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ill Light
꺼지지 않는 불빛처럼 조용히 흥행 주연의 자리를 지켜온 배우. 자신의 미소처럼 늘 선량한 성장의 인물이었던 이종석이 영화 〈브이아이피〉에서 처음으로 서늘한 악역이 되었다. 그러고 보니 선악이 공존하는, 가늠이 불가능한 얼굴이다.
영화 <브이아이피>의 김광일 역을 하고 싶다고 감독에게 먼저 손을 내밀었죠. 나서지 않는 성격이라고 들었는데 어떻게 먼저 용기를 냈나요?
처음으로 한국에서 1년정도 작품을 쉬고, 중국에서 드라마 <비취연인>을 찍을 때 우연히 <브이아이피> 시나리오를 봤어요. 살인 용의자 김광일은 안 해본 역할이었죠. 어떻게 보면 현재의 제가 하기엔 부담스러운 역할이고요. 하지만 해보고 싶었어요. 한 번쯤은 모험을 하자고…
새로운 도전이라 겁이 많이 난다고 했죠.
네, 그 말을 자주 해요. 불안하고 겁나요. 어떻게 나올지도 모르겠고.
첫 악역이라니 놀랐어요. 지난 작품을 찾아보니 정말 선량한 역만 했더군요.
주로 성장하는 캐릭터를 연기했죠.
남자 배우들은 누아르란 장르에 로망이 많아요. 이번 영화도 장르에 대한 욕심이 있었겠죠?
아무래도 남자 배우니까 그에 대한 동경이 있죠. 하지만 제 외적인 이미지에 스스로 한계를 느껴서 피했어요. 그래도 이번 영화에선 제가 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는 생각에 감독님께 연락을 드렸죠.
요즘 악역은 오히려 선과 악의 구분이 모호한 얼굴이에요. 비밀의 열쇠를 쥔 김광일 역에 이종석 씨의 ‘외적인 이미지’가 어울린다고 생각하는데요.
그 역할을 연기하는 저를 떠올렸을 때 그렇지 않았어요. 하고 싶은 역할이지만 현실적인 가능성에 대해서는 물음표였죠. 제가 특히 연기에 있어서는 생각이 좀 많아요. 그래도 20대가 가기 전에 해보자 싶었죠.
그러고 보니 20대가 얼마 안 남았네요. 저도 <브이아이피>의 박훈정 감독 팬이에요. 영화 <신세계>도 그렇고 ‘한국식 누아르’를 만들어왔죠. 본인은 한국식 누아르의 특징이 무엇이라고 생각해요?
잘 모르겠어요. 그저 박훈정 감독님은 무언가 세련되거나 무겁게 연출하려고 억지로 애쓰지 않으셨어요. 본인이 각본을 먼저 쓰셨던 분이니까 원하는 그림이 정확하셨죠. 다만 테이크를 많이 가시는 편이에요. 처음이나 마지막 테이크에 배우들 연기가 좋은 경우가 많다시지만 킵해두고 계속 끌어내려고 하시죠.
평소 좋아하는 누아르 영화는 뭔가요?
지금 30대인 선배님들 보면 대표작이 하나씩 있잖아요. 예를 들면 김래원 선배님의 <해바라기>, 원빈 선배님의 <아저씨>, 조인성 선배님의 <비열한 거리>. 30대가 돼서 좋은 작품을 만나 더 멋있어진 선배들을 보면서 저도 가능할까 의문이 들어요.
지금도 그렇고, 다른 인터뷰를 읽어도 걱정이 많은 편 같아요.
맞아요, 걱정이 되게 많아요. 항상 재능이 없다고 느끼거든요. 그래서 자꾸 공부하려고 하지만 걱정이 줄진 않더라고요.
연기 말고 삶의 다른 부분도 그런가요?
아무래도 그런 편이죠. 작년에 한 번 1년 쉰거를 빼곤, 거의 겹치기처럼 작품을 계속했어요. 일상이 촬영장이라 쉬면 어색했어요. 하지만 일하면서는 겁이 나고 점점 힘들어졌죠. 선배님들과 고민을 나눠봤는데, 연기는 할수록 어렵다고 하셨어요.
