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상하고도 아름다운 패션계 ‘프릭’ 이야기
기괴하고 전위적인 생물체가 패션 무대에 출현했다. 괴상하고도 아름다운 패션계 ‘프릭’ 이야기.
요정처럼 아름다운 모델들이 환상의 마법 가루를 뿌리던 런웨이 무대에 흉측한 괴물들이 등장했다. 구찌 2018 F/W 패션쇼는 기괴한 SF 판타지 동화 같았다. 핏기 없이 창백한 피부의 모델들은 핸드백 대신 자신과 꼭 닮은 인간의 머리통을 들고 워킹을 했고, 이마와 손등엔 제3의 눈이 달려 있었다. 머리에 뿔을 달거나 어린 용, 카멜레온, 뱀 등 괴상한 생물을 품에 안고 등장하기도 했다. 구찌의 수장 알레산드로 미켈레가 창조한 새로운 크리처들이다. ‘Ugly Chic’를 외치던 패션계가 급기야 괴물과 사랑에 빠진 걸까?
패션계뿐만이 아니다. 2018 아카데미 시상식의 슈퍼스타는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이 자신의 사비까지 털어가며 3년 넘게 디자인에 공을 들였다는 괴생명체를 내세운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이었다. <미녀와 야수>나 <개구리 왕자> 같은 옛날 동화를 제외하고 지금껏 몬스터가 로맨스의 주인공이 되는 경우는 없었다. 냉전 시대, 미 항공우주연구센터의 비밀 실험실에서 청소부로 일하는 언어장애를 지닌 여성과 양서류 인간의 운명적 사랑을 담은 이 영화는 세상의 모든 비주류를 위한 찬가다. 두 주인공뿐 아니라 조력자들 역시 당시 사회에서 소외당한 게이 화가, 흑인 여성 청소부, 유대인 의사다. 이들은 재투성이 아가씨의 호박마차를 끌던 생쥐와 도마뱀처럼 백인 남성 우익 집단에 맞서 양서류 인간의 탈출을 돕는다. 새로운 차원의 이종 결합을 암시하는 <셰이프 오브 워터>는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 감독상, 음악상, 미술상을 휩쓸었다.
만약 인어 왕자가 실존했다면 그의 이야기가 영화처럼 해피 엔딩으로 끝나긴 힘들었을 것이다. 판타지는 비극을 먹고 자라고, 현실은 늘 어떤 호러 영화보다 잔인한 법. 한때 미국과 유럽에서는 ‘Freak Show’가 유행했다. 쇼 비즈니스의 창시자 P.T. 바넘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 <위대한 쇼맨>에서도 볼 수 있는 이 ‘괴물들의 서커스’는 기형적 외모의 사람들을 구경거리로 내세웠다. 다발성 신경섬유종증으로 코끼리처럼 울퉁불퉁해진 엘리펀트 맨, 발가락과 손가락이 집게발처럼 벌어진 랍스터 보이, 네 발로 걷는 낙타 소녀, 남성과 여성의 성기를 모두 가진 인터섹슈얼, 수염 난 여자, 거인과 소인… 온몸에 문신을 새기거나 피어싱을 잔뜩 한 사람도 전시 대상이었다.
이러한 프릭 쇼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17세기 잉글랜드의 샴쌍둥이 형제를 찰스 1세 앞에 전시했다는 기록 정도가 남아 있을 뿐이다. 어쨌든 프릭 쇼는 꽤 오랜 시간 귀족들 사이에서 인기를 끌었고 20세기 중반까지 전 세계를 순회했다. 유색인종과 여성에 대한 차별이 만연하던 야만의 시절이었다. 나와 다른 것에 대한 공포는 폭력과 조롱으로 이어졌고, 주류에서 벗어난 이들은 동물원의 원숭이처럼 철창 속에 갇힌 채 인권을 유린당했다.
최근 몇몇 패션쇼는 표면상 과거의 프릭 쇼를 연상시킨다. 물론 그 의미는 180도 다르다. 오늘날의 패션 프릭 쇼는 ‘다름’을 인정하는 것을 넘어 숭배한다. 비주류에 대한 광적인 호감 역시 차별의 일종인 셈이지만 패션의 관점에서 보자면 프릭은 인간의 외형이라는 낡은 외투를 벗어던진 미래적 패셔니스타다. 패션 디자이너들이 고안해낸 이 무섭도록 아름다운 크리처들은 젠더를 넘나들고 전통적인 미추의 기준을 가볍게 무시한다. 과거 문명으로부터 추방당해 북극까지 쫓겨간 프랑켄슈타인 박사의 저주받은 괴물과 달리 이들은 화려한 런웨이 무대 위에 우뚝 서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다. 무엇보다 과거와 다른 건 이 새로운 생명체를 만든 창조자 자체가 괴짜로 소문난 프릭이라는 사실이다.
