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aia Is The Wind
배우 송혜교가 자연이 베풀어준 근사한 은총 아래 섰다. 대지의 여신이 그 창조적 능력으로 황량한 대지를 풍성한 푸르름으로 뒤덮듯, 프레임 속으로 들어간 그녀는 빛나는 아름다움을 바람과 함께 노래했다.
송혜교만큼 이미지의 견고한 바벨탑을 무너뜨리려는 시도와 동시에 감히 아무나 쥘 수도 없는 이 거대한 특권을 온전히 만끽하는 여배우는 없을 것이다. 이름의 존재감은 목에 달린 다이아몬드처럼 유혹적이며 압도적이다. 이 양면성이 건강할 수 있는 건 칼 라거펠트와 파올로 로베르시의 뮤즈로 그의 카메라 앞에 서는 것과 신예 감독의 영화에 출연하기 위해 뉴욕으로 훌쩍 날아가는 것이 그녀에게는 같은 무게이기 때문이다. 송혜교가 할 수 있는 것이 많을수록, 사람들은 그녀에게 무언가를 기대한다. 그리고 송혜교는 그 기대를 배반하지 않으면서도 어쩌면 행운으로 치부될 수 있는 모든 걸 필연으로 만들어낸다. 일과 일상의 경계가 분명한 그녀가 그럴 리 없겠지만, 만약 송혜교 버전의 <여배우는 오늘도>라는 영화가 탄생한다면, 웃기고 눈물 나는 자기 풍자보다는 자기 한계를 인정할 때조차 당당한 솔직함과 그에 얽매이지 않는 의젓한 자유로움이 관전 포인트가 될 것이다. 판타지 세계에서도, 리얼리티에서도 송혜교는 송혜교다.
마침 우리는 요즘 여자 배우들이 활약할 수 있는 영화가 점차 사라지는 현 상황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나는 틸다 스윈튼이나 기네스 팰트로 같은 몇몇 이름난 배우들이 전 지구적 문제의식을 갖고 스스로가 보고싶은 여자들의 영화를 만드는 것처럼, 혹시 이런 시도를 해볼 생각이 없느냐고 그녀에게 물었다. “글쎄요, 아직까지는 용기가 나지 않아요. 물론 최근 개봉한 <여배우는 오늘도>의 제작과 감독, 출연까지 시도한 문소리 선배가 너무나 멋있고, 그래서 옆에서 조금이나마 힘이 되고 싶어요. 하지만 정작 저는 아직 엄두가 안 나요. 연기하는 것만으로도 많이 버겁고 어려워 그 부분까지는 아직 생각하지 못하는 것 같아요.” 일찌감치 세상의 질서와 비밀을 다 알아버린 소녀의 눈을 가진 그녀가 말한다.
이탈리아 제노바에서, 강남 스튜디오에서, 사진집 출간 기념회에서, 어느 카페에서, 지금껏 여러 번 송혜교를 만났다. 그녀는 언젠가 “관객으로서나 배우로서나 해피 엔딩은 싫다”고 했고, “20대 때 가장 잘한 것은 마음껏 사랑한 것”이라고 고백했으며, “30대 때는 되도록 부지런히 많은 작품에 출연하고 싶다”고 다짐했다. 한국에서 드라마를 찍든, 중국에서 영화를 찍든 언제 인터뷰를 해도 좋을 만큼 그녀를 둘러싼 이슈가 끊일 날이 없었지만, 언제나 한결같은 점이 있었다. 송혜교는 어떤 선택을 하든 명분보다는 본능을 따랐고, 자신이 할 수 있는 걸 했다. 될 만한 작품을 기어이 찾아내는 혜안을 발휘했다기보다는 오히려 자신이 참여함으로써 작품에 남다른 가치를 부여했다. 대중과 평단의 지지를 고루 받은 몇몇 작품에서 그 가치가 더 많은 이들과 공유되었을 뿐, 사실 송혜교의 필모그래피는 세상의 기준으로는 짐작할 수 없는 그녀만의 고집과 뚝심으로 완성된 것이다. 그래서일까, 흥행과는 상관없이 온전히 여성의 감수성으로 고통과 행복, 상처와 치유, 사랑과 일상을 이야기하던 송혜교의 여자들이 두고두고 기억에 남는다.
언젠가부터 송혜교는 장르와 언어, 국경과 시공간뿐 아니라 편견과 오해까지도 초월해버렸다. 그러므로 상대를 좌불안석하게 만들지도, 불쑥 다가서지도 않도록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는 건 그녀가 시대를 풍미하는 동안 터득한 최소한의 자기방어일 것이다. 그건, 노희경 작가의 표현대로 “예쁜 가운데 우울하고, 발랄한 가운데 쓸쓸하거나, 순수와 진지가 얼기설기 섞이고, 애달픈 가운데 쿨하고, 뜨거운 가운데 잔인하고, 잔인함과 이지가 뒤섞여 설레게 하거나, 도통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그래서 호기심을 멈출 수 없는 ‘배우’가, ‘여자’가, ‘인간’이 되어버린” 송혜교의 매력이기도 하다. 영화 <오늘>을 함께 작업한 이정향 감독은 현장에서 그런 송혜교의 무릎에 머리를 묻고 “우주가 날 버렸나 봐”라고 투정을 부렸고, 송혜교는 그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런 그녀를 과연 무엇이 더 성숙하게 만들 수 있을까?
