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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Kay

2018.02.05

Special Kay

워터게이트 스캔들의 폭로자이자 〈워싱턴 포스트〉의 전설적인 여성 리더 캐서린 그레이엄. 스티븐 스필버그가 그녀를 영화 〈더 포스트〉로 조명했다. 메릴 스트립은 역시나 완벽하게 역사 속 인물을 현실로 끌어냈다. 실제 캐서린 그레이엄과 친했던 필자가 숨겨진 얘기를 들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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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미국에선 신문 전쟁이 한창이다. 워터게이트 스캔들 이후 본 적 없는 치열한 전쟁이다. <뉴욕 타임스>의 피터 베이커(Peter Baker), 매기 하버맨(Maggie Haberman), 글렌 트러시(Glenn Thrush), 그리고 <워싱턴 포스트>의 그렉 밀러(Greg Miller), 필립 루커(Philip Rucker), 애덤 엔투스(Adam Entous)-가장 맹렬한 기자 중 몇 명-는 스트로크를 주고받는 테니스 챔피언들처럼 궁지에 몰린 트럼프에 대한 특종 기사를 번갈아 쓰고 있다. “20세기 말에 그랬던 것처럼 지금 <뉴욕 타임스>와 <워싱턴 포스트>는 아주 잘하고 있어요. 두 신문은 캐서린 그레이엄(Katharine Graham)의 용기와 전례를 따르고 있습니다”라고 칼 번스타인(Carl Bernstein)은 말한다. 그는 70년대 초 밥 우드워드(Bob Woodward)와 함께 <워싱턴 포스트>에 워터게이트 기사를 터트린 인물이다.

2001년에 세상을 떠난 <워싱턴 포스트>의 전설적인 발행인이자 사주였던 그레이엄이 지금 이 광경을 목격한다면 아마 똥줄이 탈 것이다. 정말 그렇게 표현했을 것이다. <포춘> 선정 500 CEO 리스트에 이름을 올린 최초의 여성이자 워싱턴 사교계의 중진인 그레이엄 여사는 비속어로 충격을 주곤 했다. 그녀가 정확한 악센트로 욕하는 걸 들으면 짜릿하다. 그레이엄은 자신에게 숨 막히는 케냐의 마사이 마라 지역을 보여주기 위해 열기구를 준비하느라 고군분투한 <워싱턴 포스트> 특파원을 꾸짖으며 이렇게 말했다. “우라질, 여행객이 되려고 그 먼 길을 오지 않았어.”

그레이엄이 닉슨의 대통령 임기를 끝나게 만든 지 44년이 지난 지금, 그녀는 마침내 의당 받아야 할 대우를 받았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 <더 포스트(The Post)>에서 메릴 스트립이 그녀의 역을 맡았다. 영화가 개봉하면 그레이엄은 결정적인 순간에 언론의 자유와 헌법을 위해 올바른 일을 한 여성으로 알려지게 될 것이다. 당연한 사실이다. 하지만 사건이 일어날 당시엔 편집장인 벤 브래들리(Ben Bradlee)에게 영광이 돌아갔다. 그리고 번스타인과 우드워드의 이야기를 다룬 알란 파큘라(Alan Pakula) 감독의 1976년 작 <모두가 대통령의 사람들(All the President’s Men)>은 그녀를 거의 역사에서 지워버린 마초 영화였다.
메릴 스트립과 톰 행크스(브래들리 역)를 처음으로 함께 기용한 스필버그가 강조하는 점은 다르다. 이 프로젝트가 자신을 선택했다고 한다.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도 그중 하나였어요. 그레이엄은 메이저 신문사의 첫 여성 발행인이 됨으로써 전 세계 여성에게 새로운 기준을 제시했어요. 그리고 엄청난 압력 속에서도 방관자가 되지 않은 그녀 세대 최초의 인물이었습니다.”

내가 20년간 알고 지낸 그레이엄은 막다른 위기 상황을 좋아했다. 외모, 매너, 오스카 드 라 렌타의 의상(해변에서도) 등 늘 흠잡을 데 없는 모습이었지만, 아버지 유진 메이어(Eugene Meyer)처럼 도박가 기질이 있었다. 아버지는 하급 증권 중개인으로 시작해 엄청난 부자가 되었고 1933년에 파산한 <워싱턴 포스트>를 헐값에 매입했다. 다섯 자녀 중 넷째였던 똑똑하고 야심 넘치는 캐서린은 아버지의 총애를 받았다. 그녀 역시 신문 사업에 매료되었다. 시카고대학교를 졸업한 후 그녀는 샌프란시스코에서 기자로 일했다. 그녀는 키가 크고, 상당히 볼품없었으며, 차갑고, 자기 자신에게만 관심이 있던 어머니 때문에 의기소침해 있었다. 아무도 캐서린 메이어 앞에 화려한 삶이 펼쳐질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가난하지만 눈부실 정도로 카리스마 넘치는 대법원 서기였던 필립 그레이엄(Philip Graham)은 그녀와 두 번의 식사를 한 후 청혼했다. 남편이 <워싱턴 포스트>의 운영을 맡고 캐서린은 네 아이를 낳았다. 그러나 필립은 조울증 때문에 위험할 정도로 불안정해져 결혼 생활은 힘들었다. 그는 다른 사람들 앞에서 캐서린을 비하하고 바람을 피웠다. 1963년 어느 날 그는 정신병원에 있다 집으로 돌아왔고 낮잠을 잔 후 엽총으로 자살했다. 그녀는 시골집 아래층 욕실에서 피를 흘리고 있는 축 처진 남편의 시신을 발견했다.
46세의 캐서린 메이어 그레이엄은 자신이 유일하게 사랑했던 남자의 폭력적인 죽음으로 휘청거렸고 20년간의 결혼 생활로 위축돼 있었다. 더군다나 아버지에게 구조되고 남편에 의해 진지한 신문으로 탈바꿈한 <워싱턴 포스트>가 최근 몇 년 동안 금전적으로 쪼들리고 있음을 알게 됐다. 그녀는 모험을 감행했고 두 번째 사랑에 빠졌다. 이번엔 남자가 아닌 일과.

