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

몰아보는 TV생활

2023.02.20

by VOGUE

    몰아보는 TV생활

    넷플릭스와 아마존 프라임, 훌루 같은 스트리밍 TV 서비스는 미국의 TV 시청 방식을 바꿔 놓고 있다. 대다수 구독자들의 ‘몰아보기(빈지 왓칭 Binge Watching)’ 습관은 이제 미국의 기본 TV 문화가 되었다.

    넷플릭스 구독 8년차인 내가 ‘몰아보기’를 처음 경험한 건 <브레이킹 배드>의 세 시즌이 한꺼번에 공개되었을 때였다. 에피소드 세 편을 내리 보고 멈추려 했지만 ‘다음 에피소드 재생까지 10초 남았습니다. 10, 9, 8…’라는 카운트다운 멘트에 어떤 리액션도 취하지 않는 나를 발견했다. 리모컨에서 ‘정지’ 버튼을 누르면 끝날 일이었다. 곧바로 다음 에피소드가 시작됐고 어쩔 수 없다며 또 한 편을 시청했다. 그렇게 며칠 동안 몇 시간을 투자해 <브레이킹 배드> 전 시즌 감상을 완수했고, 시대를 대표하는 명작 드라마에 대한 존경의 장문 트윗을 날렸다. TV 시청은 더 이상 시간 낭비가 아니었다. 시청자가 선택한 시간에 양질의 콘텐츠를 몰아보는 것은 일상의 재미를 극대화하는 당당한 취미생활로 자리잡았다.

    넷플릭스가 <브레이킹 배드> <매드맨> <워킹 데드> 시즌들을 한 번에 풀기 이전까지 미국에서  ‘몰아보기’란 드라마 DVD나 블루레이를 소장한 팬들의 열렬한 팬질 문화에 가까웠다. 그러나 몰아보는 시청 패턴을 유의미하게 받아들인 넷플릭스는 직접 제작한 <하우스 오브 카드> 첫 시즌 13편을 하루에 모두 공개했다. 이후 <오렌지 이즈 뉴 블랙>까지 인기를 끌면서 ‘몰아보기’는 핫한 유행이 됐다. 주말에 5시간 정도 연달아 TV 드라마를 봐줘야 트렌드에 뒤쳐지지 않는 사람이 된 것이다.

    드라마를 본 사람들은 페이스북, 트위터, 인스타그램에 드라마 제목 해시태그를 붙이며 수다를 떨기 시작한다. 포스팅이 많이 될수록 그 콘텐츠는 그 시간대 인기검색어가 된다. 콘텐츠가 인기를 끌면 또 ‘남들이 경험하는데 나도 경험해야 만족하는’ 욕망을 가진 사람들을 불러 모은다. 그렇게 유행이 창조된다. 드라마가 공개된 뒤 그 흥망성쇠를 알기까지 이틀도 채 걸리지 않는다. <기묘한 이야기> 때는 특정 조연 캐릭터를 지지하는 붐이 일었고, <옥자> 관련해선 수많은 채식 선언이 오갔다. 상반기 화제작인 넷플릭스의 <루머의 루머의 루머>와 훌루의 <시녀 이야기>는 몇 달 동안 SNS 뉴스 거리를 끊임없이 생산하며 인기를 유지하고 있다. 이 SNS 트렌딩 놀이에 동참하기 위해선 화제의 콘텐츠를 볼 수 밖에 없다. 요새는 누구보다 빨리 전체 시즌을 다 보고 화제를 선점하려는 경쟁까지 벌어진다. SNS 스포일러가 두려운 이들 또한 새로운 콘텐츠가 공개되기 무섭게 모든 에피소드를 감상한다. 몰아볼 여유가 없는 사람들은 휴대폰과 태블릿으로 통근 시간과 점심시간마다 부지런히 시청하며 세간의 화제를 따라잡으려 노력한다.

    수천만 명이 함께 스트리밍 TV를 즐기다 보니 부딪히는 문제도 비슷하다. 이들은 #NetflixProblems(넷플릭스 문제들)란 해시태그 아래 경험담을 공유한다. 다음날 시험이 있는데도 드라마를 몰아보다가 폐인이 되어 가고, 결정장애가 있는 사람들은 수많은 콘텐츠 속에서 원하는 걸 찾는데 몇 시간을 소비한다. 애인과 같은 계정을 사용하다가 헤어진 한 남자가 “새 계정을 등록하면 지금까지 봤던 나의 시청 목록이 사라지거든. 네 계정을 계속 사용하게 바뀐 비밀번호 좀 알려주라”며 비굴하게 부탁을 하는 문자 ‘짤’도 올라온다. 어떤 때는 옛날 콘텐츠를 보고 감동받아 혼자만 SNS에서 떠들게 되어 민망한 경우도 있다. 하루 종일 TV만 보느라 집밖에 나가지 못한 사람들을 위한 운동 조언도 쏟아진다. 스트리밍 TV 구독자라면 누구나 공감하는 이 경험담들은 SNS로 색다른 유대감을 만들어낸다. 다른 시간에 다른 콘텐츠를 보고 있지만 수많은 사람들과 그 모든 과정을 나누며 경험 자체를 즐긴다.

    저녁을 먹고 온 가족이 둘러 앉아 TV를 보던 시절은 막을 내렸다. 라이브 스포츠 중계가 아니라면 SNS에서 언급도 되지 않는 콘텐츠를 광고까지 참아가며 찾아볼 이유가 없다. “종이로 된 신문에 그 날의 TV 일정표가 실리곤 했었지”라며 공중파 TV 보던 때를 회상할 날이 멀지 않아 보인다. 보고 싶지 않은 것들을 볼 필요 없이 내가 원하는 것만 보고 살 수 있는 세상. 스트리밍 TV가 가져온 미래다.

      홍수경(칼럼니스트)
      에디터
      조소현
      포토그래퍼
      GETTYIMAGESKOREA, COURTESY PHOT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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