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

만화가 문학이 되는 순간

2017.09.05

by VOGUE

    만화가 문학이 되는 순간

    현대 그래픽 노블 세계에서 가장 문학적인 작가, 크레이그 톰슨. 충청남도 금산행을 앞두고 그가 〈보그〉와 만났다. 놀랍게도 인삼에 관한 차기작을 준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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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천국제만화축제 측의 초청으로 방한했다. 초청이 기뻤던 진짜 이유가 있다고 들었다.
    동생 필과 나는 진작 한국에 가기로 계획했다. 인삼을 소재로 한 작품을 준비 중이라 한국과 중국의 인삼밭과 박물관을 둘러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때마침 부천국제만화축제 측의 연락을 받고 “예스!”를 외쳤다.

    고향인 위스콘신이 인삼 재배 지역이라고 들었지만, 어쩌다 인삼에 빠지게 됐나?
    내 고향은 인구가 1,000명 정도밖에 안 되는 작은 마을이다. 대부분이 농업에 종사하고, 그중에도 인삼을 중점적으로 키운다. 마을 입구서부터 인삼밭이 보인다. 1880년대부터 재배했으니 심지어 역사도 오래됐다. 가난한 우리 형제는 여름이면 인삼밭에서 일했다. 돈을 벌어서 만화책을 사고 싶었으니까. 시간당 1달러라, 1시간 일하면 만화책 한 권이 생겼다. 잡초를 뽑고, 인삼 열매를 따고, 가을에는 땅을 파서 인삼 뿌리를 수확했다. 인삼 재배의 처음과 끝을 다 해본 셈이다.

    언제 인삼을 작품화하겠다고 결심했나?
    8년 전이다. 창의적인 글 쓰기에 대한 책을 농사에 빗대어 쓰면 어떨까 싶었다. 그러다가 인삼 아르바이트가 굉장히 독특한 경험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 분야를 공부하다 보니 창의적인 글쓰기보다 인삼 자체에 흥미가 더 생겼다. 인삼 뿌리가 하나의 캐릭터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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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삼의 고장인 금산을 방문한다고 들었다.
    인삼박물관에 꼭 갈 거다. 인삼 축제도 참여하고, 식당에서 인삼을 이용한 음식도 먹을 계획이다. 어제는 인삼 소주를 마셨다.

    작품 들어가기 전 사전 조사를 방대하게 하는 편인가?
    그렇다. 인삼을 공부하는 데만 1년 넘는 시간이 걸렸다. 전작 <하비비> 때도 조사를 하느라 작품이 늦어졌다. 좀 문제다. 안에 넣는 건 그만하고 소화시킨 걸 밖으로 꺼내는 연습을 해야겠다. (<하비비>는 <담요> 이후 7년 만에 발표한 작품이다.)

    부천국제만화축제를 둘러봤을 텐데, 인상적인 한국 만화나 그래픽 노블이 있었나?
    그 전엔 한국 작품에 대해 잘 몰랐다. 이번 초청을 통해 많이 알게 되어 좋았다. 사진을 엄청 많이 찍었다. 특히 한국 만화의 연대기가 인상적이었다. 당시의 정치적인 상황과 만화가 함께 흐르고 있었다.

    <담요>의 큰 성공 이후 프랑스, 스페인, 모로코 등을 순회하며 쓴 스케치 일기 <만화가의 여행>도 좋아한다. 이번 여행에도 스케치를 하고 있나?
    지금까진 인터뷰가 많아서 여력이 없었다. 오늘부턴 스케치를 하러 다닐 거다.

    잦은 스케치로 손목이 아프다고 들었는데 괜찮은가?
    물어봐줘서 고맙다. 한국 오기 일주일 전에 스케이트보드를 타다가 손목을 다쳤다. 어릴 적부터 동생과 스케이트보드를 자주 탔는데 역시 40대에겐 무리인가 보다. 어릴 적 우리가 집착한 두 가지가 만화책과 스케이트보드다. 사실 10대에는 스케이트보드가 가장 중요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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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의 독립책방에서 독자와의 만남을 가졌다. <만화가의 여행>을 보면 많은 인터뷰나 사인회 때문에 지치는 것 같던데, 그럼에도 이런 행사를 갖는 이유는 무엇인가?
    분명한 차이가 있다. <만화가의 여행>을 작업할 2004년만 해도 여러 가지를 동시에 해서 좀 지쳤다. 그런 미친 짓은 다시 안 한다. 시간을 내서 잠을 자고, 밥도 제대로 먹고 움직일 거다.

    <하비비>를 가방에 넣고 다니다가 “요즘에도 사전 들고 다니냐”는 소리를 들었다. 660페이지니 그럴 만하다. 어디든 마찬가지지만, 특히 한국에선 만화를 보는 플랫폼이 단행본에서 휴대전화와 PC로 바뀌었다. 그에 맞춰 만화도 한 회, 한 회 마무리하며 연재하는 형식이 많다. 이런 시대에 장편 단행본을 고집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독실한 신앙생활을 하는 가정에서 자라서, 집에 책이라곤 성경뿐이었다. 그나마 신문에 실리는 단편 만화가 읽을거리의 전부였다. 그 영향으로 두 가지가 혼재된 스타일의 작업을 하는 듯싶다. <담요>를 작업하던 90년대 말은 미국 만화책이 온통 슈퍼히어로로 도배될 때다. 28페이지 정도 되는 분량에 이야기 진행도 빠르고, 폭발적인 에너지의 액션을 그렸다. 난 반대로 그리고 싶었다. 느리게 진행되고, 좀더 따뜻하고 친밀한 이야기를. 액션 대신 숨 쉴 수 있는 여유가 있는 작품을 하고 싶었다.