당시 <시카고 선타임스>의 워싱턴 통신원이었던 짐 호지(Jim Hoge)는 이렇게 회상한다. “그녀는 책임감 때문에 겁을 먹었습니다. 물론 주변 남자들은 용기를 주지 않았어요.” 그러나 그녀는 타고난 근성으로 임시 후견인 역할을 뛰어넘었다. 그녀는 사업, 경영, 신문 편집에 관한 모든 것을 배워야 했지만 즐겼다. 그녀가 점심 식사에 초대한 첫 남자는 <뉴스위크>의 워싱턴 지국장인 벤 브래들리였다. 그녀는 그를 고용했고 현대 저널리즘에서 가장 역동적이고 중요한 파트너십을 구축했다. 그레이엄은 때론 막강한 칼럼니스트와 기자들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헨리 키신저에 대한 당신의 형편없는 기사에 신물이 나”라고 칼럼니스트인 리처드 코헨을 질책한 적 있다. “제 몸에서 피가 다 빠져나가는 것 같았어요”라고 코헨은 회상한다. “물론 그녀는 어떤 기사를 쓰면 안 된다는 얘기를 한 적도 없죠.” 그레이엄은 머지않아 <워싱턴 포스트>를 위대한 신문으로 만들었다. 1966년 뉴욕의 플라자 호텔에서 트루먼 카포티는 그레이엄을 위해 유명한 ‘블랙 앤 화이트’ 무도회를 열었다. 이는 한때 시대에 뒤떨어진 과부였지만 현재는 인생 2막을 대담하게 즐기는 여성이라는 페르소나를 그레이엄에게 부여했다.

Washington, DC: Washington Post publisher Katharine Graham discusses Watergate developments with reporters Carl Bernstein, left, and Bob Woodward in the Post newsroom.  April 30, 1973 4 ©Mark Godfrey  / The Image Works

Washington, DC: Washington Post publisher Katharine Graham discusses Watergate developments with reporters Carl Bernstein, left, and Bob Woodward in the Post newsroom. April 30, 1973 4 ©Mark Godfrey / The Image Works

1971년 그녀는 유출된 국방부 서류(미국 정부의 베트남 비밀 거래를 폭로한)를 법원 명령을 어기고 자신의 신문에 싣기로 결정했다. 어쩌다 보니 그 일은 <워싱턴 포스트>가 주식을 상장한 그 주에 일어났다. 과연 그들이 그레이엄을 지지할지 불분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결정을 내렸다. 그 과정에서 두 가지에 집중했다. 하나는 자신의 모두를 걸어 이 가족 신문사의 수호자가 될 것. 그녀는 신문사 사주 이상이 되고 싶었다. 둘째 그녀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브래들리를 잃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기사를 싣지 않는 건 그를 배반하는 행위였다.

스필버그는 이렇게 말한다. “캐서린 그레이엄과 벤 브래들리가 오래전에 했던 그 일은 지금도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그 행위는 여러 가지 면에서 현대 저널리즘의 정의를 규정했어요.” 캐서린 그레이엄, <워싱턴 포스트>, 미국 언론의 자유가 바뀌었다(대법원은 결국 그녀의 결정을 옹호했다). 그레이엄은 정부의 운용 방식을 공개해 국민의 점검을 받도록 하는 언론의 권리와 의무를 지켜냈다.

