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빙

나의 조국 갈라파고스

2023.02.26

by VOGUE

    나의 조국 갈라파고스

    외국에 살면 애국자가 된다는데, 그래서인가, 요즘 나라가 위태로울 거 같아 밤잠이 안 온다. 정치 때문도 아니고 북한 미사일 때문도 아니다. 한국 IT 수준 때문이다.

    한국에 있을 때도 인터넷 쇼핑이 번거로웠다. 대형 유통 기업의 쇼핑몰은 포기한 지 오래. 부득이 필요한 것은 그나마 결제가 간편한 네이버페이를 이용하고, 시간 여유가 있는 것은 차라리 해외 직구를 선호했다. 옷은 아소스, 소품은 알리익스프레스, 디지털 가젯과 의약외품은 아마존에서 샀다. 카드 번호와 주소만 넣으면 끝나니까. 이건 기본적으로 보완 책임을 기업이 지느냐, 고객에게 전가하느냐의 차이 때문이다. 나는 맥북을 사용하는데, 대부분의 한국 사이트는 공인인증서와 액티브엑스 때문에 맥 OS에서 이용할 수 없다. 윈도우를 사용하기 위해 깔아놓은 버추얼박스를 열고, 느려터진 부팅 과정을 기다려서 사이트에 들어간 다음 초등학교 1학년 담임 선생님 이름을 포함하여 온갖 쓸데없는 신상 정보를 털어 넣어서 가입을 하고, 액티브엑스나 .exe 패키지를 덕지덕지 깔고, 사이트 업데이트 상황 따라 크롬과 익스플로러를 번갈아 시도하고 영문 대/소문자와 특수문자와 숫자를 모두 포함한 8자리 이상 비밀번호를 3개월마다 다시 만드는 스트레스와 그로 인한 컴퓨터 노후화에 비하면 해외에서 주문해 배송이 1~2주 더 걸리는 건 참을 만했다.

    한국인에게 번거로운 건 쇼핑만이 아니다. 나는 평소 외국에 다닐 때 국제체크카드를 이용해 현지 ATM에서 돈을 찾는 걸 선호하는데, 지난번 인도네시아에 오면서는 미리 환전해야 할 일이 생겼다. 그래서 난생처음 모바일 뱅킹으로 환전을 해보았다. 나의 주거래은행은 우리은행인데, 평소에도 거래 내역 알림을 받기 위해서는 기본 앱인 ‘원터치 뱅킹’ 외에 ‘우리은행 원터치 알림’이라는 앱을 따로 깔아야 한다는 게 어처구니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환율 우대를 받으려면 ‘위비뱅크’라는 앱을 또 깔아야 한단다. ‘위비뱅크’를 깔고 환전을 시도해보니 ‘위비톡’이라는 채팅 앱을 통해서 접속해야만 환율 우대가 된다고 했다. ‘위비톡’을 깔았더니 별도의 가입이 필요했다. 그리고 가입하려면 ‘위비멤버스’라는 앱의 회원 번호가 있어야 했다. 위비멤버스는 계속 오류가 났다. 알바 포함 사회생활 20년 차 한국인인 내 머릿속에는 이 시스템의 개발 과정이 시트콤처럼 구체적으로 그려졌다. 스마트폰을 피처폰처럼 쓰고 복잡한 상거래나 회계는 비서와 아내, 아랫것들 부려서만 해본 배불뚝이들이 윗자리에 주르르 앉아서 “어, 우리도 플랫폼 사업인가 뭔가 그거 해봐야지. 이것저것 많이 만들고 집어넣을 수 있는 거 다 집어넣어봐. 회원 수가 중요하다니까 환율 우대는 저쪽에서만 되는 걸로” 어쩌고 하면서 개발자들을 들들 볶았겠지. 결재 라인이 한 단계, 두 단계 올라갈수록 주문이 더 복잡하고 다양해진 끝에 이 해괴한 시스템이 완성되지 않았겠나. 오래 산 사람이 더 많이 알던 농경시대와 달리 매일 기술과 유행이 급변하는 현대사회에서 한국식 상명하달 조직이 갖는 한계를 적나라하게 목도한 기분이었다.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것’이라는 말은 20세기에나 통용되던 표현이고, 요즘은 ‘세상 물정 모르는 어르신’이 더 와닿는 시대다. 오해라면 미안하다. 잡지계 최초로 e-커머스와 콘텐츠를 결합한 웹사이트를 만들겠다는 야심 찬 시도를 하다가 쫄딱 망한 나의 전전 직장에서 목격한 블랙코미디 같은 광경이 떠올라서 그만. 어쨌든 나는 진심으로 은행장이 이 시스템을 이용해서 스스로 환전을 해본 적이 있는지 궁금했다.