    책등이 있는 형태의 출간을 고집한다고 들었다.
    90년대 미국에서 만화는 팸플릿 형태로 비닐에 담아 팔렸다. 나는 책다운 책을 만들고 싶었다. 책꽂이에 꽂아두고 때때로 꺼내 보는 책.

    모든 작업을 혼자 한다고 들었다. 참고로 한국에선 문하생을 두고 작업을 분업화하는 경우가 많다.
    그림 외에도 프로덕션 일 전체를 혼자 한다. 심지어 그림을 스캔하고, 디지털화해서 깨끗하게 마무리하는 것까지 내가 한다. 이 후반 작업만 6개월이 소요된다. 보통 아티스트들은 이 부분까진 직접 하지 않으니, 내 작업량이 많긴하다. 완벽주의자라서가 아니다. 그냥 누군가의 ‘보스’ 노릇을 하기 싫다.

    펜이 춤을 추는 것 같은 당신의 그림체를 굉장히 좋아한다. 어떤 붓펜을 쓰는가?
    정말 ‘올드패션’한 방식이다. 붓을 잉크에 찍어서 그린다. 여행 중일 때는 여건상 일반펜을 갖고 다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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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에서는 아직 출간하지 않았지만 최근작 <스페이스 덤플린>은 처음으로 시도한 올 컬러 만화다. “검은색과 흰색이 자신을 표현하는 가장 순수한 방식”이라고 했는데, 갑자기 컬러 만화를 그린 이유는 무엇인가?
    내 작품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캘리그래피다. 글씨체와 선을 굉장히 중시한다. 다만 이번 작품은 아이들이 볼 것이라 색이 다양하면 좋겠지 싶었다. 색은 다른 사람이 입혔다. 내가 색칠까지 했으면 완성까지 1~2년은 더 걸렸을 거다.

    개인적으로 <담요>를 커플에게 선물해왔다. <담요>가 세계적인 인기를 얻은 이유가 무엇일까?
    순수함 때문 아닐까. <담요>는 굉장히 개인적으로 그린 작품이다. 누가 읽을 거라 생각한 적 없다. 그만큼 자전적인 이야기가 진실하게 담겼다. 독자에게도 전달됐으리라 생각한다.

    “자전적인 만화가 작가의 실제 생활을 망칠 수 있다”고 말한 적 있다.
    한번은 친구가 “자신은 책에 넣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다. 당연히 뺐다. 어려운 문제다. 프랑스 만화가인 루이스 트론데임과 얘기한 적 있는데, 조안 스파르라는 만화가가 자기 친구를 하도 책에 등장시키는 바람에 모두 그를 피했다고 한다. 그에게 비밀 따윈 말할 수 없다. 언젠가 책으로 나올 테니까! 나도 재미있는 실화일지라도 대상이 너무 ‘재수 없게’ 묘사되면 묻어버린다.

    행복할 때 생산성이 가장 높다고 들었다. 그림을 그리는 이유는 아름다움을 기록하기 위해서라고. 여전히 그런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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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면의 아픔과 혼란을 예술로 표출하는 경우가 많다. 우울할 때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 어떤 게 더 좋은지는 모르겠다. 최근에 그린 것 중에 가장 아름다운 피사체는 무엇이었나?
    자연과 여성에게서 영감을 많이 받는다. 지난 주말엔 공원에 가서 여름날의 친구를 그렸다.

    고양이 스케치도 많다.
    맞다. 모로코를 여행할 때 고양이를 엄청 그렸다. 혹시 터키 영화 <케디>를 본 적 있나? 이스탄불에 사는 고양이 여섯 마리를 찍었는데, 이슬람 문화에서 고양이가 어떤 존재인지 알 수 있다. 문화 전체가 고양이를 돌보고 있다.

    어느 인터뷰에서 “지금은 스타 작가지만 다시 가난해질 거다”라고 했다. 그래픽 노블의 인기가 사그라들 거라고.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
    아직까진 그렇다. 부천국제만 화축제에서도 비슷한 농담을 했다. 행사에서 두 명이 캔디크러시 게임을 큰 화면에서 하고 있는데 구경꾼이 정말 많았다. 내가 그림을 그려주는 이벤트보다 사람이 더 많았다. 게임에는 적수가 안 된다.(웃음) 매년 세금을 낼 만큼의 로열티를 벌면 ‘올해도 살아남았구나’라는 심정이다.

    한국의 웹툰 작가들은 한 달에 수억씩 버는 경우도 있다.
    원래 연재를 해야 고료를 많이 벌긴 한다. 하지만 확실히 책 형태로 출판되는 것이 좋다. ‘올드패션’이다.(웃음)

    올드패션을 좋아하는 이유는?
    만지고, 느끼고, 냄새도 맡을 수 있는 종이가 좋다. 전기나 스크린 불빛 따위 필요 없이 볼 수 있는 책이 좋다. 음악과 비슷하다. 디지털화되면서 음악은 거의 공짜가 됐다. 하지만 다시 LP를 찾는 이들이 많아졌다. LP를 구입하고 포장을 뜯고 바늘을 조정해서 듣는 모든 절차가 맛깔스럽다.

    그래픽 노블 작가에게 가장 중요한 자질은 무엇일까?
    규칙적인 작업이라고 답하려는데 너무 고루해서 바꾸겠다. 내면의 어린아이를 꺼내야 한다. 어른이 되어서 하루 종일 만화만 그리면 스스로가 바보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어릴 때 즐겁게 만화를 그리던 때를 떠올리면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에디터
      김나랑
      포토그래퍼
      KIM YOUNG H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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