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가인, 비밀의 커튼을 열다
미(美)라는 거름망을 통과한 무결점 그대로의 그녀가 드라마 〈미스트리스〉방영을 앞두고 새 카드를 꺼냈다. 우리가 미처 예상치 못한 강력한 존재로서의 입체적 한가인.
<미스트리스>는 비밀을 가진 네 여자와 그들에 얽힌 남자들의 뒤틀린 관계, 그들이 지닌 심리적인 불안감을 다룬 미스터리 관능 스릴러다. 장르물에 강한 OCN이 어렵게 해외 판권을 구입해마음먹고 내놓는 여자들의 이야기. 평범한 카페 주인과 정신과 의사, 교사, 로펌 사무장 등 각기 다른 직업과 상황에 놓인 여자 네 명이 일련의 살인 사건에 휘말리는 과정을 그린다. 흥미로운 소재와 사건 배경 이외에 이 드라마가 궁금해지는 또 한 가지는 여자로서의 여정에만 충실하던 ‘한가인’이라는 배우를 카메라 안으로 끌어냈다는 점이다. 그것도 드라마 <해를 품은 달> 이후 무려 6년 만에.
“저도 기사를 보고 깜짝 놀랐어요. 그렇게까지 오랫동안 카메라를 떠나 있었는지 느끼지 못할 만큼 저에게는 하루하루가 전쟁 같은 날이었거든요. 출산하고, 아이를 키우는 일이 모든 것에 우선하다 보니, 제 개인적인 욕심을 떠올릴 만한 여유가 없었어요. 그렇지만 6년은 조금 길었네요.(웃음)”
우리가 놓친 6년의 시간 동안, 정작 그녀는 ‘아내’와 ‘엄마’라는 두 가지 타이틀을 지켜내느라 한창 바쁘게 활동하던 시절보다도 몇 배속으로 빠르게 시간을 흘려보냈다.
돌이켜보면 한가인은 늘 독보적으로 자신만의 길을 열어왔다.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로 ‘수지’보다 앞서 국민 첫사랑의 아이콘으로 떠올랐지만 이른 결혼을 알리며 이슈의 중심에 섰고, 드라마 <해를 품은 달>로 시청률 퀸으로 등극한 후엔 내로라하는 작품을 마다하고 출산을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최고일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놓아버리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알기에 그녀의 조금 다른 행보는 또래 여배우에게 좋은 예시가 되지만, 배우 한가인을 논한다면 그건 분명한 아쉬움으로 남는다. “인생에서 몇 안 되는 중요한 이슈를 저는 좀 일찍 시작했어요. 하지만 그런 것으로 인해 배우로서 행보가 더뎌지거나 제가 머뭇거린 적은 없는 것 같아요. 좋은 작품을 만났고, 인연이 닿지 않은 아쉬운 작품도 있었지만 그때는 몰아치는 스케줄을 욕심껏 받아낼 만큼 체력적인 에너지가 준비되지 않았죠. 어릴 때부터 그랬어요. 한 가지에 몰입해서 몸과 마음을 쏟아부으려면 그 시간보다 더 긴 준비 기간이 필요할 정도로 체력적인 약점이 있어요, 제가.(웃음)” 어쩌면 아이를 낳아 키우는 지금이 체력적으로는 완성기에 접어들었다고 할 수 있을 만큼 ‘엄마’라는 단어가 품고 있는 초인적인 힘을 꽤 많이 비축해놓은 상태. 골칫덩이 알레르기가 말끔히 해결된 셈이다.
스스로를 ‘옛날 사람’이라고 칭할 만큼 모든 것이 새로운 요즘이다. 카메라 워킹도, 여배우에겐 생명과도 같은 조명의 섬세한 스킬도 모두 놀랍기만 하다. 아주 길게 공란으로 비워두었던 배우라는 직함에 적응하기 위해 그녀가 꺼내 든 건 ‘굿 리스너’의 자세. 달라진 작업 환경과 몇 번씩 자리바꿈을 반복한 트렌드를 한 번에 익히진 못하더라도 함께 움직이는 배우와 스태프들의 이야기에 귀를 열어 낙차 없이 의견을 받아들인다. 하나를 내주고, 하나를 받는 방식이 아닌 먼저 나의 패를 오픈하고, 상대의 진동을 가감 없이 수용하는 것. ‘아름다움’ 못지않게 한가인의 곁을 지키는 스‘ 마트함’이라는 키워드가 솟아나는 요즘이다. 오늘 <보그> 카메라를 밀고 당기는 중심에도 익숙함에 치우치지 않으려는 나름의 균형감이 엿보였다. 기존 한가인의 이미지를 전복시킬 만큼의 파격적인 스타일링에 ‘왜’라는 질문 대신 완성된 포즈로 정답을 던져오는 사람. 셔터 소리에 리듬감을 새겨 넣으며, 위시 리스트에 올려두었던 ‘조금 다른 나’를 꺼내 든다.
“솔직히 오늘 화보 촬영은 여러모로 강도가 센 촬영이었지만, 감정을 변주해내야 하는 배우에게 한 번쯤은 기존 이미지를 흔들어놓을 타이밍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살면서 느낀 건데, 길을 잃어봐야 자신만의 지도를 그릴 수 있는 것 같아요. 오늘은 익숙함과 새로움 사이에서 고민하는 저를 실험할 수 있는 좋은 시도였어요.”