고딕 시크, 다크 웨어의 대명사 릭 오웬스를 보라. 왠지 슬퍼 보이는 긴 얼굴에 긴 생머리를 늘어뜨린 근육질의 아방가르드 디자이너. 지난 3월 25일까지 트리엔날레 밀라노 디자인 뮤지엄에서 열린 그의 첫 번째 회고전 <릭 오웬스: 하등인, 비인간, 초인(Rick Owens: Subhuman Inhuman Superhuman)>의 주제는 ‘미의 기준’이었다. 제목 그대로 온갖 기묘한 인간의 형상을 패션화한 이번 아카이브 전시에서는 아드리아 해변의 모래와 콘크리트, 백합꽃, 머리카락으로 만든 거대한 토공이 천장에 매달렸다. “세상이 무시하고 조롱하는 것을 받아들이고, 공감하며 포용할 수 있는 무언가를 창조해내고 싶었다”는 릭 오웬스는 혐오와 경외의 대상을 하나로 융합했다.
서구 중심 패션계에서 영원한 이방인에 속하는 레이 가와쿠보는 2018 꼼데가르송 남성복 컬렉션에서 공룡 혹은 거인의 해골 같은 헤드피스를 천으로 만들어 모델들의 얼굴에 뒤집어씌웠다. 영국 펑크족 할머니 비비안 웨스트우드의 패션쇼에서는 온몸에 낙서를 새긴 모델들이 얼룩진 화장을 하고 광대짓을 벌였다. 덥수룩한 수염과 헝클어진 단발머리가 트레이드마크인 미켈레는 자신의 성 정체성에 대한 오랜 고민을 고색창연한 젠더리스 룩으로 완성한다. 뎀나 바잘리아의 절친이자 베트멍과 발렌시아가 쇼의 스타일링을 책임지는 로타 볼코바의 인스타그램은 펑크와 스트리트 컬처에 매료된 그녀의 스타일 그대로 비정상적이고 괴이한 이미지의 보고다.
전위적 패션의 뮤즈가 된 이형적 존재는 예술 작품에서 그 원류를 찾을 수 있다. 과일과 꽃, 야채로 인간의 얼굴을 본뜬 16세가 화가 주세페 아르침볼도의 정물 초상화는 패션계에서 즐겨 차용하는 단골 소재다. 최근엔 꼼데가르송 2018 S/S 컬렉션에 그의 작품을 프린트한 드레스가 등장한 바 있다. ‘사운드수츠(Soundsuits)’ 시리즈로 유명한 닉 케이브의 설인처럼 털이 북슬북슬한 올인원 수츠, 아프리카 원주민의 전통 오브제와 악기 혹은 인형을 잔뜩 이어 붙여 만든 거대한 의상과 퍼포먼스는 많은 패션 디자이너들에게 영감을 불러일으켰다. 이란계 여성 예술가로서 히잡을 두른 이슬람 여성의 신체에 의미심장한 글귀를 문신처럼 가득 새기는 쉬란 네샤트의 사진 작품도 있다. 바게트 빵을 얼굴에 겹겹이 둘러 울퉁불퉁한 마스크를 만든 다쓰미 오리모토의 ‘브레드 맨’은 엘리펀트 맨과 쌍둥이처럼 닮았다. 티셔츠나 잡동사니 따위를 얼굴에 동여매 색다른 헤어 웨어를 연출하는 방식은 요즘 스타일 화보에서도 흔히 볼 수 있다.
반대로 패션이 예술가의 영감을 자극하기도 한다. 2016 터너상 후보 중 한 명으로 주목받은 영국 아티스트 앤시아 해밀턴은 로에베의 조나단 앤더슨과 협업한 신작 ‘The Squash’를 선보였다. 흑인 여성 최초로 테이트 브리튼 커미션을 수상한 그녀는 대중문화를 소재로 감각적이고 비현실적인 풍경을 연출한다. 테이트 브리튼에서 오는 10월까지 계속되는 전시에선 새의 부리 형태가 강조된 탈을 쓰고 같은 패턴의 옷을 입은 ‘새 인간’들의 퍼포먼스를 볼 수 있다. 예술가들은 이 같은 작품을 통해 우리 사회를 보는 새로운 시각을 제시한다. 온갖 문화가 한데 뒤섞이고, 인종과 계급, 성별을 숨긴 이 괴물은 어디에도 속하지 않으면서 그 모든 것이기도 하다.
치렁치렁한 드레스의 치맛단을 과감히 잘라내며 복식사의 새 장을 연 디자이너들은 미지의 대륙을 탐험하는 콜럼버스처럼 지난 100년간 새로운 뮤즈를 찾아 헤맸다. 기존의 서양 중심 문화 대신 아시아와 제3세계에서 패션의 영감을 얻었고, 도시의 더러운 뒷골목에서 보물 같은 아이디어를 수집했다. 남성과 여성을 뛰어넘어 양성을 자유롭게 오가는 젠더 플루이드(Gender Fluid)는 이제 패션계에선 당연한 경향으로 자리 잡았다. 패션계가 다름에 열광하는 이유는 하나다. 새롭기 때문이다. 크리스토퍼 케인은 <파이낸셜 타임스>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전통적 아름다움에만 빠져 있었다면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했을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진짜 어글리한 일이다.” 인류 최초로 달 착륙에 성공한 우주 비행사 닐 암스트롱의 가슴 벅찬 소회 같지 않나!
