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세대의 아티스트들이 패션계에 일으킬 변화의 물결
패션과 음악은 늘 함께다. 그리고 지금 새로운 세대의 아티스트 덕분에 변화의 물결이 일고 있다.
5월 초 프라다의 초대를 받아 뉴욕으로 향했다. 정해진 일정 중 하나인 소호 프라다 에피센터 매장 방문을 마친 후 잠깐 뉴욕 거리 산책에 나섰다. 늘 바쁜 뉴요커와 길을 막고 선 관광객 사이를 거닐다 비명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글로시에 쇼핑백을 든 10대 소녀들 한 무리가 공사장 벽 앞에서 까르르거리며 한창 셀피를 찍고 있었다. 그들의 배경이 된 건 한 블록을 가득 채운 이번 시즌 발렌티노 광고 포스터. 그리고 그 포스터 속 로고 티셔츠를 입고 포즈를 취한 모델은 팝 가수, 트로이 시반(Troye Sivan)이었다.
10대 소녀들이 열광하는 건 비슷하지만, 시반은 평범한 아이돌 가수와는 다르다. 가장 쉽게 시반만의 개성을 알아차릴 수 있는 건 최근 공개한 새 싱글 ‘Bloom’의 뮤직비디오. 그 속에서 필립 트레이시가 디자인한 발렌티노 꾸뛰르 깃털 모자를 쓴 시반은 모스키노 핑크 새틴 톱을 뷔스티에로 입은 채 카메라 밖 우리를 유혹한다. 입술은 반짝이는 붉은색으로 바르고, 오른쪽 눈을 하얗게 칠한 모습은 <보그> 메이크업 화보를 보는 듯하다. 여기에 마돈나부터 로버트 메이플소프 등 게이 아이콘을 향한 오마주 역시 빠지지 않았다. “‘The Thin White Duke’ 시절 데이비드 보위와 ‘Nothing Compares to You’ 당시 시네이드 오코너가 프린스의 투어 의상으로 가득한 세포라에서 만난다면, 바로 트로이 시반의 ‘Bloom’ 비디오가 탄생할 것.” 미국의 한 배우가 트위터에 남긴 감상에 100% 공감한 건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물론 짙은 메이크업에 가냘픈 몸매를 흔드는 팝 스타는 새롭지 않다. 보이 조지와 조지 마이클이 그랬으며, 더 위로 올라가면 엘비스 역시 스모키 메이크업과 현란한 허리 움직임으로 세계를 놀라게 했다. 하지만 시반은 억지로 남성성을 강조하며 소녀들을 유혹하지 않는다. 근육을 키우거나 거뭇거뭇 턱수염을 기르지도 않는다. 시반은 오히려 그 반대에 있다. 열여덟 살에 유튜브를 통해 커밍아웃을 한 호주 출신 팝 스타는 게이로서의 정체성을 당당히 내보인다. 당연히 패션계는 이 새로운 아이콘의 등장을 두 팔 벌려 환영했다. 패션지에선 앞다투어 그와 화보를 촬영하고, 발렌티노의 붉은색 시폰 톱과 스키니 실크 수트를 입은 채 멧 갈라에 초대를 받는다. 거친 록 밴드를 선호하는 에디 슬리먼은 선뜻 앨범 재킷 이미지 촬영을 자원했다.
뮤직비디오에 자신의 남자 친구를 등장시키고, 가사 속에서 ‘그녀’ 대신 ‘그’에 대한 사랑을 고백하는 남자 팝 아이돌은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상상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시반은 혼자가 아니다. 새로운 세대의 LGBTQ+ 뮤지션들은 자신의 정체성에 누구보다 당당하다. 포용(Inclusivity)과 다양성(Diversity)이 가장 소중한 가치로 떠오른 지금, 발빠른 패션계도 가장 먼저 이들을 지원하고 나섰다.
트로이 시반에게 햇빛이 어울린다면, 퍼퓸 지니어스(Perfume Genius)는 어두운 동굴에서 만나야 할 것만 같다. 지난해 공개한 ‘Die For You’ 뮤직비디오에서 본명 마이크 하드레아스(Mike Hadreas)는 <블랙 스완> 못지않은 메이크업을 한 채 팔로모 스페인(Palomo Spain)의 오프 숄더 러플 수트를 입고 몸을 흐느적거렸다. 약물 중독과 지독한 사랑, 집착 등에 대한 노래를 부르는 그는 미국 공중파 토크쇼에서 붉은 립스틱을 바르고 노래를 부르고, 자신의 동성 연인을 향한 노래를 바치곤 한다. 지난 5월 코첼라 페스티벌에서도 그의 대담한 스타일은 또 한번 화제가 되었다. 미디 힐을 신은 채 무대를 휘저은 그가 선택한 의상은? 은빛 페이즐리 패턴의 오버사이즈 수트. 디자이너는? 벨기에 출신의 전위적인 라벨 와이/프로젝트.
