쿨하고 기특하다
지금 뉴욕 에이스 호텔에 위치한 카페 스텀프타운에서는 자연스럽게 K-팝이 흘러나온다.
싸이의 ‘강남 스타일’ 이후 정확하게 5년 만이었다. 2017년 12월 31일, 미국 공중파 방송의 새해맞이 쇼에서 다시 한국어가 들려왔다. 한 해 동안 최고 화제였던 뮤지션들이 공연을 하는 대형 무대에 방탄소년단이 등장했다. 뉴욕 거주자인 나는 2017년 하반기 동안 방탄소년단의 미국 침공을 실시간으로 목격할 수밖에 없었다. 아마존에서 독점 주문을 받은 그들의 새 앨범 <러브 유어셀프 承 ‘허’>는 9월에 판매가 시작되자마자 빌보드 앨범 차트 7위에 올랐다. 곧이어 첫 싱글곡 ‘DNA’가 빌보드 싱글 차트 67위로 데뷔했다. 11월 아메리칸 뮤직 어워즈 공연을 전후로 미국 주요 미디어에선 낯선 알파벳 조합인 BTS가 대체 무슨 의미이며 그들이 지금까지 어떤 기록을 세웠는지 설명하는 기사를 내보냈다. 그동안 방탄소년단은 ‘카풀 가라오케’로 유명한 <제임스 코든 쇼>에 등장해 게임을 하고, 10대에게 인기 많은 <엘렌 드제너러스 쇼>에 나와 한국어로 대화를 했다. <지미 키멜 라이브!>는 미니 콘서트를 기획하고 공연장 밖으로 끝도 없이 이어진 기나긴 소녀들의 행렬을 카메라에 담았다. 전 세계 소녀들을 사로잡은 방탄소년단의 인기를 표현하기 위해 상용구처럼 비틀스가 소환됐다. 인기 디제이인 스티브 아오키가 리믹스한 ‘MIC Drop’이 싱글 차트 28위를 기록하는 동안, 미국 곳곳의 라디오 방송국 진행자들은 동네 소녀들로부터 BTS 곡을 틀어달라는 요청이 쇄도한다는 경험담을 공유했다. 유튜브에서는 BTS의 뮤직비디오가 화제였고 그 옆에는 강도 높은 댄스 퍼포먼스에 놀라는 미국인의 반응 동영상이 부록처럼 붙어 있었다. 페이스북와 트위터상에서 세계 곳곳의 친구들까지 안무가 신기하다며 BTS 뮤직비디오를 공유하기 시작했다. 영어 팝을 비집고 한국어가 들려올 때마다 ‘난 누군가, 또 여긴 어딘가’ 하며 정신이 멍해졌다.
미국 지인들은 예상한 일이라며 메시지를 보냈다. 미네소타대학에서 아시아학을 강의하며 박사과정 중인 수현 재클린은 이미 몇 년 전부터 한국어를 공부하는 BTS 팬들을 목격해왔다고 말했다. 더불어 “시골 출신인 한 학생은 도시에 있는 대학으로 오는 걸 기념하기 위해 ‘이사’의 가사인 ‘이사 가자’의 한국어를 구글 검색한 뒤 문신으로 새겼다”는 흥미로운 에피소드를 전했다. 베스라는 이름의 그녀의 학생은 방탄소년단을 좋아하는 이유로 그들의 미디어 친화력을 들었다.
“SNS로 목격하게 된 프로페셔널하면서도 솔직하고 장난스러운 10대, 20대 남자들의 모습에 반해” BTS 팬인 아미(A.R.M.Y)가 된 친구였다.
