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 화보

뎀나 바잘리아

2018.10.11

by VOGUE

    뎀나 바잘리아

    우리 시대 패션 신전을 지킬 수호자 7인! 과거와 분리된 채 미래를 향해 전진하는 일곱 위인을〈보그〉가 만났다.

    전자 제품 공장이던 취리히 빈츠 지구의 베트멍 아틀리에에서 만난 바잘리아.

    “미국을 대표하는 이 스타스 앤 스트라이프스 재킷은 제가 가장 좋아하는 옷이에요. 자라면서 미국 문화를 정말 좋아했어요.” 지난 7월 베트멍 패션쇼가 열리기 전날 밤, 뎀나 바잘리아는 잠시 멈춘 채 패치워크 가죽 잠바를 꺼내더니 그것을 휙 뒤로 돌려서 등 부분의 슬로건을 손으로 가리켰다. “제가 좋아하는 것은 거기에 러시아어로 ‘America’라고 적힌 부분이에요.”

    패션계에서 디자이너로 일하는 사람 가운데 이웃들끼리 국경 문제로 다툴 때 발생하는 인적 비용에 대해 바잘리아만큼 잘 이해하는 사람은 없다. 그는 열두 살때 남동생 구람(그의 비즈니스 파트너)과 함께 1993년에 조지아, 수후미를 점령한 끔찍한 내전 기간 동안 고향을 도망쳐야 했기 때문이다. “오늘날 모두가 전쟁과 난민 이야기를 하죠. 그래서 ‘그래, 그게 무슨 뜻인지 정확하게 알고 있어’라고 털어놓죠”라고 그는 말한다. 봄 패션쇼에서 선보인 드레스 가운데 하나는 그의 가족이 결국 저격수의 저격을 받으며 산을 가로질러 힘겹게 이동하기 전에 방공호(공습 대피소)로 도망가면서 쥐고 있던 침대 시트를 떠올리게 만드는 네모난 오프킬터 화이트 코튼으로 제작했다. 긴 역사를 따라 내려가다 보면, 당시 조지아의 문제는 요즘 스크린에서 지속적으로 공포를 자아내는 사람들이 무자비하게 중동, 유럽, 사하라 사막 이남 아프리카 지역 등지로 강제 이주당하는 사태의 전초전에 불과했다.

    바잘리아는 인격 형성기에(우크라이나의 일부지만 최근 러시아와 갈등을 겪고 있는) 오데사와 독일 뒤셀도르프로 이동했고 결국 벨기에 앤트워프에 있는 왕립 예술학교에서 패션을 공부했다. 그는 2015년 이후로 발렌시아가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파리에서 활동했고, 지난해에는 베트멍에 정착하기로 결정한 후 취리히에서 일하고 있다. 바잘리나는 모든 패션 중심지에서 꽤 떨어진 깨끗하고 조용하며 안전한 중립 지역인 스위스에 거주지를 정했기 때문에, 과거의 트라우마를 긍정적이고 창조적인 에너지로 계속해서 조금씩 전환시켜가고 있다. 발렌시아가 리조트 프린트나 베트멍 파카 위에 국기가 불쑥 등장하고 있지만 수용과 사랑을 나타내는 국제적 무지개 상징과 동등한 위치를 차지한다. 스노보더를 위한 가짜 산을 가을 발렌시아가 패션쇼의 배경으로 설치했고, 산마루와 크레바스에는 다채로운 벽화가 있었다. 그와 그의 팀이 스튜디오에서 스프레이 페인트를 단어에 흩뿌려 작업한것이라고 바잘리아는 주장했다. 만화풍의 웃는 얼굴 그림과 발렌시아가 로고 사이에 두 개의 슬로건(‘명심하라’와 ‘국경 없는’)이 금방 눈에 띄었다.

      에디터
      SARAH MOW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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