런던을 베이스로 한 밴드 ‘Years & Years’의 보컬 올리 알렉산더(Olly Alexander) 역시 단 한 번도 스스로의 정체성을 숨기지 않았다. “과거에 게이 팝 스타들은 성적인 주제나 스스로의 성 정체성을 주장하는 걸 부끄러워했습니다.” 주로 잰더 주나 KTZ 등의 파격적인 디자인을 즐겨 입는 그는 게이기에 즐길 수 있는 것이 더욱 많다고 최근 한 인터뷰에서 답했다. “우리만 즐길 수 있는 성적인 환상은 제게 힘을 줍니다. 그런 성향을 탐험하는 건 무척이나 큰 힘이 된답니다.” 무지개색 프린지 코트를 입고 글래스턴베리 페스티벌 무대에 오르는 뮤지션에게 두려움은 없을 것. 런던의 패션 학교 재학생들과 특별한 협업을 선보이는 에너지 역시 알렉산더이기에 가능한 일.
LGBTQ의 세상은 더 넓어지고 있다. 더 이상 레즈비언(L), 게이(G), 바이섹슈얼(B), 트랜스젠더(T), 퀴어(Q)라는 다섯 가지 단어로 모든 성향을 규정할 수 없다. 스스로를 ‘판섹슈얼(Pansexual)’, 즉 남성과 여성을 구분 짓지 않는 범성애를 지향하는 프랑스 밴드, 크리스틴 앤 더 퀸즈(Christine and the Queens)의 엘로이즈 레티시에(Héloïse Letissier) 역시 카테고리를 벗어났다. 최근 투어 포스터에 중성적인 이름인 ‘Chris’만 남기고 나머지를 줄로 그어버린 것. 본격적으로 젠더 유동성을 탐험하겠다는 선언. 함께 공개한 이미지 속에서 남성적인 톱과 카키 셔츠를 입고 짧은 머리를 선택한 건 남성성을 따른 의도적인 선택인 듯하다. “전 제게 주어진 좁은 옵션을 벗어난 성을 선택함으로써 더욱 자유롭고 싶습니다.” 이미 아미 파리의 팬츠 수트를 즐겨 입던 그녀에게 느껴지는 거친 이미지는 그녀를 흠모하던 수많은 여성 팬들에게 일종의 쾌락을 선사하지 않을까.
레즈비언 팝 팬이 열광하는 또 하나의 스타로 미국의 헤일리 키요코(Hayley Kiyoko)를 빼놓을 수 없다. 그녀의 첫 번째 히트곡 제목은 직설적이다. ‘Girls Like Girls’. 아역 배우 출신의 뮤지션은 이 노래를 통해 일명 ‘레즈비언 지저스’라는 별명을 얻었다. LA의 여성 스트리트 갱 스타일을 선호하는 키요코가 무대에서 춤을 추기 시작하면, 여성 팬들은 금세 가슴을 부여잡는다. 무엇보다 스스로의 섹슈얼리티를 즐기는 백인이 아닌 레즈비언 아이콘의 등장은 얼마나 반가운 일인가. “어린 팬들은 모두 굶주려 있습니다. 저 역시 어린 시절 TV에서 레즈비언을 볼 수 있기만 기다렸죠. 제가 그 역할을 대신 할 수 있다면 무척이나 기쁠 겁니다.”
올해 3월 첫 번째 데뷔 싱글을 선보인 열아홉 미카엘라 스트라우스(Mikaela Straus) 역시 스스로의 정체성을 담은 노래로 팬들을 위로한다. “전 처음부터 사랑 노래를 쓰고 싶었어요. 하지만 이건 철저히 레즈비언의 사랑 노래였어요.” 킹 프린세스(King Princess)라는 예명을 선택한 그녀는 한 라디오 쇼에서 자신의 노래 ‘1950’의 시작을 이렇게 설명했다. 무표정한 얼굴에 인디적인 스타일을 지닌 스트라우스는 이미 더 엑스엑스의 로미를 잇는 레즈비언 스타가 될 법하다.
스스로에게 당당한 뮤지션의 등장은 기존 아티스트에게도 영향을 끼쳤다. 애절한 발라더 샘 스미스, 새 앨범을 선보인 자넬 모네도 뒤늦게나마 퀴어 아티스트로서 정체성을 밝혔으니 말이다. 물론 성 정체성만으로 이들을 묶어 소개하는 것조차 구시대적인 발상일 수 있다. 하지만 이들 덕분에 스스로를 긍정할 수 있는 어린 세대를 생각하면, 더없이 반가운 진화인 셈.
이들 덕분에 패션도 유쾌한 진화를 거듭할 수 있다. 데이비드 보위가 없는 현대 패션은 상상하기 힘들다. 파격적이고 유동적인 젠더를 즐기던 아티스트 덕분에 글램 시대가 찾아왔고, 파워 수트가 섹시해 보일 수 있었다. 스스로의 섹슈얼리티를 마음껏 즐기면서, 그에 맞는 스타일을 찾아가는 새로운 세대의 아티스트는 또 어떤 패션 혁명을 불러일으킬까. 생로랑의 은빛 스키니 진을 입고 마음껏 골반을 흔들며 노래를 부르는 트로이 시반과 에카우스 라타의 톱을 입은 채 머리를 쓸어 넘기는 킹 프린세스의 모습이 남다르게 느껴지는 건 그들이 일으킬 변화의 물결에 대한 기대 때문이다.
- 에디터
- 손기호
- 포토그래퍼
- Hedi Slimane, Gettyimage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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