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

사물에 건네는 작별 인사

2023.02.20

by VOGUE

    사물에 건네는 작별 인사

    ‘프로 독거인’으로서 삶을 생생하게 말하던 작가 이숙명이 에세이집 <사물의 중력>을 펴냈다. 지난 몇 년간 그녀가 하루도 빠짐없이 무언가를 내다 버린 이유.

    #지금
    <혼자서 완전하게> 출간 이후 어떻게 지냈나요?
    <혼자서 완전하게>를 발리에서 써서 보내고 출간할 때쯤 한국에 들어갔어요. 그리고 한국 살림을 몽땅 정리해 발리보다 더 시골 섬으로 왔지요. 발리에서 배로 30분쯤 걸리는 누사페니다라는 섬이고, 스쿠버다이빙 명소로 알려져 있습니다. 섬은 큰데 대중교통도 없고 갈 만한 식당도 별로 없고 택배를 주문하면 한 달 뒤쯤 오거나 분실되기 때문에 인터넷 쇼핑은 꿈도 못 꾸는, 한마디로 선택의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는 곳입니다. 작년까지는 인터넷, 전기, 수도도 자주 끊겼는데 요즘은 많이 나아졌습니다. 여기서 개복치 출몰지이자 석양 명소인 크리스털 베이 근처에 작은 테라스가 딸린 스튜디오를 빌려서 삽니다. 지금은 테라스에서 코코넛 숲 너머로 노을이 지는 걸 보면서 답변을 쓰고 있습니다.

    #제목
    제목 <사물의 중력>에 담긴 뜻은 무엇인가요?
    <혼자서 완전하게>를 먼저 쓰긴 했지만 기획은 동시에 한 책입니다. 기획 당시에는 내가 애착을 느낀, 나를 끌어당긴 물건에 대해 써보자는 거였어요. 물건을 향한 심리적 끌림을 중력으로 표현한 거죠. 그런데 책을 쓰는 동안 상황이 변하면서 의미가 달라졌습니다. 저는 고등학생 때부터 자취를 한 데다 남편, 자식도 없고 직장도 없고 비록 수입은 보잘것없지만 컴퓨터만 있으면 세계 어디서든 일할 수 있습니다. 굳이 물가 비싸고 공기 나쁜 서울에 살 필요가 없어요. 그런데 막상 어디 장기 여행을 갈라치면 물건이 발목을 잡는 겁니다. 내 베이스캠프는 서울인데, 그럼 언제든 돌아올 수 있게 짐을 어디다 보관해야 하잖아요? 그런데 단지 짐 때문에 집이나 창고를 운영하기에는 돈이 너무 아깝단 말이죠. 그러자 짐이 족쇄처럼 느껴졌어요. 지난번 발리에 갈 때는 집과 짐을 고스란히 지인에게 빌려주고 갔는데, 한국에 돌아가면서 그런 생각을 했어요. ‘내가 지금 굳이 한국에 들어가야 할 이유가 있나? 아, 집과 짐이 거기 있지.’ 물건이 나를 자꾸 같은 자리로 돌아가서 발붙이게 만드는 중력이었던 거예요. 그러니까 ‘끌림’에서 ‘족쇄’로 의미가 바뀐 거죠.

    #정리
    물건을 정리하기로 결심한 계기는 무엇인가요?
    홀가분해지고 싶었습니다. 20년 넘게 혼자 살다 보니 쓸데없는 짐도 많고, 워낙 정갈한 공간을 좋아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언젠가부터 물건을 내다 버리는 게 취미가 됐습니다. 버릴수록 기분이 좋더라고요. 문제는 그런 식으로 버려서는 끝이 안 난다는 겁니다. ‘싸그리’ 정리하고 다시 시작하면 정말 개운할 것 같았죠. 그런 상황을 나 자신에게 강요할 계기가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일단 편도 항공권을 끊어놓고 한국 생활을 정리했습니다. 떠나고 싶어서 정리했다기보다 정리하고 싶어서 떠난 거죠. 정말 과감하게 버리게 되더군요.

