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과 악의 대비, 그 본령에 선 릴리 로즈 뎁
흰 백합과 흑장미, 천사와 악마 그리고 이 둘 사이를 오가는 릴리 로즈 뎁.
샤넬이 그랑 팔레에 거대한 배를 정박시킨 5월 3일. 패션의 꽃 크루즈 쇼에 참석하기 위해 전 세계 유명 인사들이 모였다. 뱃고동 소리가 효과음으로 깔린 포토월에서 <보그 코리아> 셉텝버 이슈의 주인공 릴리 로즈 뎁을 마주했다. 서울 시내 백화점 전광판에서도 그녀를 볼 수 있었기에 꽤 친숙한 인상이었지만 1m 전방에서 본 릴리의 눈빛은 매혹적인 이미지를 초월해 강렬할 정도였다. 올해 스무 살이 된 샤넬 앰배서더에게 쏟아지는 플래시 세례는 쇼 직전까지 계속됐다.
88벌의 크루즈 패션 대서사시를 함께 본 관객들은 런웨이 뒤편으로 건너가 밤늦게까지 선상 파티를 즐겼다. 갑판 위 메인 스테이지에서 춤추는 릴리를 찾기란 어렵지 않았다. “친구들과 춤추는 걸 좋아해요. 클럽보다 작은 댄스 파티를 선호하죠.” 밤은 깊어가고 파티는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2층 난간에서 아래를 바라보니 릴리는 여전히 스테이지 위! 산해진미와 술, 라이브 음악이 펼쳐지는 황홀한 파티는 그녀를 사로잡고도 남았다. 이른 아침부터 릴리와 촬영해야 한다는 사실만 잊는다면 더없이 좋았을 밤이었다.
다음 날 아침. 포르트 도를레앙역 근처 파올로 로베르시 스튜디오로 스태프들이 도착하기 시작했다. 오늘의 주인공 릴리 역시 정확한 시간에 문을 열었다. “어제 정말 좋은 시간을 보냈어요. 세트는 정말 대단했죠. 샤넬 쇼에 갈 때마다 그들이 창조해낸 세계에 늘 놀라고 또 놀라게 돼요.”
엘리베이터가 없는 좁은 계단을 올라가 도착한 대가의 작업실은 햇살이 은은하고 아름다운 곳이었다. 그가 찍은 그림 같은 케이트 모스 사진 액자가 걸린 응접실을 지나, 좁다란 계단을 올라가야 도달할 수 있는 아주 작은 스튜디오. 작업용 컴퓨터가 들어갈 수도 없고, 자연광이 들어오는 창문 하나만 있는 좁은 공간에서 우리가 바이블로 삼았던 패션 사진이 탄생했다는 사실을 단숨에 믿긴 어려웠다.
모든 스태프들과 악수를 끝내자 파올로 로베르시 역시 촬영 준비를 마쳤다. 거장의 렌즈 앞에 선 피사체는 그저 유명인 부모(조니 뎁과 바네사 파라디)를 둔 밀레니얼 세대의 인플루언서일까? “제가 제 또래를 대변한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다만 제 또래들이 그렇듯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 궁리할 뿐이에요.”
300만 명이 넘는 팔로워를 지닌 릴리는 소셜 미디어의 명암을 적확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소셜 미디어를 통해 전 세계 사람들의 삶을 공유하고 서로 다른 문화를 배울 수 있는 건 멋진일이죠. 할 수 없었던 것들이니까요. 하지만 우리는 여기에 시간을 너무 많이 뺏기고 있어요. 한편으로 자의식 과잉이라는 문제도 생기죠. 소셜 미디어는 당신의 삶 전체가 아니라 그냥 ‘앱’일 뿐이라는 걸 기억해야 해요.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일 필요도 없죠.” 그래서 릴리가 최근 팔로우한 계정은? 작고 귀여운 고양이, 거북이를 올리는 계정 등이다. “아, 최근엔 샤넬의 1980~90년대 런웨이 사진을 모은 아카이브 인스타그램 계정도 잘 보고 있어요. 영감을 얻을 때가 많거든요.”
여덟 살에 칼 라거펠트를 만났고 열다섯 살 때부터 샤넬과 일하기 시작한 릴리에게 샤넬은 브랜드 이상의 의미다. “제 삶의 일부와 같죠. 뷰티 팀, 패션 팀, 칼. 샤넬팀은 저에게 가족처럼 편한 관계예요. 엄마도 제 나이 때 샤넬 모델을 시작했죠. 최고 중의 최고, 아름다우며 장인 정신이 있는 브랜드와 일할 수 있어 감사해요.” 배우인 엄마 바네사 파라디 역시 열네 살에 데뷔해 프랑스 국민 배우로 살았다. 오랜 시간 대중에게 사랑받은 만큼 스포트라이트 가운데 지내왔다는 뜻이다. 선배이자 엄마로서 바네사 파라디가 릴리 로즈 뎁에게 해준 조언은 지금도 유효하다. “아주 간단하고 쉬운 거지만 제게 도움이 많이 됐어요. 엄마는 제가 스트레스 받고 우울해지면 천천히 숨을 들이마시라고 했어요. 그리고 모두에게 예의를 지키라고 하셨죠. 모든 사람들이 각자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고 있으니까요. 누군가는 힘든 하루를 지낼 수도 있고, 당신이 저보다 더 힘든 날을 보냈을 수도 있으니까요.”
천사와 악마라는 주제를 오가며 햇빛이 환하게 비치는 세트와 깜깜한 암실에서 종일 촬영을 마친 릴리는 레깅스로 갈아입었다. “집에 돌아가 친구들과 저녁을 먹을거예요. 영화 대본도 읽고요. 대본을 읽으면 주인공과 교감할 수 있어요. 이건 직관적인 거예요. 3개월 동안 그 주인공처럼 살아야 하니까요.” 파리와 LA를 오가는 릴리가 각 도시마다 의식처럼 들르는 곳이 있다고 귀띔했다. “LA의 핀치스 타코는 제가 가장 좋아하는 멕시칸 식당이에요. LA 언덕을 드라이브하는 게 낙이죠. 파리에서는 어느 빵집이든 좋으니 걸어 다니며 눈에 띄는 데로 들어간답니다.”
올해 두 편의 프랑스 영화를 찍은 그녀는 나탈리 포트만과 주연을 맡은 영화 <플래니테리엄(Planetarium)>의 한국 개봉을 앞두고 있다. 내년에는 로버트 패틴슨, 티모시 샬라메와 함께한 역사 영화
- 에디터
- 남현지
- 포토그래퍼
- PAOLO ROVERSI
- 모델
- 릴리 로즈 뎁(Lily-Rose Depp)
- 헤어
- 숀(Shon)
- 메이크업
- 크리스토프 당슈(Christophe Danchaud@B Agency)
- 프로덕션
- 배우리(Woori Bae), 카밀라 멘데스(Camila Mendez@Cream)
- 네일
- 아나톨 레이니(Anatole Rainey@B Agency)
- 세트 스타일링
- 장 위그 드 샤티용(Jean-Hugues de Chatillon)
- BTS 포토그래퍼
- 마티외 르메르 쿠라피에(Matthieu Lemaire-Courapied)
- FEAT.
- CHAN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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