“어릴 때부터 애늙은이라는 소릴 들었어요. 어머니와 살면서 가장 역할을 했기 때문에 말괄량이처럼 어리광 부려본 적이 없죠. 저도 모르게 더 어른스럽게 살았던 것 같아요. 그래서인지 제가 더 성숙해졌다는 생각은 안 들어요. 다만 일에서도, 삶에서도 여유가 생겼구나 해요. 20대 때는 어쩔 수 없이 또래 배우가 좋은 캐릭터를 연기하는 걸 보면 부럽기도 하고 샘도 났거든요. 요즘엔 그런 욕심이 사라졌어요. 그건 그녀의 것이기 때문에 간 거야. 내것이 아니면 자연스럽게 내려놓아요. 굳이 아닌 걸 하려는 생각도, 무언가를 억지로 막 해내려는 생각도 없어요.” 아무리 좋은 일도 짐작이 가능한 터라, 그때의 긴장도, 흥분도, 설렘도 없어졌다는 사실이 가끔은 슬프고 그립기도 하다지만 그것이 베테랑의 천형 같은 거라는 걸 그녀가 모를 리 없다.
운명은 늘 길모퉁이에서 기다리고 있었고, 송혜교는 우연이 아닌 선택으로 운명을 받아들였다. 지금도 여전히 그 길 위에 있는 송혜교의 발걸음은 길을 아는 자가 아니라 그저 걷는 자의 그것이다. 이를테면 최근 더욱 기승을 부리는 파파라치의 존재에 대해 “제가 나쁜 짓을 하고 다닐 리도 없잖아요”라며 무심할 수 있는 힘이다. 케이크를 보기만 한 게 아니라 맛본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자기 존재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다. “어쩔 수 없이 제게는 옆에서 보호해주는 사람도, 예쁘게 꾸며주는 사람도 있어요. 나이를 먹어도 누군가의 보호 아래에 있죠. 평범하게, 열심히 사는 제 친구들이 보기엔 철딱서니 없거나 세상 물정 모른다 싶을 때도 있을 거예요. 하지만 그 모든 건 제 직업이 배우이기에 어쩔 수 없는 것 같아요. 그런 면이 사라져서도 안 된다고 생각하고요. 감정을 움직이는 일을 하는 사람인 만큼 50대가 되어도 아이 같은 모습을 갖고 있어야 하지 않나 싶어요.”
내년 초에 선보일 사진집은 스스로를 존중하는 법을 아는 그녀가 ‘송혜교라는 세상’을 기억하는 방식이다. 지난 2011년 발간된 <Moment, Song Hye Kyo>에 이은 두 번째 사진집은 배우를 영생으로 이끌 감수성과 아름다움을 신실하게 기록할 것이다. “활동 20주년을 기념해 한국과 아시아의 팬분들을 위해 기획했어요. 하지만 무엇보다 사진집은 저를 위한 거예요. 앞으로도 전 제가 나이 들어가는 모습, 그렇기에 완전히 달라질 수밖에 없는 느낌을 기록해두고 싶어요. 동시대의 재능 있는 사진작가들이 바라보는 송혜교란 어떤 모습일까 궁금하기도 하고요.” 송혜교의 오랜 친구 피터 린드버그를 포함해 스톡홀름 출신의 카밀라 아크란스, 독일의 빈센트 피터스, 뉴욕의 딜런 포스버그, 중국의 펑하이 그리고 한국의 홍장현과 김영준이 한결 고즈넉하고 의연해진 30대 송혜교를 영원으로 박제하는 작업을 맡았다.
“무엇에 대해서든, 지금은 좋았던 때에 대한 좋은 감정만 남아 있어요. 내가 이런 사람과도(이를테면 왕가위 같은) 일도 해보고, 그런 시간을 보냈구나, 하는 것 자체가 기분 좋을 뿐이죠. 진짜 큰일이 아닌 다음에야 시간이 지나면 힘들었던 기억은 사라져요. 예전에 그렇게 미웠던 사람들도 별로 안 밉고, 그냥 다 잘 살았으면 좋겠다, 그러죠. 나도 잘 살고, 너도 잘 살고.(웃음)” 그런 송혜교에게 어떤 것이 잘 사는 건지 물었다. “나쁜 일, 큰일 없이 소소하게 순간순간 즐길 수 있는 것, 나쁜 일 겪지 않게끔 내 행동 똑바로 하고 사는 것. 슬픈 일, 즐거운 일 모두 공감할 수 있는 사랑하는 사람들과 한 식탁에 둘러앉을 수 있을 정도만 돼도 행복할 것 같아요.” 어느 현자의 말처럼, 이 세계는 매 순간순간 완성된 상태에 있다. 그리고 송혜교의 가까운 핑크빛 미래에 펼쳐질 순간이라는 시간은 더한 완결성을 갖추게 될 것이다.
“그저 물 흐르는 대로 왔어요. 주제가 좋아서든, 감독님이 좋아서든 제 마음을 순수하게, 크게 움직인 작품을 선택해왔듯, 굳이 인생을 계획하고 의도하진 않았지만 그렇게 살다 보니 현재의 이런 결과 앞에 제가 놓인 상황이에요.” 이윽고 당도한 어느 멋진 날, 송혜교는 LA의 말리부 랜치 한가운데 놓여 있었다. 4만 평에 이르는 광활한 땅을 안은 하늘에서는 가끔 야생 독수리가 날았고, 나뭇잎을 세차게 흔드는 바람 소리가 말 없는 음악이 되어 현재를 축하했다. 자신의 결정에 거침없이 샴페인 잔을 들어 올릴 수 있는 여자, 송혜교의 다시 오지 않을 시절이 그렇게 단단한 가을의 대지를 달구고 있었다.
- 패션 에디터
- 이지아, 남현지
- 피처 에디터
- 윤혜정
- 포토그래퍼
- HYEA W. KANG
- 스타일리스트
- 김현경
- 헤어 스타일리스트
- 이혜영
- 메이크업 아티스트
- 전미연
- 프로덕션
- 황정민(Cri1216 Produc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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