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탠드업 코미디의 농담
‘한국적 정서’와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정착에 어려움을 겪던 스탠드업 코미디. 시대의 부름을 받고 부흥을 노리고 있다.
금요일 밤, 발 디딜 틈 없이 분주한 강남의 한 스탠드업 코미디 클럽. 손에 술잔을 든 관객들은 기대에 찬 눈빛으로 무대를 응시한다. 조명이 밝아지며 등장한 코미디언은 마이크를 잡고 곧바로 농담을 던진다. 첫 번째 조크에 웃음이 터지고, 분위기는 달아오르기 시작한다. 전형적인 스탠드업 코미디 공연의 풍경이다.
요새 좀 눈에 띄는, 어디서 한번 들어본 것 같은 장르인 스탠드업 코미디. ‘스탠딩 코미디’가 입에 더 잘 붙어 종종 그렇게 불리기도 하지만, 사실 스탠딩 코미디는 한국에서만 쓰이는, 잘못된 표현이다. 해외에서 엄청 인기라는 이 엔터테인먼트, 낯설지만 호기심을 자극한다.
미국에서 탄생한, 짧게는 ‘스탠드업’이라고도 하는 이 코미디의 정의는 간단하다. 코미디언이 관객 앞에서 마이크를 잡고 농담 퍼레이드를 펼치는 것. 스탠드업 공연자는 촌철살인의 한마디, 경악할 만한 경험담 또는 기발한 반전이 있는 이야기를 적절히 버무려 웃음을 만든다. 이렇게만 보면 <세상을 바꾸는 시간, 15분> 같은 강연 프로그램을 떠올릴 수도 있겠지만 스탠드업은 아무런 메시지도, 목적도 없이 그저 웃겨야 한다는 점에서 강의와 본질적으로 다르다. 또 연극처럼 대사를 외워 하는 게 아니라 친구와 농담하듯 즉흥성을 띠어야 한다는 점도 특징이다.
1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진화해온 이 공연 예술엔 시사, 성, 종교는 물론, 신성모독, 살인, 약물 중독, 암 등의 이야기도 등장한다. 강도 센 욕설도 자주 쓰인다. 금기시되는 소재를 다루고 권력자 들을 거침없이 놀려대기에 영미권에서 스탠드업 코미디는 ‘표현의 자유 지킴이’로 여겨진다. 코미디언 사라 실버맨(Sarah Silverman)은 한 인터뷰에서 “고유한 관점만 있다면 스탠드업에서 다루지 못할 주제는 없다”고 한 바 있다. 간혹 코미디언의 농담은 시시비비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예로 최근 미국에서 논란이 된 농담을 한번 보자. 트럼프 대통령 측근 사라 허커비 샌더스(Sarah Huckabee Sanders)는 태연한 얼굴로 거짓말하는 걸로 유명한데, 이에 대해 코미디언 미셸 울프(Michelle Wolf)가 백악관 기자단 만찬에서 한마디 했다. “사라는 임기응변 재주가 대단해요. 진실을 불태우고 남은 재로 완벽한 스모키 아이 메이크업을 하죠.” 공연 직후 울프는 보수뿐 아니라 진보 진영으로부터 ‘여성이 여성을 비하한, 저급한 농담’을 했다며 비난을 받았다. 한동안 이 주제로 정치인과 기자, 코미디언들이 생각을 쏟아내며 트위터가 시끌벅적하기도 했다. 동료 스탠드업 코미디언들은 울프의 농담이 외모 비하가 아니라 창의적인 표현이라며 그녀를 감쌌다.
누군가는 위의 농담을 듣고 실소하고, 누군가는 미간을 찌푸린다. 웃음이란 매우 주관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스탠드업 코미디를 통해 제시되는 말은 무엇이 웃긴지, 농담을 수용하는 한도가 어디까지인지 대중에게 지속적으로 묻는다. 이와 관련해 전설적인 스탠드업 코미디언 조지
칼린(George Carlin)은 “코미디언의 역할은 경계선을 찾고 그 선을 일부러 넘어버리는 것”이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그렇다면 한국의 스탠드업 코미디는 어디까지 와 있을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스탠드업은 ‘아는 사람만 아는 것’으로, 유튜브에서 5~10분짜리 해외 유명 코미디언들의 공연 영상을 보는 게 스탠드업 감상법의 전부였다. 그러다 2016년부터 넷플릭스가 국내 서비스를 시작하며 온전한 공연 실황을 자막과 함께 즐길 수 있게 되었다. 또 코미디언 유병재가 단독 공연을 열며 스‘ 탠드업 코미디’라는 단어를 궤도에 올려놓은 덕에 많은 이들이 스탠드업의 매력에 눈을 뜨고 있다.
그동안 한국에서 스탠드업이 아예 없었던 건 아니다. 80년대 한 번 짠, 하고 나타났다가 검열에 의해 사라졌고, 다시 2000년 초반 짧은 부흥기를 맛보고 쇠했다 최근 다시 부상하고 있다. 지난 6월 강남에 국내 최초의 스탠드업 코미디 클럽도 문을 열었고, 공채 코미디언들도 스탠드업 공연을 개최하는 등 국내에서 라이브로 스탠드업 코미디를 즐길 수 있는 기회도 생겼다. 그렇지만 ‘한국에서 제대로 스탠드업 코미디를 할 수 있는가’는 이 장르에 도전하는 모두의 과제다.