비주얼에 대한 흥미가 돋을 때마다 그녀와 작업했다. 그때마다 한가인은 언제나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고 있었고 모든 것에 해박한 지식을 두른 그녀의 스마트함은 인터뷰 내내 빛났다. 하고 싶은 것과 해야 할 것에 대해 늘 즐거운 긴장감을 유지하고 있는, 이른 결혼이라는 의외의 변수도 이런 그녀의 성향 덕분인지 한가인에겐 언제나 예외였다. 아쉬운 작품 수에 비해 자신만의 독보적인 캐릭터를 지닌, 결혼과 별개로 ‘한가인’ 자체로 존재감이 유지되는 몇 안 되는 여배우. 출산 후 처음으로 마주한 오늘, 그녀는 많이 달라진 모습이다. 여배우로서의 긴장에서 해제되지 않은 예민함이 머물던 자리엔 느긋함이 옮겨 앉았고, 시간이라는 재료를 통해 자신이 이루어낸 경험을 밑거름 삼아 우리가 놓친 공백을 자신만의 방법으로 메워나가는 중이다. 짐작하건대 이 모든 것의 중심엔 24개월 된 그녀의 딸이 있다. 관계에 대한 폭을 넓혀주고, 인생에 대한 가치관을 바꾸어놓은, 절대적 존재로서의 또 다른 ‘나’로 표현되는. 자신과 꼭 닮은 누군가의 인격 형성에 도움이 되기 위해, 예민함을 내려두고 성숙해지는 과정을 담아내는 중이다. “모든 게 바뀌었어요. 말로 표현하기 좀 어려운 지점이 있는데, 저를 지배하는 감정의 중심이 제가 아닌 아이가 되어버린 것 같아요. 예전에 일할 때를 생각해보면 날이 설 때도 있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사람이든 상황이든 준비될 때까지 기다려주게돼요. 저를 두르고 있던 단단한 껍데기가 와장창 깨져버린 거죠.”
좋아하던 탄츠플레이도 그만두고, 욕심내던 가방 컬렉션도 멈춘 지 오래다. 캐시미어 니트 대신, 간단한 티셔츠와 워킹에 편한 운동화를 먼저 챙기는. 패션에 대한 해박한 지식으로 놀라게 하던 스타일리시했던 한가인은 당분간 자신의 관심사를 접어두고, 엄마의 역할에만 흡수될 모양이다. “유일하게 부리는 사치가 뭐가 있을까요… 틈틈이 언어를 공부하는 게 전부인 것
같은데요. 아, 아이가 일찍 잠든 날 남편과 함께 좋아하는 영화를 보는 거. 최근에 <코코>를 봤는데 정말 좋았어요. 원래도 편안하고 따뜻한 영화를 좋아하는데, 앞으로는 스토리나 메시지가 있는 가족적인 영화로 점점 더 취향이 옮겨갈 것 같아요.”
아이 얘기로 느리게 박자를 타던 그녀에게 은근슬쩍 <미스트리스>의 ‘세연’을 물었다. 솜사탕을 문 듯 달콤하던 표정이 순간 단단하게 짙어졌다. 본업인 ‘연기’ 얘기에 특유의 욕심과 책임감이 떠오른 모양새다. “출산을 하지 않았다면, 아마 이 역할은 하지 못했을 거예요. 모든 연기자가 진정성을 담기 위해 노력하지만, 카메라 안과 밖엔 분명한 온도 차가 있죠. 촬영 내내 수평을 유지해야 하는 감정선의 걸림돌은 언제나 그 괴리감에서 시작되고요. 그런 면에서 딸을 키우는 엄마로서, 아내로서의 제가 ‘세연’이 처한 일련의 상황을 거부감 없이 잘 풀어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미스터리 스릴러라는 장르물은 처음이지만, 결이 좋은 감독과 동료 배우들의 에너지 덕분에 현장이 즐겁다. 연기에 비법은 없다. 6년의 휴식기를 가졌다고 해서 배우로서 그녀가 간직하고 있던 알맹이가 변한 것은 아니다. 지금 그녀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화려한 테크닉이 아닌 진심의 질량으로 가득 찬 마음가짐이다. 그동안의 인생에서 쌓아 올린 경험으로 발효되고 숙성된 진심을 카메라라는 매개체를 통해 전달하고 싶은.
인터뷰를 마치고 스튜디오를 나서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흰 티셔츠에 청바지로 갈아입고, 머리를 질끈 동여맨 여배우. 슬쩍 고개돌려 미소로 다음을 기약하는 그 짧은 순간에도 한가인은 여전히 예쁘다. 누군가의 엄마로 충실한 동안에도 부디 우리가 잊지 않을 만큼은 여배우 한가인으로 마주할 수 있기를, 자신의 연기에서 주도권을 잃지 않기를.
- 포토그래퍼
- YEONGJUN KIM
- 컨트리뷰팅 에디터
- 김민경
- 스타일리스트
- 남주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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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탄(Void 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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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트 스타일리스트
- 한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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