    편도 티켓을 들고 인도네시아에 올 때 짐을 줄이려고 책은 안 가져왔다. 나에겐 전자책 단말기가 있으니까. 그것만 믿었다. 한국 출판업계의 전자책 관련 정책도 할 말이 태산 같은데, 간단히 설명하자면, 그간 나의 단말기로는 이용할 수 없는 인터넷 서점을 굳이 루팅까지 해서 사용하다가 여차여차 루팅을 날려먹는 바람에 주거래 서점을 바꾸어야 했다. 마침 요 몇 년 사은품도 잘 만들고 기획전도 감각 있게 잘하는 모 서점에 신규 가입을 시도했다. 가입 신청을 하려니 본인 인증을 하란다. 예상했다. 이럴 줄 알고 내가 공인인증서를 사방팔방 담아서 알뜰하게 챙겨 왔지, 후훗. 한국인으로 산 게 몇 년인데. 그런데 뭬야? 공인인증서가 아니라 아이핀이 필요하단다. 아이핀 가입을 시도해본다. 공인인증서를 설치하란다. 공인인증서용 파일 설치를 눌렀다. “본 사이트에서 허용되지 않는 인증서입니다”란다. 정부 공인인증서를? 허용하지 않아? 왜? 잠시 흥분하다가 호흡을 가다듬고 다시 시도를 해본다. 여전히 안 된다. 몇 시간을 그걸 붙들고 씨름하다가 갑자기 1,000억 개의 뉴런 중 어딘가에서 희미한 섬광 하나가 반짝이는 것을 보았다. 그거 아나? 기억은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왜곡되거나 묻힐 뿐이다. 다급한 순간이면 묻혔던 기억이 돌아오기도 한다. 그리하여 나는 16년 전 어느 날, 모종의 변덕에 의해서 만들었다 방치해둔 아이디를 찾아냈고, 가까스로 사태를 해결했다. 신이 나서 읽고 싶은 책을 잔뜩 바구니에 쓸어 담고 결제를 시도했다. 아뿔싸, 휴대폰으로 전송된 인증 번호를 입력하란다. 카드 번호 입력했음 됐지 도대체 인증은 왜 또 받아야 하는 건데? 체류 기간이 6개월이라 기본료 내기 아까워서 한국 전화번호를 정지시키고 온 게 후회됐다. 빌어먹을 문자 인증. 영화 <스틸 플라워>를 보면 거리에서 생활하는 무일푼 소녀가 알바를 구하려다가 신분증과 전화번호가 없어서 거절당하는 얘기가 나온다. 대한민국의 시스템 안에 붙어 있으려면 반드시 통신사의 보증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 어차피 한국말로 된 한국 책, 한국 사람이나 읽으니까 한국 전화 없는 사람 따위 배려할 필요 없겠지. 대한 사람 대한에서 살아야죠, 그렇죠?

    인도네시아에서 삼성 스마트폰 와이파이가 고장 나서 원격 수리를 받아야 했을 때는 한국 서비스센터와 전화 통화부터 하고 원격조종 앱을 실행해야 한다는 말에 좌절하기도 했다. 기왕 앱을 만들어놨으면 거기서 바로 신청하면 되지 전화는 또 왜? 해외에 있는 사람은 어쩌라고?