뉴욕의 아시아 문화 전문 저널리스트이자 디바리뷰닷컴의 디바 벨레즈는 방탄소년단과 기존 K-팝 그룹의 차이점으로 창조적인 표현력과 공감대 중심의 소통능력을 지적했다. “BTS는 서양 시장에 진출하려는 노력 없이 자신들의 방식으로 경계를 넘어버린 그룹이다. 버블껌스러운 완벽함과 도피주의를 상징화하는 다른 한국 아이돌 그룹에 비해 느낌과 갈망을 솔직하고 정직하게 표현한다. 아름다움에 굶주린 서양인의 눈을 사로잡는 귀여운 외모와 패션도 갖췄지만, 그들의 진실함과 진정한 쿨함이 팬들과 연결 고리를 만들어냈다”는 게 BTS를 수년간 지켜본 그녀의 결론이다. 우리가 언제 뮤지션의 국적을 따지며 좋아했던가? 음악적 공감은 언제나 언어를 초월했다. 돌려 말하면, 방탄소년단의 미국 침공은 현재 미국 팝계에 10대, 특히 소녀들이 공감할 만한 스타가 부재하다는 증거다. 방탄소년단이 세계 팬들의 리트윗과 라이크 횟수로 기네스 기록을 바꾸던 몇 년간, 북미의 국민 오빠였던 저스틴 비버는 경찰서를 드나들며 문제 청년으로 변했고 (지금은 기사회생하여 차트를 휩쓸고 있다) 거대 팬클럽 ‘디렉셔너’를 거느렸던 영국 보이 밴드 원 디렉션은 해체됐다. 여자 뮤지션 쪽에서는 아리아나 그란데와 피프스 하모니가 열심이지만 한창때의 레이디 가가나 케이티 페리에 비하면 재미가 없다. 테일러 스위프트, 리한나, 드레이크, 에드 시런, 위켄드, 켄드릭 라마 등 대중 가수는 10대 한정이 아니다. 밝고 재미있으면서 10대의 간절한 마음을 포착해주는 눈높이의 팝 음악이 부재한 틈을 K-팝이 파고들었다. 방탄소년단으로 K-팝에 입문한 이들은 생각보다 넘쳐나는 콘텐츠에 압도당하며 장르 탐험에 나섰다. 덕분에 K-팝 팬덤은 다시 지각변동을 겪고 있다.
K-팝 뮤직비디오는 하나같이 청춘의 에너지와 싱그러움을 댄스 음악 속에 진공포장한다. 유튜브에서는 친근한 미소를 날리는 예쁘고 멋진 아이들이 가득한 고품질의 뮤직비디오가 끝도 없이 스트리밍된다. 10대 아이들은 유튜브를 켜고 명랑하고 유쾌한 K-팝의 세계를 가로지른다. 덕분에 BTS를 비롯해 엑소, 위너, 트와이스, 레드벨벳, 블랙핑크 등 한국에서도 핫한 그룹들의 뮤직비디오 스트리밍 횟수는 나날이 증가한다. 싸이 이전까지 K-팝은 장르의 규칙을 탐색하기 좋아하는 마니아층의 하위문화였지만 이제는 쿨하고 재미있는 콘텐츠와 퍼포먼스 중심의 팝에 열광하는 어린 유튜브 유저들이 일상적으로 즐기는 인기 카테고리가 되었다.
10대들에게 쿨한 K-팝은 때때로 감식안 좋은 음악 리스너들의 주목을 끈다. K-팝의 사운드 공식을 만드는 창작자들은 세계의 음악 트렌드를 배양하는 음악 공학자에 가깝다. K-팝은 힙합과 알앤비, 발라드를 기본으로 하되 일렉트로닉 댄스 뮤직(EDM)이 사운드의 중심을 잡는 음악이다. EDM 팝에 강한 스웨덴 작곡가들과의 콜라보레이션도 빈번하다. 조심스럽게 트렌드에 접근하는 영어권 스타들에 비해 K-팝 쪽은 실험을 마다하지 않아 이제 막 떠오르는 EDM 비트의 한마당이 되곤 한다. 발견에 민감한 음악 사이트 ‘피치포크(Pitchfork)’가 괜히 K-팝 리뷰 섹션을 따로 만든 게 아니다. 힙한 리스너들은 BTS, 엑소, 레드벨벳, 블랙핑크, NCT 127, KARD, 루나 곡에 숨은 신선한 사운드를 귀신같이 찾아내어 또 유튜브 스트리밍 수를 높인다.
언젠가 뉴욕 힙스터 플레이스로 유명한 에이스 호텔의 ‘스텀프타운’ 카페에 갔다가 자연스레 흘러나오는 엑소 노래에 놀라 커피를 쏟을 뻔했다. 한국어로 노래를 불러도 세계적인 대중음악이 될 수 있다니. K-팝이 힙의 영역이 되었음을 감지한, 개인적으로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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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디터
- 김나랑
- 글쓴이
- 홍수경 (칼럼리스트)
- 일러스트레이터
- 조성흠
- 이미지
- GETTYIMAGE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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