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래프트진의 향연
진은 중성 알코올에 주니퍼베리를 넣은 37.5도 이상의 증류주를 통칭한다. 열린 조건만큼 확장 가능성이 높은 진이 크래프트 시대에 제2의 전성기를 맞았다.
“‘진벤토리’라고 진을 브랜드별로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앱이 있어요.” 청담동의 화이트 스피릿 전문점 ‘화이트바(White Bar)’ 장동은 대표가 인터뷰 말미에 한 말이다. 장 대표는 ‘진(Gin)’에 목록을 뜻하는 영어 단어 ‘인벤토리(Inventory)’를 결합한 진 정보 앱을 보여줄 겸 열었다가 이내 짧고 굵은 탄성을 토했다. “지난해만 해도 등록된 진의 가짓수가 4,000가지에 못 미쳤어요. 그런데 보세요. 현재 4,702가지예요. 진 시장의 성장세가 정말 무섭습니다.” 우리가 진 하면 봄베이, 비피터, 탱커레이, 헨드릭스, 고든스 정도를 떠올리는 동안, 해외의 진 시장은 무럭무럭 성장했다. 이 호장한 기세 속에서 ‘크래프트 진(Craft Gin)’이라는 단어가 빈번히 등장한다. 크래프트 진은 법적 정의가 없는 만큼 그 경계가 모호하다. 하지만 사람들은 관능적으로 크래프트 진과 기존의 대량 생산품을 구분하고, 그 차이에 열광한다. 병에서부터 라벨, 향, 맛까지 각기 다른 개성이 묻어나며, 그 안에 생산자와 지역의 이야기가 녹아 있기 때문이다.
‘Mother’s Ruin’. 진을 지칭하는 또 다른 이름이다. 한글로 옮기면 ‘모성의 몰락’쯤 되려나. 진에 이렇듯 불명예스러운 수식어가 붙은 이유는 영국의 역사에서 찾을 수 있다. 1689년 윌리엄 3세는 네덜란드의 비호 속에 영국 왕위에 올랐다. 왕은 답례로 프랑스산 와인과 브랜디에 고율의 세금을 부과하고 네덜란드 특산품이던 진을 자국에 널리 보급했다. 처음에는 통풍과 소화를 돕는 일종의 약으로 여겨졌으나, 높은 도수와 저렴한 가격 덕에 진은 머지않아 영국의 국민 술로 등극했다. 런던에만 진을 판매하는 가게가 7,000곳 넘게 생겨났고, 노동자들 중에는 임금의 일부를 진으로 받는 이들도 있었다. 당시 진에 부과하는 주류세는 1갤런당 2펜스였다. 한편 도수가 높은 맥주의 주류세는 갤런당 4실링하고도 2펜스로, 25배나 더 높았다. 1펜스에 거나하게 취할 수 있는 진은 지독한 추위와 배고픔에 매일 밤잠을 설쳐야 했던 하층민을 유혹하기 충분했고, 곧 온 나라가 진에 취했다.
부작용은 심각했다. 발기불능과 불임이 늘면서 런던에는 한때 사망률이 출생률을 넘어섰다. 또한 많은 아이들이 방치됐으며, 그중 여아들은 진을 사려는 부모에 의해 성매매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당시 한 여인이 아이의 옷을 팔아 진을 사 마시기 위해 자신의 아이를 죽인 사건은 사회를 큰 충격에 빠뜨렸다. 정부는 이 심각한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736년 진의 세금 인상을 시행하기에 이르렀다. 법안이 실효되던 첫날, 정부는 폭동이 일어날까 싶어 극도로 긴장했다. 그런데 오히려 잠잠했다. 전날 밤 술집에서 마지막으로 진을 헐값에 내놓는 바람에 모든 사람들이 취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이후 한동안 진의 밀매가 성행하고 여기저기서 폭동이 일어나자, 정부는 진의 세금을 서서히 줄이는 동시에 비교적 도수가 낮은 맥주에 세금을 없애며 민심을 잡았다. 영국 사람들이 맥주를 물처럼 마시기 시작한 것이 이때부터이며, 그 사이 진은 공급과 수요에 안정을 찾았다.
진은 종주국인 영국에서 맥주에 국민 술의 자리를 내줘야 했지만, 여전히 사랑받았다. 특히 1920년 미국이 시행한 금주법은 미 대륙에 진을 유행시키는 데 일조했다. 미국 전역에서 스피크이지 바를 통해 밀주를 판매했는데, 불법으로 만들다 보니 술의 품질이 떨어졌다. 이때 숙성할 필요가 없고 불법으로 제조하기 비교적 용이한 진이 위스키를 대체하기 시작했다. 영국에서는 전통의 강호로, 미국에서는 나름의 쓸모로 꾸준한 인기를 구가하던 진. 1940년대 들어 미국을 중심으로 때아닌 보드카 열풍이 부는 바람에 밀려나기 시작했다. “정말 칵테일 하나의 영향이었어요. 스미노프 보드카 대표가 친구들과 바에서 술을 마시다가 즉석에서 만들었다는 ‘모스코 뮬(Moscow Mule)’이었죠.” 당시 스미노프 대표였던 존 G. 마틴이 자신의 술에 진저 비어를 붓고 레몬즙을 짜 마셨는데 그 맛이 생각보다 훌륭해 전 세계를 돌며 유행시켰다는 이야기다.
