩 변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아니, 적어도 여성주의 드라마라는 새로운 장르 혹은 카테고리를 만들어내고 있다. 특히 지금, 여성 혐오자이자 성추행범인 트럼프의 시대를 맞이하게 된 미국에서 이러한 페미니즘 드라마의 붐이 일고 있는 것은 분명히 시사하는 바가 있다.
일단 동명 소설을 드라마화한 HBO 채널(한국에서는 씨네프(cineF)에서 방송)의 <커져버린 사소한 거짓말: 빅 리틀 라이즈(Big Little Lies)>(이하 커져버린 사소한 거짓말)가 니콜 키드먼, 리즈 위더스푼, 셰일린 우들리, 로라 던 등의 화려한 캐스팅으로 큰 주목을 받았다. 중산층이 모여 사는 캘리포니아 몬터레이의 한 초등학교, 학부모들이 참석하는 성대한 퀴즈 파티에서 살인 사건이 일어나고, 학부모들은 사건 현장에 있던 엄마들에 대해 경찰에 증언하기 시작한다. 자신만을 사랑하는 착한 남편과 함께 두 딸을 기르고 있는 수다스러운 가정주부 매들린(리즈 위더스푼), 한때 잘나가던 변호사였지만 현재는 미남 연하 남편과 쌍둥이 아들을 키우며 가정주부로 살아가는 셀레스트(니콜 키드먼), 그리고 이 중산층 동네에 어쩐지 어울리지 않는 나이 어린 미혼모 제인(셰일린 우들리)이 아들을 같은 학교로 전학시키게 되면서 이 세 명의 엄마는 꽤 가까워진다. 그런데 제인의 아들 지기가 성공한 커리어 우먼 레나타(로라 던)의 딸 아마벨라를 괴롭힌 장본인으로 지목되고, 이 동네 엄마들은 매들린과 레나타 두 편으로 나뉘어 긴장감을 형성하기 시작한다. 과연 그들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기에, 누가 누구를 살해하게 된 것일까.
드라마는 그동안 남자들로부터 ‘여자들이란…’ 하면서 무시당하곤 하는(우리 역시 암묵적으로 그 편견을 받아들여왔던) 여자들의 비밀, 질투, 편견, 가십을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는 요소로 이용하고, 그들 사이의 감정싸움을 당당히 스토리 한가운데 세워둔다. 마치 <하우스 오브 카드>나 <브레이킹 배드>처럼 남성적이고 정치적인 암투만이 파워 게임의 진수인 듯 으스대는 드라마 판에, 당신들이 유치찬란해서 못 봐주겠다던 여자들의 소모적인 감정싸움이 얼마나 큰 폭발력을 낼 수 있는지 증명해내기까지 한다. <커져버린 사소한 거짓말>은 초반에 중산층 여자들의 이중적인 삶을 관통해나가며 그들의 허위의식을 밝혀내려는 듯하다가, 실제로는 여성들의 우정이 남성들의 것과 어떻게 다르게 형성 되는지를 그려내면서 남성의 ‘의리’보다 더욱 단단한 여성의 연대가 무엇인지를 놀랍도록 아름답게 설명한다. 질투와 욕망으로 얽혔던 여성 사이의 미움과 긴장감이 얼마나 사랑스럽게 무너져 내리는지, 마지막에 이르면 얄미웠던 고교 동창도, 어제 나에게 비꼬듯 따가운 말을 던졌던 상사까지도 모두 끌어안고 용서하고 싶을 정도다.
소설을 바탕으로 하는 페미니즘 드라마라면 현재 훌루(Hulu)에서 방영 중인 <시녀 이야기(The Handmaid’s Tale)>를 빼놓을 수 없다. <이갈리아의 딸들>과 더불어 페미니즘 소설의 양대 산맥이라 할 수 있는 마거릿 애트우드의 80년대 소설 <시녀 이야기>가 드라마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더욱 화제가 됐다. 방사능 오염과 환경 변화 등으로 대부분 여성의 출산이 어려워진 시절, 미국은 길리아드의 식민지가 되고 만다. 전체주의 국가로, 극단적인 보수 기독교에 근간을 둔 길리아드는 욕망을 악으로 규정하고 보수적인 가치를 따르지 않는 이들은 가차 없이 처단한다. 특히 임신 가능한 여성을 ‘시녀’로 관리, 길리아드의 고위층 가정에 보내 출산을 강요하는 시스템을 가동 중이다. 주인공 오프레드는 고위 사령관의 집에 ‘시녀’로 보내진다. 그 와중에 레지스탕스로 활동 중인 또 다른 시녀 오프글렌과 친해지고, 감시자인지 구세주인지 알 수 없는 사령관의 운전기사 닉과 남녀 사이의 미묘한 긴장감을 나누고 있다. 아이를 원하는 사령관의 아내 세레나는 오프레드가 필요하지만, 자신의 눈앞에서 남편과 육체적 관계를 맺는 그녀에게 증오심과 동정심을 동시에 느끼는 중이다. 오프레드는 이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아니, 적어도 미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까.