<브이아이피> 제작 발표회 때 박희순 씨가 “이종석이 귀찮을 정도로 물어본다. 배움에 굉장히 적극적이다”라고 말했어요. 주연배우인 장동건, 김명민, 박희순 씨 모두 이종석 씨를 정말 아끼더군요. 하지만 작품이 끝난 뒤에는 인연이 잘 이어지지 않는다고 들었어요.
성격이 내성적이라 연락 한번 드리려면 고민이 많아요. 시간이 너무 늦었나, 너무 이른가, 식사하시려나? 연락을 자주 드리지 못해 죄송하죠. 그럼에도 칭찬을 많이 해주셔서 놀랐어요.
캐릭터에 깊이 빠진다고 들었어요. 첫 악역인데 개인적인 영향을 받았는지 궁금해요.
일상까지 영향을 주진 않았지만 처음 해보는 경험은 있었어요. <브이아이피> 첫 촬영 때 피를 굉장히 많이 봤어요. 정신이 몽롱하고 끝나서는 불쾌하고 우울하고 기분이 이상했어요. 어지럽기까지 하고요. 이게 뭐지? 묘했죠.
“원래 비극을 좋아합니다”라고 했어요. 인간은 본래 비극에 끌리기 마련이지만, 이유가 뭔가요?
저는 비극을 해본 적이 없어요. 작품이 끝나면 여운이 오래가는 것은 비극인데 말이죠. 사실 어떤 좋은 작품도 3개월 정도 지나면 많이 잊어버리거든요. 하지만 비극은 그 기간을 조금 더 연장시켜주죠. 그래서 좋아하는 것 같아요. 다른 얘기지만 이번 드라마 <당신이 잠든 사이에>를 찍을 때 그냥 울고 싶은 거예요. 극 중 인물이 좀 울었으면 좋겠어서 작가님께 “저 좀 울려주세요”라고 부탁했어요. 펑펑 울었죠. 연기를 하다 보면 극 중 인물을 통해 제 감정을 격하게 표현하고 싶을 때가 있더라고요.
촬영 중에 펑펑 우니까 해소가 좀 되던가요?
모두 쏟아내서 좋았어요.
연기가 인간 이종석의 해소법이 되기도 하는군요.
그렇죠. 작품을 하는 3~4개월 동안 감정을 많이 쓰잖아요. 확실히 평범하게 사는 것보단 감정 소모가 많아서 힘들어요. 힘든 만큼 삶에 대한 경험치가 쌓이지만요.
예전에 조언을 해줄 참모를 바란다고 했죠. 만났나요? 아니면 자기 확신이 커지면서 바람이 줄었나요?
아직은 없어요. 그냥 혼자서 현명하게 판단하려고 노력하죠.
“탄탄대로다”란 말 자주 듣죠? 본인이 판단을 잘해왔나 보네요.
운이 좋았죠. 선택에 운이 따랐어요.
자존감은 낮은데 자기애는 강하다고 말했어요. 인스타그램을 보니 셀카를 많이 올리더라고요.
팬들 보라고 올리는 거예요. 나를 보여줄 창구가 없으니까 의무적으로라도 인스타를 하려고 해요. 그리고 자존감이 낮다고 표현한 이유는, 가끔 연기를 칭찬해주실 때가 있는데 저는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한 적이 없어서예요.
진짜 한 번도 없어요?
네, 한 번도. ‘이 신은 좀 잘할 것 같아’라는 적은 있지만, 진짜 연기는 못한다고 생각해요. 영화 <브이아이피>나 드라마 <당신이 잠든 사이에>를 찍을 때도 감독님들께 “저는 재능이 없는 것 같습니다”라고 했어요.
감독님이 뭐라시던가요?
웃어넘기세요. 저는 진심인데… 그래서 공부를 많이 하려고 해요.
연기를 어떻게 공부하는데요?
공부도 좋지만 이런 생각도 들어요. 연기도 타고난 사람들이 있잖아요. 얼마 전에 드라마 <비밀의 숲>에서 조승우 선배 연기를 보면서연기는 저렇게 하는구나 느꼈어요. 저도 검사 역할을 할 거라서 공부하려고 봤는데, 진짜 놀랐어요. 굳이 과한 표정을 짓지 않아도 감정이 전달되더라고요. 그래서 또 한 번 ‘나는 확실히 재능이 없구나’라고 생각했어요.