다시 구찌의 이야기로 돌아가자. 그로테스크한 패션 풍경을 연출한 미켈레는 미국의 페미니스트 사상가 도나 해러웨이가 1985년 발표한 ‘사이보그 선언’에서 이번 컬렉션을 착안했다. 이상적인 미래의 인간상으로 인간과 동물, 기계와 생물, 성별, 국가, 시간 등 모든 경계를 넘어선 사이보그를 창안하기로 결심한 그는 런웨이 무대를 수술실로 변조했다. 이 초록색 수술실은 17세기 렘브란트의 회화 ‘튈프 박사의 해부학 수업’처럼 새로운 문명의 세기가 도래했음을 예언하는 듯하다. 마녀사냥과 흑사병이 전 세계 인구의 3분의 1을 앗아간 중세의 암흑기가 끝난 후 비로소 찾아온 르네상스 시대처럼 말이다. 당시 유럽에서는 인문학과 과학, 수학, 의학이 눈에 띄게 발전하며 해부학 강의도 종종 열렸다.
실제로 미켈레는 르네상스 시대의 예술 작품으로부터 이미지의 많은 요소를 빌려온다. 패션쇼에서 모델들이 한 손에 들고 나온 복제된 머리통은 독일 르네상스 화가 루카스 크라나흐의 ‘홀로페르네스의 머리를 들고 있는 유디트’의 오마주처럼 보이며, 티컵 푸들처럼 모델의 품에 얌전히 안긴 애완 용은 독일 밤베르크 뮐하우제너(Muehlhausener) 성당 제단에 있는 ‘성녀 마르가리타’ 초상화의 어린 용과 무척 비슷하다. 그리스 신화의 외눈 거인족 키클롭스를 형상화한 이마의 눈은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영화 <판의 미로>에서도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아름다운 ‘프릭’들은 공연을 통해서도 만날 수 있다. 캐나다 뉴 서커스의 계보를 잇는 세븐 핑거스와 덴마크 리퍼블리크 씨어터가 2016년 공동 제작한 <보스 드림즈>다. 심리학자 카를 구스타프 융이 ‘기괴함의 거장, 무의식의 발견자’라고 극찬한 15세기 네덜란드 화가 히에로니무스 보스는 독특한 그림체와 상상력으로 살바도르 달리를 비롯한 초현실주의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보스의 작품을 주제로 아크로바틱 서커스와 애니메이션 영상, 연극을 절묘하게 융합한 이 최첨단 환상극은 얼마 전 서울과 대전에서도 내한 공연을 가졌다. 공연은 관객들로 초만원을 이뤘다. 무대에서는 반인반수, 악마, 온갖 프릭들이 천국과 지옥, 현실과 꿈을 넘나들었다. 패션계의 르네상스 맨 미켈레가 이를 놓칠 리 없다. 미켈레는 이미 2018 봄 캠페인에서 스페인 출신의 디지털 페인팅 아티스트 이그나시 몬레알과 함께 보스의 대표작품 ‘쾌락의 정원’을 재해석한 적 있다.
“우리는 각자 자기 삶의 프랑켄슈타인 박사”라고 자신의 컬렉션을 소개한 미켈레는 초현실적 이종 결합을 통해 패션의 한계를 무너뜨렸다. 이 같은 모호성은 디자이너에게 더 많은 자유를 준다. 용감하고 재능 넘치는 디자이너들은 과거의 패션 규칙을 지우고 스스로 세계의 창조자가 됨으로써 무한한 실험의 가능성을 열었다. 더 이상 정상과 비정상을 구분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어제의 상식은 하룻밤만 지나도 고물이 되는 세상이다. 융합과 하이브리드는 전 장르의 표어다. <셰이프 오브 워터>의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은 어느 인터뷰에서 양서류 인간의 사랑을 통해 “냉소주의 시대의 치유제가 되어줄 수 있는 희망과 구원에 대한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고 했다. 1990년대 말에 유행한 ‘엽기’가 어떤 식으로든 비극을 예고한다면, 이 아름다운 프릭들은 인간과 과학에 대한 낙관으로 가득했던 신 르네상스 시대의 신화 속 주인공처럼 희망과 구원을 상징한다. 비록 현실은 아직 차가운 밤일지라도. 인류애 가득한 포스트휴먼들이 만들어가는 21세기 프릭 쇼엔 구경꾼이 없다. 이번엔 당신이 무대에 오를 차례다
- 에디터
- 손기호
- 포토그래퍼
- INDIGITAL, COURTESY PHOTOS
- 글쓴이
- 이미혜(컨트리뷰팅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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