    #교감
    많은 물건을 버렸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책에서 물건에 대한 애정이 고스란히 느껴집니다. 물건과 나눈 교감의 순간에 대해 말씀해주세요.
    책을 기획한 동기가 TV 때문이었어요. 20년 가까이 된 브라운관 TV가 있는데 어느 날부터 고장 나서 화면이 작아지더라고요. 그제야 생각해보니 집에 들어가면 항상 무의식적으로 TV를 켜놨기 때문에 그게 없으면 굉장히 적적할 것 같았어요. 마침 패션 잡지에 다닐 땐데, 마감 후기에 ‘떠나지 마, 골드스타’라는 원고를 썼어요. 처음으로 ‘반려물건’이라는 개념을 떠올린 순간이었죠. 그걸 쓰면서 저 자신도 따뜻하던 기억이 있어서 <사물의 중력>까지 쓰게 되었고요.

    #새로운중력
    요즘 새롭게 관심을 갖게 된 물건에 대해 말씀해주세요.
    올해 비싼 요가 매트를 샀습니다. 예전 같으면 가성비 따지느라 소재 연구하고 국내외 리뷰 다 찾아 읽고 몇 날 며칠 걸렸을 텐데 이번엔 그냥 ‘요가 매트계의 에르메스’라는 별명만 듣고 샀어요. 구질구질한 자취 시절 물건을 정리하면서 결심한 게 ‘이제 뭘 살 거면 제대로 된 걸 사고 아님 말자’였거든요. 그래서 ‘말자’ 하는 품목이 더 많지만 요가 매트는 아주 목돈이 드는 건 아니니까요. 비싼 걸 사면 아까워서라도 요가를 열심히 할 것 같았고요. 좋은 매트인지는 모르겠지만 잘 쓰고 있습니다.

    #변화
    물건으로 둘러싸인 과거와 지금의 삶을 비교해주신다면?
    미니멀리즘 책을 보면 ‘짐을 버리면 살이 빠진다’는 내용이 종종 있는데, 그런 기적은 저에게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다만 언제 어디든 가볍게 떠날 수 있게 되었고, 그러니 서울의 주거 비용 걱정, 거기 딸려오는 미래에 대한 걱정이 많이 옅어졌죠.

    #유머
    작가님의 글에는 은근한 유머가 배어 있어서 늘 재미있게 읽곤 합니다. 삶에서 유머를 잃지 않는 법에 대해 알려주세요.
    방법은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웃기려고 웃기는 게 아니라, 사람이 부주의하고 허술해서 엉뚱한 실수, 황당한 상황을 자주 겪고, 그걸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글로 쓰니 유머가 돼버린 것 같거든요. 부주의하고 허술한 사람이 되시라고 권할 수는 없고, 그나마 부끄러움을 모른다는 대목이 노하우가 될까요? 글 쓰는 사람이 되기 전에는 사실 저도 진지하고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편이었는데, 매달 마감하면서 한 줄짜리 아이디어도 갈급한 상황이 된 후부터는 무슨 일이 생겨도 ‘앗, 이건 써먹을 수 있겠다! 어떻게 이야기로 풀지?’라는 생각이 먼저 드니까 항상 상황을 동떨어져서 보고 감정을 덜 쓰게 되더라고요. 아마 제 책을 읽으면 ‘저런 사람도 있는데 내가 뭐가 부끄럽냐’라는 자신감을 얻으실 수 있을 겁니다.

    #문장
    <사물의 중력>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문장을 꼽아주세요.
    “고여 있을 때보다 흘러갈 때 훨씬 건강하다”고 쓴 기억이 있는데 주어가 뭔지는 잊어버렸네요. 아마 ‘인생’이 아닐까 싶은데, 원고 파일을 열어보는 대신 건강하게 흘러가겠습니다.

      에디터
      조소현
      포토그래퍼
      COURTESY PHOT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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