    ‘대한 사람 대한으로… 우리 나라 만세’ 마인드는 각종 동영상 콘텐츠 서비스업체도 마찬가지다. 마침 한국 정계가 한참 시끄럽던 시절이라 한국 뉴스를 보기 위해 무던히 애를 썼다. 개별 방송사 사이트며 포털 동영상 서비스, 인터넷 방송을 통틀어 동남아 인터넷 환경에서 제대로 로딩되는 곳은 단 하나도 없었다. 유튜브는 생생하게 잘만 돌아가는데, 한국 방송을 훔쳐서 내보내는 해외 스트리밍 사이트도 잘만 되는데, 도대체 왜 한국 사이트만 안 되는 건가? 뭘 얼마나 무겁게 만들어놨기에?

    시스템도 괴상하고 소프트웨어도 후지고 세계 표준과는 아득히 멀지만 인터넷 속도와 보급률만은 최고인 반쪽짜리 IT 강국, IT 갈라파고스 대한민국의 기업은 오로지 자국 내의 자국민만 고객으로 상정하고 일을 한다는 게 해외에 나와 보면 더없이 선명하게 보인다. 재외 국민은? 해외시장은? 휴대폰 번호 없고 한국말 못하는 외국인 방문객은? 그런 고객은 필요 없는 걸까? 인구 5,000만이면 충분한 시장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세계적인 관광지 발리에 살면서, 나는 종종 나와 반대로, 한국에 간 인도네시아 사람이 누구의 도움도 없이 인터넷 쇼핑을 하고 결제를 하고 길을 찾아다니고 음식을 시켜 먹을 수 있을까 상상해본다. 내가 이곳에서 무리 없이 하고 있는 그 일들을, 과연 한국의 외국인들도 할 수 있을까. 아무래도 어려울 것 같다.

    연초에 가상화폐를 공부하면서 나는 또 한번 한국의 현실에 좌절했다. 한국 거래소는 가입도 힘들고 거래도 힘들고 규제도 많고 사이트는 무겁기 짝이 없다. 그리하여 많은 소비자들이 옮겨간다는 싱가포르 거래소를 보니 모든 것이 직관적이고 가입도 간단했다. 가상화폐 얘기가 아니라, 기업의 태도와 포부에 관한 얘기다. ‘한국 기업이 과연 한국 밖에도 시장이 있고 돈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긴 하는 건가’라는 의문이 요즘 부쩍 자주 든다.

    얼마 전 정부는 공인인증서와 액티브엑스를 폐지하겠다는 발표를 했다. 정말 행복했다. 뉴욕으로 이민 간 친구는 공인인증서 갱신 기간을 놓치는 바람에 한국을 다녀간 적도 있다고 했다. 그런데 뉴스를 자세히 보니, 공인인증서를 퇴출하고 간편한 대안을 내놓는 게 아니라 독점적 지위를 폐하여 사설 인증서와 경쟁시킨다는 내용이었다. 말인즉 은행을 비롯한 상거래 사이트와 기관이 저마다 다른 인증서를 채택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젠 세계 표준도 바라지 않는다. 생체 인식 정도만 돼도 감사하다. 어릴 때 SF 영화에서 주민등록증과 금융 기록을 바코드로 대신한다는 아이디어를 보고 빅브라더, 인간의 사이보그화 등등을 떠올리며 공포에 떤 것과 달리, 이제는 제발 편하게만 만들어달라는 심정이다. 하지만 만에 하나 어딘가의 부패한 기관장이, 덜 떨어진 기업 오너가, 제 친구나 사돈의 팔촌이 개발한 거라고 말도 안 되는 인증서를 채택하여 사이트마다 다른, 공인인증서 비스무리한 무언가를 다운받아야 하는 상황이 온다면? 적어도 이 나라가 그 정도로 후지진 않았으면 좋겠다. 단순히 내가 불편해서 하는 말이 아니다. 그 좁아터진 땅덩어리 밖에도 사람이 살고, 시장이 있고, 돈이 있단 말이다.

      에디터
      조소현
      포토그래퍼
      이현석
      글쓴이
      이숙명(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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