일단 한국어가 영어와 어순과 뉘앙스가 완전히 다르다는 것부터 고민이 시작된다. 스탠드업은 ‘친구에게 하듯 캐주얼하게’ 해야 하는데, 공연자가 존댓말로 말문을 떼면 자연스레 관객과 벽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반말을 하면 그 역시 작위적으로 느껴진다. 어떻게 하든 억지스럽지 않게 관객에게 말을 걸 방법부터 찾아야 한다. 그다음으로 한국 관객에게 과연 농담의 수위는 어느정도까지 허락될지를 고민해야 한다. 미국이 100년 넘게 다양한 코미디 실험을 통해 말의 허용 범위를 찾아온 데 비해 우리는 강도 높은 검열과 수직적 문화 때문에 제대로 된 정치, 종교, 성에 대한 이야기를 어떻게 꺼내야 할지조차 모르고 있다. 그래서 코미디언들은 최대한 자주 관객 앞에서 온갖 농담을 던지며 대중이 어느 정도를 수용할 수 있는지 알아내려 한다.
스탠드업 코미디언인 나 역시 한창 그 경계를 찾는 데 몰두하고 있다. 나는 여성으로서 겪는 부조리를 주요 소재로 농담을 하는데, 섹스나 자위 관련 조크는 반응이 괜찮은 편이지만 임신중절, 몰카, 생리 같은 말은 입에 올리기만 해도 모든 관객들의 표정이 굳는 게 보인다. 재미없는 무대를 마치고 내려오는 건 뼈아프지만, 한편으론 그것이 웃음의 경계를 찾는 과정의 일부기에 겸허히 받아들이고 있다.
한편 스탠드업 코미디가 지닌 ‘No Bullshit’ 태도, 그러니까 가식을 드러내고 날것의 진실을 말하는 게 체면을 중요시하는 국민 정서와 잘 맞지 않는다는 것도 고민거리다. 2002년 공중파에서 방영된 국내 최초의 스탠드업 코미디 쇼, <폭소 클럽>을 기획한 코미디 작가 신상훈은 한국에서 스탠드업을 시도하는 어려움을 생생히 기억한다. “‘사장님 나빠요’로 유명한 외국인 노동자 캐릭터인 ‘블랑카’가 등장했을 때, 중소기업 사장들의 항의가 빗발쳤어요. 그렇지 않아도 경기가 어려운데 자기들이 욕까지 먹어야 하느냐면서요. 결국 ‘봉숙이 나빠요’로 바꿔야 했죠.” 신 작가는 또 오랫동안 전(全) 권력자가 아닌, 현재 힘 있는 사람을 풍자하는 코미디가 부재한 것도 국내 코미디가 성장하지 못한 원인으로 꼽았다. “이명박, 박근혜가 한참 힘이 있을 때 ‘까야’ 코미디죠. 힘을 잃고 나서 조롱하면 그게 무슨 소용인가요.”
그렇지만 그는 다시 도래한 스탠드업 코미디의 부흥이 낙관적이라고 전망했다. 인터넷과 스마트폰이 우리 일상을 지배하는 지금, TV는 더 이상 대중의 문화와 언어를 만드는 유일한 창구가 아니다. 젊은이들은 그 누구의 허락 없이도 자기의 생각을 자유롭게 유튜브에, 소셜 미디어에 게재하고 인기와 영향력을 얻을 수 있다. 속 시원한 엔터테인먼트로서 스탠드업은 분명 각광받게 될 것이다. 스탠드업 코미디가 국내 농담의 경계를 실험한 대표적 사례가 유병재의 스탠드업 코미디 쇼 이다. 올 상반기 열린 이 공연은 1분안에 4,000석 매진을 기록할 정도로 인기였지만 공연 직후 내용 논란이 일며 집중 조명을 받았다. 유병재가 준비한 아이러니한 농담이 많은 여성 관객을 설득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은 코미디의 역할에 대해 성숙한 고민을 할 계기를 마련해주었다는 점에서 의미 있다.
스탠드업 코미디가 한국에서 갓 움트기 시작한 이 시점은 여러모로 중요하다. 진실을 웃기게 이야기하는 사람들의 시대가 열리느냐, 농담을 핑계 삼아 약자를 제물 삼아 낄낄거리는 문화가 강화되느냐의 갈림길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탐욕스러운 권력자들, 무지한 혐오를 일삼는 이들을 향해 잽을 날리는 게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스탠드업이다. 그렇기에 이젠 보이지 않고 목소리를 낼 수 없었던 사람들이 마이크를 쥐고, 말의 경계를 넓혀나가야 한다. 다행히 곳곳에서 새로운 시도를 하는 이들이 눈에 띈다. <래프 라우더(Laugh Louder)>는 ‘여성과 섹스’라는 주제로 본격 여성 스탠드업 코미디 쇼를 선보였고, 터부시하는 여성의 성욕과 성적 즐거움에 대해 유쾌하게 풀어냈다는 호평을 받았다. 매주 공연 중인 스탠드업 코미디언 한기명은 자신의 뇌병변 장애를 소재로 웃음을 이끌어낸다. 올해로 서른네 살인 나도 이제 막 스탠드업을 시작했다. 내가 하고 싶은 얘기를 웃기게 하기 위해.
스탠드업 코미디는 라이브로 보는 것이 진짜다. 편집으로 정제된 스페셜 영상에선 느낄 수 없는, 공연장의 분위기와 관객과 코미디언의 소통 모두가 온전한 스탠드업의 일부기 때문이다. 코미디언이 농담을 하고, 관객은 웃음 또는 침묵으로 화답하는 그때, 농담의 경계가 바뀐다. 그러니 진짜 코미디를 만드는 데 참여하고 싶다면, 스탠드업 공연장을 찾자. 지금 당장!!
- 에디터
- 조소현
- 포토그래퍼
- GETTYIMAGESKOREA
- 글쓴이
- 최정윤(스탠드업 코미디언,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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