여기까지 이종석을 끌고 온 건 연기력이란 말도 있는데요.
고맙지만 아직 멀었어요.
자존감을 높이기 위한 질문. 본인이 가장 잘하는 건 뭐라고 생각해요?
이거는 진짜 대답을 못하겠어요. 사실 저한테 항상 하는 질문이에요. “너는 뭘 잘하니? 연기를 안 했으면 뭘 하고 살았을까?”라는 질문도 많이 하고 생각도 많이 하는데 도무지 “이게 특기야!”라고 쓸 만한 게 없어요. 신인 때는 특기란에 태권도를 썼어요. 태권도를 오래 했거든요. 근데 지금은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거의 매일 운동을 한다고 들었는데, 특기란에 끈기라도…
운동은 일의 연장이에요. 즐기기보단 해야 하니까 하는 거죠.
이종석 씨 관련 인터뷰나 영상을 보면 공통적인 인상을 받아요. 잘 보이려고 애쓰거나 마음에 없는 말을 하지 않죠. 상대에게 나쁘게 비칠지라도 솔직해요. 제 느낌이 맞나요?
그래야 살기 편한 것 같아요. 최대한 숨기지 않으려고 해요. 신인 때부터 인터뷰에 정말 솔직하게 답했어요. 이제 연차가 쌓이니 숨겨야 할 것이 생기더라고요. 좀 비극이에요. 그래서 요즘 힘들어요, 사실.
그래서 배우들은 신인 때 인터뷰가 제일 재미있어요.
맞아요, 저도 선배님들 인터뷰 엄청 찾아봐요. 인터뷰가 그 사람을 그럴듯하게 포장하기도 하지만 생각을 엿볼 수 있어서 좋아요. 제 인터뷰 기사는 물론 다 읽고요.
어쨌든 없는 말을 쓰진 않으니까요. 하지만 텍스트로 나갔을 때 어조나 분위기가 전달이 안 되면 오해를 살 수도 있죠.
되게 묘해요. 내가 같은 말을 해도 텍스트로 보면 ‘어? 묘하게 받아들이겠다’란 생각이 들어요. 또 인터뷰 하는 기자에게 내가 이렇게 보였구나를 알게 되더라고요. 그러다 보니 조금씩 인터뷰를 줄이게 됐어요. 겁나더라고요.
처음부터 끝까지 읽지 않고 특정 부분 편집본만 인터넷에 떠돌기도 하고요.
맞아요, 저도 그런 것이 점점 많아져요. 비극이죠.
드라마 <당신이 잠든 사이에>의 선택 기준은 박혜련 작가 때문인가요? <너의 목소리가 들려> <피노키오>에 이어 세 번째 작품이군요.
맞아요, 작가님 작품은 시간이 지나면 그리워져요. 좋은 사람이라고 느끼면 다시 함께 일하고 싶어 해요. 이번에 감독과 상대 배우는 바뀌었지만 다행히 현장이 너무 나이스하고 퍼펙트했어요.
어쨌든 모든 건 사람이 하는 일이니까요.
드라마의 마지막 장면을 찍고 나서(드라마는 사전 촬영을 마쳤다) 작가님께 “내 인생에서 가장 잘한 선택은 작가님을 만난 것이다”라고 말씀을 드렸어요. 원래 낯간지러운 말을 잘 못하고, 꾸며낸 말처럼 들릴 수 있어 조심스러웠지만 진심이에요. 인생을 오래 산 건 아니지만 그중 제일 잘한 선택이라고 생각해요.
누구든 인간관계의 어려움을 토로하지만, 특히 스타라면 주변에 다가오고 맴도는 사람이 많을 텐데요. 관계를 새로 맺거나 유지하는 데 기준이 생겼을 것 같아요.
기준이라기보단 그냥 다름을 인정하게 됐어요. 보통 사람을 대면하면 선입견이나 편견이 있을 수 있잖아요. 요즘엔 곧이곧대로 받아들여요. 그래서 모두 잘 지낼 수 있는 것 같아요.