이미 드라마의 캐릭터가 소설의 캐릭터보다 훨씬 입체적으로 진화한 까닭에, 드라마는 이미 소설을 뛰어넘는 세계를 창조해내고 있다. 시즌 1이 끝나지 않은 상황에서 시즌 2에 대한 뉴스가 솔솔 흘러나오고 있을 정도다. 소설과 견주어 결코 뒤지지 않는 내용과 연출력도 놀랍지만 무엇보다 엘리자베스 모스가 만들어내는 오프레드의 순응, 반항, 좌절, 연민 등 다양한 감정선이 드라마를 더욱 히스테릭하게 만든다. 사실 엘리자베스 모스는 페미니즘 드라마 여성 캐릭터에 최적임자이기도 하다. 그녀의 이름을 확실하게 알린 드라마 <매드맨(Mad Men)>에서 그녀는 페기 올슨 역을 맡아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국 1세대 커리어 우먼의 전형을 보여주었다. 비서로 시작해 유능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되기까지 아이도 결혼도 포기하며 일에 매달리는, 외롭지만 당찬, 힘겹지만 꿋꿋한 여성의 모습을 그려냈다. 이어 영화감독 제인 캠피온이 직접 드라마를 만들어 큰 화제가 된 <탑 오브 더 레이크(Top of the Lake)>에서 한때 성폭행 피해자였지만 현재는 한 소녀의 실종 사건을 수사하는 형사로 등장, 그해 골든 글로브 미니시리즈 여우 주연상을 받았다. 여기에 <시녀 이야기>, 조만간 방영될 <탑 오브 더 레이크> 시즌 2 <탑 오브 더 레이크: 차이나 걸>까지, 이쯤 되면 엘리자베스 모스는 페미니즘 드라마가 사랑하는 최고의 배우라 할 만하다.
지난 시즌에서 감독 제인 캠피온과의 관계를 증명이라도 하듯 홀리 헌터가 여자들을 이끄는 그룹의 리더로 등장해 놀라게 한 것처럼 시즌 2 <탑 오브 더 레이크: 차이나 걸>에는 엘리자베스 모스 이외에 니콜 키드먼이 독특한 모습으로 등장한다. <커져버린 사소한 거짓말>의 침착하고 아름다운 중산층 여성 역할과는 반대로 주근깨가 가득한 얼굴에 백발을 자연스럽게 넘겨 빗은 엄마로 등장해 궁금증을 더하고 있다. 또 <왕좌의 게임>에서 남자들보다 훨씬 더 큰 키로 인상적인 연기를 펼쳤던 그웬돌린 크리스티, 그리고 실제로 제인 캠피온의 딸인 앨리스 잉글러트가 출연한다. 일상에서 여성이 마주하는 공포와 불안함을 누구보다 잘 그려내는 제인 캠피온 감독의 작품에는 믿기 어려운 남성들이 곳곳에 포진해 있다. 백마 탄 왕자는커녕, 어딘지 모르게 위험한 남자들이 가득한 세상, 우리는 이 중 누구와 서로 기대며 살 수 있을까.
특히나 이 작품은 70주년을 기념하는 올해 칸 영화제에 초청되어 모든 에피소드가 극장에서 상영됐다. 재미있게도 <탑 오브 더 레이크: 차이나 걸>은 이번 영화제가 불러일으킨 두 가지 화두, 여성 영화에 대한 문제, 그리고 넷플릭스로 인해 촉발된 영화관에서 상영할 수 없는 콘텐츠를 어떻게 할 것인가의 문제를 모두 끌어안고 있다. 지난 70년간 황금종려상을 거머쥔 ‘유일한 여성 감독’ 제인 캠피온이 여성 문제를 전면에 내세운 ‘드라마’를 칸 영화제에서 선보였으니 말이다.
최근 몇 년간 가장 열심히 오리지널 콘텐츠를 만들어온 넷플릭스 역시 여성 중심의 삶과 관련한 콘텐츠를 많이 선보였다. 그중 최근 공개한 몇 편의 작품은 특히 어린 소녀들의 삶에 카메라를 들이밀어, 여자로 태어났다는 이유로 겪어야 하는 상처에 관해, 그 부조리한 사회에서 힘겹게 성장해나가는 강한 소녀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소설을 바탕으로 10대 소녀의 자살에 관한 이야기를 다룬 <루머의 루머의 루머(13 Reasons why)>는 성과 사랑에 눈을 뜬 한 10대 소녀가 남성 위주 사회의 폭력성과 편견을 극복하지 못한 학교 내에서 어떻게 상처받고 고립되는지를 보여주면서, 한 사람의 자살이 과연 개인적인 일일 뿐인지, 사회에 그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닌지 질문한다. 내용상 이미 끝난 드라마지만, 엄청난 호응으로 인해 시즌 2를 제작한다는 소식.
뭐니 뭐니 해도 가장 설레는 소식은 넷플릭스가 <빨간 머리 앤>을 드라마화한다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만약 당신이 발랄하게 조잘대며 행복 바이러스를 내뿜는 공상 소녀 앤을 기대했다면, 이 어두운 잿빛 컬러의 <빨간 머리 앤(Anne with an E)>에 충격을 받을지 모른다. 이번 <빨간 머리 앤>은 이런 의문에서 시작한다. 과연 이 어린 소녀에게 어떤 일이 있었기에 하루 종일 끊임없이 수다를 떨며 공상에 공상을 거듭하고, 이웃집 아주머니의 독설을 참지 못하고 소리를 내지르며, 인기 많은 동네 남자 친구의 놀림에 석판으로 머리를 내리칠 정도로 화를 참지 못한 것일까. 왜 앤은 친구들과 자연스럽게 섞이지 못했을까. <빨간 머리 앤>은 한 입양된 소녀가 겪었을 상처를 아동심리학적 관점으로 접근한다. 위험천만한 세상에 무방비로 노출되었던 환경이 소녀의 남다른 성격과 기질을 형성한 것은 아닐까. <빨간 머리 앤>은 훨씬 부조리한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불합리하고 어리석고 위험한 세상에서 스스로를 단련해나가는 앤의 인생을 막을 수는 없다. 왜냐하면, 소녀는 강하니까.
- 글
- 손혜영(칼럼니스트)
- 에디터
- 조소현
- 포토그래퍼
- TIM WALKER, GEORGE KRAYCHYK, COURTESY OF CINEF, NETFLI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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