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소하고 화려한 캔버스
이혜영 이 뉴욕 첼시의 갤러리에서 첫 개인전 〈Instinct Curiosity〉를 열었다. 삶의 단편을 풀어낸 캔버스가 건네는 무언의 대화와 아름다운 아마추어리즘.
배우, 가수, 패셔니스타, 방송인이라는 타이틀에 화가라는 직함을 덧붙이게 된 이혜영에게 “화가로서의 정체성은 어떤 걸까”라는 진부한 질문을 던지자 그녀는 심각한 답변 대신, 그것이 화가로서 꼭 가져야 할 덕목인지를 되돌려 물으며 질문의 허를 찔렀다. 이를 수습하며 질문에 속사정을 보탰다. 그녀의 작품에 방송인, 가수, 배우라는 필터를 대고 편견으로 읽는 대중들과 ‘갑툭튀’ 이혜영을 달갑게 여기지 않는 미술계의 시선이 있지 않느냐고, 아니 오히려 차라리 ‘이 모든 것이 다 이혜영이다, 그 모든 것이 다 작품에 녹아 있다’고 이야기하면 되지 않느냐고. 하지만 이혜영은 여전히 말간 사과 같은 얼굴로 그릴 치즈 샌드위치 한쪽을 베어 물면서 전혀 다른 답변을 내놨다. “그림을 전공한 것도 아니고, 아마추어로서 나 자신을 위해 그린 건데요, 뭐. 유명 화가가 되겠다는 욕심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내 열정이 참되고 진실하다면 바람이 나를 계속해서 이끌어주겠죠. 그렇게 흘러가는대로 하다 보니 이렇게 뉴욕에서 개인전도 하게 됐고. 사람들의 평가나 편견이야뭐, 어쩔 수 없는 거죠.”
돌이켜보면 이혜영은 1등이 되겠다거나 어느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겠다는 욕심을 부려본 적 없는 사람이었다. 가수로서의 기간도 고작 몇 년, 배우로서 참여한 작품도 손에 꼽을 정도니까. 그럼에도, 그녀가 원하든 그렇지 않든, 대중들은 이혜영의 존재감을 외면할 수 없었다. 패션계는 그녀의 하루하루 스타일에 열광했고, 옐로페이퍼는 그녀의 뒤를 따라다녔다. 재혼을 하고, 사춘기 딸이 생기고, 대중과 적절한 거리감이 생겼을 때 그녀에게 그림이 찾아왔다. “아버지는 암 투병 중이셨고, 딸은 사춘기 진통을 겪고 있고, 강아지 도로시는 아팠어요. 내 마음을 기댈 곳이 없는데 모두들 나만 쳐다보는 그런 느낌이었거든요. 그래서 내 그림 바닥에는 슬픔이 깔려 있는 것 같아요.”
‘화가’가 되려고 그림을 그린 것이 아닌 것처럼, 그림을 가르친 선생님도 따로 없었다. 화구방에서 유화 도구를 챙겨달라고 부탁해 구입하고, 인터넷 동영상을 보며 무작정 그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하루 10시간씩 그리다 보니 그림이 집 안을 가득 채우고도 남아 작품 보관을 위해 이사를 가야 할 정도였다. ‘자랑할 길이 없어서’ 인스타그램에 하나둘씩 올린 그녀의 작품이 화제를 불러일으켜 갤러리에서 전시를 하게 되고, 브랜드와 콜라보레이션까지 하는 작가가 된 것은 바람 따라 파도가 흘러가는 대로 가다 보니 만난 우연이면서 또한 운명이기도 하다.
남들보다 두 살이나 어린 여섯 살에 학교를 들어가 학창 시절 내내 선생님의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해 혼자 상상의 나래에 빠졌던 어린 소녀는 같은 학급 친구들과 한참 어긋나 있는 시간과 성장의 간극을 언어 대신 컬러로 메웠다. “어릴 때부터 미술에는 소질이 있었어요. 미술학원 한 번 간 적이 없는데 어린이신문에서 주최하는 미술 대회에서 2등을 해서 트로피를 타오기도 했다니까요. 중학교 때는 난을그리는 수업이 있었는데, 5분에 하나씩 친구들 난을 쳐줬어요. 우리 반뿐 아니라 옆 반 친구들 것까지 그려주고 그랬어요.” 여기에 유년 시절 살던 산동네 풍경은 그녀의 감성 바닥을 흐르는 물길 같은 것이었다. 도시의 아스팔트와 보도블록이 익숙한 친구들과는 다른 흙냄새 나는 이혜영만의 결. 남들보다 덜 자란 이혜영의 세계는 어린 시절 상상의 친구를 잃지 않은 피터 팬 같은 구석이 있다. “나는 내가 사람들과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다는 걸 몰랐어요. 신랑이 항상 ‘그걸 그렇게 볼 수도있구나’ 하고, 친구들이 ‘참, 넌 독특해’ 하고 자주 이야기하니까 알게 된 거죠.”