“무색의 화이트 스피릿 중에서도 보드카는 향이 없고 순수한 알코올에 가까워 칵테일을 제조하기 더 쉬웠어요. 활용도가 높고 가격이 저렴한 덕에 빠른 속도로 진을 대체했죠.” 1979년 해외시장에 진출한 스웨덴 보드카 브랜드 ‘앱솔루트’가 공격적 마케팅을 벌인 것도 보드카의 인기를 견인하는 역할을 톡톡히 했다. 진은 자연스럽게 도태되어 역사의 뒤안길에 놓이는 듯했다. 하지만 한때 임금과 맞바꿀 만큼 사랑받은 술 아니던가. 1980년대 말 진이 반격을 시작했다. 1987년 봄베이는 앱솔루트 보드카의 증류 장인을 모셔와 현대인의 입맛에 맞는 진을 개발했다. 진이 부활하는 데 시초가 된 이 새로운 진은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아는 파란색 병에 담긴 ‘봄베이 사파이어’다. 그 후 봄베이의 행보에 자극을 받은 후발 주자가 여럿 등장했고, 그중 하나가 헨드릭스였다.
“2000년대 들어 과거로 회귀하려는 현상이 두드러지면서 주류업계에도 올드 스타일의 클래식 칵테일이 제2의 전성기를 누리기 시작했습니다.” ‘G&T’라고 줄여 부를 만큼 칵테일의 대명사로 자리 잡은 진 토닉과 진 피즈(Gin Fizz) 등이 다시 유행하며 진 시장은 부흥기를 맞았고, 그 틈에 ‘크래프트 진’이라는 새로운 카테고리가 등장했다. 당시 미국은 지역에서 얻은 재료에 개성을 입히는 크래프트 비어가 문화로 견고히 자리 잡은 이후였다. 크래프트 비어라는 플랫폼과 유통 구조에 증류 기술을 접목하며 미국의 크래프트 증류 산업은 빠르게 성장했다. 2004년 설립한 ‘하우스 스피리츠 디스틸러리(House Spirits Distillery)’가 그 대표적 예다. 한때 진의 종주국이었던 영국은 미국의 크래프트 증류 산업에 큰 자극을 받았다. 2009년 십스미스(Sipsmith)가 근 200년 사이 최초로 소규모 증류 허가를 받아내며 영국의 크래프트 진은 봇물 터지듯 쏟아졌다.
미국의 크래프트 문화가 차고에서 시작됐다면, 영국은 헛간을 활용했2018다. 실제로 ‘헛간’을 뜻하는 영어 단어 ‘Shed’를 브랜드명으로 내세운 ‘ 셰드 원(Shed 1)’이라는 크래프트 진도 있다. 한편, 런던 노팅힐에는 세계 최초로 진을 테마로 한 호텔 ‘더 디스틸러리(The Distillery)’가 문을 열었다. 100여 가지가 넘는 진을 구비한 바와 레스토랑은 물론, 크래프트 증류장을 두어 손님들이 자신만의 진을 만들 수 있으며, 미니바에는 갓 만든 진 베이스의 칵테일이 그득하다. 이러한 흐름에 힘입어 지난해 영국은 유례없는 진 소비량을 자랑했다. 또 일부 전문가들은 2019년이면 영국 내에서 진이 블렌디드 위스키의 수요를 넘어설 것이라고 예측한다. 앞서 언급했듯 진은 클래식 칵테일의 부흥에 기대어 다시 성장세로 돌아설 수 있었다. 그중에서도 크래프트 진이 연일 화두에 오르며 인기를 구가하는 이유는 생산자, 유통업자, 소비자 입장에 따라 각기 다르다.
생산자 입장에서 보면 진은 제조 과정이 비교적 단순하다. 특히 증류 장비가 발달하면서 자신만의 레시피를 구축한다면 누구나 쉽게 진을 손에 넣을 수 있다. 위스키처럼 숙성시킬 필요도 없다. 게다가 필수 요소인 주니퍼베리를 포함한 다양한 과일과 식물을 넣어 자신만의 개성을 입힐 수 있다. 특히 지역에서 나는 재료를 첨가하여 ‘Think Globally, Act Locally’ 정신을 실천할 수도 있다. 유통업자 혹은 바 운영자 입장에서는 다양한 개성을 지닌 진을 바탕으로 훨씬 더 다채로운 칵테일을 개발한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바의 존재 이유도 명확해진다. 장동은 대표는 화이트바에서 제조할 수 있는 진 토닉만 해도 6만5,000가지에 달한다고 귀띔한다. 이는 진의 다양화가 토닉 워터, 가니시, 잔의 다양화를 이끌어낸 결과라고 하겠다. 소비자들이 일부 대기업이 제시하는 맛에 의문을 품은 지는 오래다. 훨씬 더 다양한 선택지 안에서 끝없이 모험을 즐기며 진정한 자신만의 취향을 찾아나가기를 바란다. 나도 그러한 과정 속에 있다. 현재 나의 종착지는 ‘디스틸러리 드 파리(Distillerie de Paris)’의 ‘배치 원(Batch 1)’. 최초로 진에 베르가모트 향을 입힌 배치 원을 머금으면 입안에서 이국의 꽃이 확 피어나는 착각에 빠져든다. 이는 와인, 위스키, 브랜디 등 다른 술이 대체할 수 없는 아주 자연스러우면서도 화려한 향의 향연이다.
- 에디터
- 조소현
- 글쓴이
- 이주연 (미식 칼럼니스트)
- 일러스트레이터
- 전하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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