지금 가장 가까운 사람은 누구예요?
우리 엄마요. 어릴 적에 데뷔해서 엄마와 떨어져 지낸 시간이 많았어요. 드라마 찍으면서 너무 힘들어서 “엄마 집에 좀 와 있어줘”라고 부탁했죠. 그렇게 같이 산 지 3개월 정도 됐어요. 고등학생 때부터 나와 살았는데 스물아홉이 되어서 “엄마 밥 줘”라고 말하려니 뭔가 좋더라고요. 얘기도 많이 나누면서 더 애틋해졌고요. 지난 10년 동안 못한 일을 다시 하는 거죠.
어머니와 얘기를 많이 나누나 봐요?
일 마치고 집에 들어가면 엄마가 항상 제 앞에 앉으세요. 마주 보고 앉아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는데 그게 너무 좋아요. 전에는 왜 그러지 않았나 몰라요.
어릴 적 아주 오래된 기억은 뭐예요?
딱 한 장면이 있어요. 다섯 살이나 됐을까. 저희 할머니, 할아버지께서 목장을 하셨어요. 그 목장에서 막 뛰놀던 기억이 나요.
행복한 기억이네요. 그렇다면 가장 후회되는 건 뭔가요?
하나 있어요. 옳은 선택을 하며 살았다고 생각하는데 요즘 들어 딱 하나 생겼어요. 너무 후회가 돼요(그는 어떤 문제인지 말하려다 말기를 반복했다).
지금이라도 바꿀 수 있으면 그럴 건가요?
사실 지나고 나서 고치려면 고칠 수 있는데 ‘어떻게’가 중요해서요. 계속 고민 중이에요.
이종석 씨의 지난 인터뷰를 보면 몇 가지 키워드로 정리돼요. 끊임없는 작품 활동과 더불어 집돌이, 드라마 덕후, 카페 사장이란 꿈처럼 정적인 것들이죠.
집에 있을 때 비로소 충전이 돼요. 친구를 만나러 나가기도 쉽진 않아요.
만나는 친구들도 고등학교 동창들로 한정적이라고요.
요즘에는 배우 윤균상 씨와 친하게 지내요. 최근 정해인이란 배우와 드라마 하면서 친해졌고요. 저보다 한 살 많은데 정말 괜찮은 사람이에요. 감독님 옆에서 모니터를 하다 보면 “형 진짜 잘생겼다”란 말이 절로 나와요. 얼굴 바꾸고 싶어요.(웃음)
술도 안 마시는데 친구들과는 뭘 하며 시간을 보내나요? 설마 드라마 같이 보기?
얘기하는 거 좋아해요. 사는 얘기, 힘든 얘기.
꿈 얘기도 하나요? 좋은 아빠가 되고 싶단 것 말고 꿈이 있다면요?
신인 때는 대체 불가능한 배우가 되고 싶다고 했어요. 송강호 선배님처럼 떠올리는 순간 ‘엄청난 배우지’ 하고 바로 연상되는. 선배님은 정답이자 바이블이죠. 요즘에는 꿈이 좀 바뀌었어요. 우리나라에서 돈을 가장 많이 버는 배우가 되고 싶어요.
자칫 오해를 살 거 같은데요?
전에도 어떤 선배와 밥을 먹다가 “넌 어떤 배우가 되고 싶니?”라는 질문을 받았어요. 인터뷰 때 많이 듣는 질문이지만 다시 곰곰이 생각하다 “대한민국에서 돈을 가장 많이 버는 배우가 되고 싶어요”라고 답했어요. 이유를 설명하기 전에 자리가 파해서 아마 오해하셨을지도 몰라요. 이번에는 설명을 하고 싶어요. 돈을 많이 버는 배우가 되려면 모든 것을 갖춰야 가능하더라고요. 연기도 잘해야 하고, 인기도 많아야 하고, 선택이 항상 옳아야 해요. 이 모든 것을 압축해서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그렇게 표현되더라고요. 오해 없이 제 마음이 전달됐으면 좋겠어요.
- 에디터
- 김나랑
- 포토그래퍼
- AHN JOO YO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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