그 과정에서 그녀는 유명 인사가 되었다. 후에 그녀는 유명세에 대해 “얼굴이 화끈거리면서도 자존심을 충족시켜주었다”고 썼다. 당연히 그렇지 않겠는가? 1년 후인 1972년 6월, 다섯 명의 남자가 워터게이트 호텔에 있는 민주당 전국 위원회 본부에 침입하다 체포되었다. 브래들리가 이끄는 두 명의 젊은 기자 우드워드와 번스타인은 닉슨 선거 운동 캠프가 개입되었다는 정보를 입수한다. 이 과정에서 그레이엄은 그들을 지원했다. 정부로부터 협박과 위협을 받았지만 말이다. 번스타인은 닉슨의 선거 본부장인 존 미첼이 노골적으로 이렇게 경고했다고 전했다. 닉슨이 헌법을 위배한 증거를 신문에 싣겠다고 고집을 부리면 “캐서린 그레이엄의 젖꼭지를 비틀어버리겠다”고 한 것이다. 그녀는 물론 기사를 실었다. “내게 온 메시지가 또 있어?” 그레이엄 여사는 미첼의 경고가 있은 다음 날 번스타인에게 장난스럽게 물었다. 그녀는 또한 법원 명령을 어겼다는 이유로 누군가 감옥에 가야 한다면 자신이 가겠다고 공표했다. “캐서린 그레이엄-그녀의 배짱에 신의 축복이 있기를-은 자기 앞에서 거들먹거리던 기존 발행인들과 사주들에게 최후의 승리를 거두었다”라고 2014년 세상을 떠난 벤 브래들리는 자신의 1995년 회고록인 에 썼다.

1980년대에 내가 그레이엄을 만났을 무렵 그녀는 영향력 있는 여성 중 단연 최고였다. 그녀의 70번째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동서부의 유명 인사들이 워싱턴 콘스티튜션 애비뉴의 멜론 오디토리엄에 모였다. 그곳에는 그녀의 기념비적인 사진이 걸려 있었다.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카사블랑카>에서 보거트가 연기한 릭의 대사 “당신의 눈동자에 건배” 제의를 하며 술잔을 들었다. 물방울무늬 의상을 입은 그레이엄은 환하게 웃었다.

그녀가 무서워 보일 수 있지만 실제로는 기운이 넘치는 사람이다. 그녀는 친구들과의 파티, 여행을 좋아했다. 10대들의 브런치처럼 그녀는 절친한 폴리 프리치(Polly Fritchey), 폴리 크래프트(Polly Kraft)와 전화로 몇 시간씩 수다를 떨며 가십을 교환했다. <워싱턴 포스트>의 사설 담당 에디터인 멕 그린필드-그레이엄이 가장 좋아하던 여행 동반자-와 함께라면 어떤 여행도 좋아했다.

90년대 초에 내가 언론인 보호 위원회(언론의 자유를 위한 비영리 옹호 단체) 의장이 되었을 때 그레이엄은 우리 이사회에 합류했다. 그 결정을 공표하기 위해 조지타운에 있는 그녀의 집에서 파티를 열었다. 손님이었던 나는 위층 손님용 욕실 문을 열어놓은 채 화장을 하고 있었는데 그녀가 살짝 안을 들여다보더니 말을 걸었다. 구식 욕조 구석에 걸터앉은 그녀는 전혀 고고한 귀부인처럼 보이지 않았다. 40대 초반에 네 아이를 둔 나는 최근 남편과 이혼한 상태였다. 그녀는 이런 내 상황에 대해 공감하며 진심 어린 관심을 보여주었다. 결혼에 배신당해봤던 그레이엄은 타인의 고통에 마음을 활짝 열어두었다.
그래서 2년 후에 그녀의 솔직하고 지독하게 인간적인 회고록 를 보고 놀라지 않았다. 하지만 남자들은 사랑했던 남자 때문에 불안과 공개적인 모욕을 당한 그녀의 신랄한 묘사에 깜짝 놀랐다. “그런 걸 쓰다니, 정말 힘들었겠어요”라고 코헨은 그녀에게 말했다. “전혀”라고 그녀는 대답했다. “그냥 자판을 두드리기 시작했을 뿐이에요.” 80세의 그레이엄은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2013년 가족들은 <워싱턴 포스트>를 제프 베조스(그는 뛰어난 관리자다)에게 팔았다. 그러나 여전히 그레이엄을 기리는 파티가 열린다. 올해는 이방카 트럼프 부부, 켈리안 콘웨이(Kellyanne Conway, 백악관 고문), 윌버 로스(Wilbur Ross, 미국 상무장관)가 참석했다. 그레이엄의 딸 랠리는 건배를 하며 “엄마는 양당 사람들을 모두 환대하셨어요. 오늘 밤 역시 그렇습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음식을 던지지 않을 거예요”라고 말했다. 그리고 스티븐 스필버그에게 아방카 부부를 소개했다. 다들 완벽하게 행동했다.

영화 <더 포스트>의 촬영이 시작되기 전에 메릴 스트립과 얘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그녀는 그레이엄이 직접 녹음한 회고록을 이제 막 다 들었다고 말했다. “그녀의 에너지, 마음, 우아함, 유머, 겸손함에 반했어요. 요즘 보기 드문 자질이지요!”
브루클린 스튜디오에서 촬영을 하던 어느 날 그레이엄으로 분한 스트립을 지켜보던 리처드 코헨-그레이엄과 친했던 칼럼니스트-은 넋을 잃었다. “얼마나 그레이엄과 똑같은지, 메릴에게 가서 월급을 올려달라고 했어요”라고 그는 말한다. “메릴은 꿈도 꾸지 말라더군요. 그레이엄 여사도 분명 그랬을 거예요.”

    에디터
    김나랑
    포토그래퍼
    ANNIE LEIBOVITZ
    글쓴이
    KATI MART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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