첼시에 위치한 엘가 위머 PCC 갤러리에서 선보인 이혜영의 첫 뉴욕 개인전 <Instinct Curiosity>를 통해 그녀는 유년 시절로부터 시작되어 거슬러 올라오는 다양한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강아지와 새를 비롯한 다양한 동물, 꽃과 나무가 가득한 이 자연의 세계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곳곳에 그녀가 개인적으로 겪은 기쁨과 슬픔 등 크고 작은 사건과 이야기가 촘촘히 박혀 있다. 특히 그녀의 패션 브랜드 이름이기도 한 강아지 도로시의 죽음은 그녀의 작품에 큰 소재로 곳곳에 등장한다. 얼굴의 검은 반점이 배경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의 ‘My DorothyⅠ’과 반대로 흰 배경에 검은 반점이 눈물처럼 흘러내리는 ‘My Dorothy Ⅱ’로 비슷하면서도 상반된 작품을 변주하며 슬픔과 애도를 담아내고, 아버지와의 안타까운 이별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담아낸 ‘All Right, All Right’은 날아가가는 새를 보내지 못해 긴 끈으로 연결하는 한 여자가 큰 나무 앞에 서 있다.
하지만 가족의 이야기를 담은 작품 중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역시 ‘Bubulee and My Family’다. 나무가 가득한 동산과 산 위로 타오르는 불길을 중심으로 서로 다른 컬러로 화면 분할이 되어 있는데, 거꾸로 날아가는 기구 속에 추억 속의 강아지 도로시가, 새로운 가족이 된 강아지 부부리가 한가운데 크고 행복하게 자리하고 있다. “그 아래에서 열심히 세상에 새로운 불을 지피는 소녀는 내 딸 서현이에요. 호수에서 수영을 하고 있는 건 신랑, 그 물을 길어다가 혹시라도 서현이의불이 산불로 번질까 봐 소방관처럼 긴장하고 물을 쏘아대고 있는 것이 바로 나인거죠.(웃음)” 그리고 ‘Let’s Wash and Put It In’에 대한 설명도 이어간다. 갈수록 건망증이 심해져 머릿속의 뇌를 꺼내 물로 닦고 싶은 심정을 담았는데, 그 옆에는 가발도 달려 있고 뒤에는 딸 서현이가 빼꼼히 그 모습을 쳐다보고 있다. “내 작품은 자세히 찾아보는 재미가 있어요. 내 작품하고는 대화를 할 수가 있어요. ‘LoveStory Ⅰ’만 해도 그래요. 너는 왜 슬퍼 보이니? 여자 친구와 헤어졌니? 아니면 기다리고 있나? 이것 역시 대화하고 싶은 작품이에요.”
거창하고 의미심장한 철학이나 화가로서의 정체성 같은 화두에 몰두하는 대신, 작가 이혜영은 솔직하게 느낀 삶의 단편을 ‘피터 팬’ ,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나 오즈의 마법사 ‘도로시’의 동화처럼 색다른 그녀만의 캔버스 위에 펼쳐놓고 굳이 자신의 생각을 포장하지도, 다른 레벨로 끌어올리기 위해 노력하지도 않는다. 자신의 상상 속에서 이야기를 건져내고 정리하느라 다른 수사학적 고민을 할 시간이 그리 많지 않은 것이다. 그저 내 작품과 한번 이야기를 해보라고, 내가 숨겨둔 아이디어를 즐겁게 찾아보라고 손을 내민다. “내 그림은 나의 마음속 이야기와 철학이 나오지 않는 듯 나오는 데 매력이 있는 것이 아닐까 싶어요. 유명한 작가들에게는 자기만의 스타일과 색이 있는데, 나는 그럴 수 없을 것 같아요. 다양한 이야기를 하고 싶은 욕구가 있어서 10년 후에 내가 어떤 그림을 그리고 있을지 나도 궁금해요.” 그녀가 이번 뉴욕 전시를 위해서 마지막까지 공을 들이면서 작업했던 ‘…Remember…Me…?’는 다양한 이질적인 요소를 대담한 컬러와 형태로 끌어안으며 그녀의 다음 스텝이 어디로 향할 것인가를 예상하게 해줄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동양적인 선과 나무의 형태가 병풍과 같은 캔버스에 담겨 있으면서도 다양한 컬러로 만들어진 수평선과 독수리는 어딘지 모르게 아프리카나 남태평양의 낯모르는 섬을 떠오르게 하기도 한다. 수평선 위에 그려진 나무들, 그 위에 덧그려진 나무 의자와 동물들에, 책장을 넘기듯 한쪽 끝이 차곡차곡 접힌 것까지 그녀의 감각에 기술적인 요소까지 더해지며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는 중이다.
이혜영의 작품을 감히 샤갈이 가진 자유로움에 비하고 싶다. 시대 트렌드에 상관없이 자신만의 상상력의 세계를 과감하게 펼친 샤갈처럼, 이혜영이 화단의 평가에 흔들리지 않고, 독학으로 일군 이 자유로운 상상의 세계를 지금처럼 맘껏 캔버스에 흩뿌리기를. 그녀라면 지금처럼 뉴욕 첼시의 갤러리를 마음껏 누비면서 다른 젊은 작가들의 아이디어와 재기 발랄함을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체득하고, 결코 그 아마추어리즘을 허술한 프로페셔널리즘에 내주지 않을 것이다.
- 글
- 손해영 (칼럼니스트)
- 에디터
- 조소현
- 포토그래퍼
- 고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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