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직접 만드는 책과 음반
기존 구조에서 벗어나 자체 제작하려는 시도가 음악계와 출판계에 늘고 있다. 실물 음반 수요가 줄고, 다른 생각에 위험을 감수하지 않으려는 시대의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DIY MUSIC 2017년 9월부터 1년 조금 넘는 기간 동안 V 라이브의 캐스퍼 라디오(Casper Radio) 채널에서 <하박국의 박국박국해>라는 인디 음악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게스트로 출연한 음악가는 약 40여 팀. 그중에서 예서, 키스누, 테림, TFO 등 절반은 스스로 음반을 제작하고 매니지먼트사 없이 활동하는 DIY 음악가다. 캐스퍼 라디오는 십센치, 옥상달빛 등이 속한 매직스트로베리사운드(Magic Strawberry Sound, 이하 MSB)에서 운영하는 인터넷 방송국이다. MSB는 레이블, 매니지먼트, 에이전시를 겸한다.작고 편향된 국내 음악 산업에서 대부분의 한국 레이블은 매니지먼트와 에이전시에 발을 걸친다. 약 3년 전부터 MSB는 영상 미디어와 유통에도 손을 뻗었다. 인디 음악가의 음원을 스트리밍 서비스에 유통하는 포크라노스(Poclanos)는 MSB의 자회사다. 요약하면 MSB는 이제 레이블, 매니지먼트, 에이전시, 영상 미디어, 유통을 모두 하는 회사다. 내가 운영하는 레이블 영기획(Young,Gifted&Wack Records)에 포크라노스는 좋은 파트너다. 독점 유통을 조건으로 먼저 투자하고(업계 용어로 ‘마이킹’이라고 한다), 페스티벌에 우리 음악가를 추천하고, 우리 입장에서 협상력이 약한 음원 스트리밍 서비스 분야에 지원과 조언을 아끼지 않는다. 포크라노스는 음원 유통뿐 아니라 프로모션 콘텐츠 제작, 컨설팅, 행사와 페스티벌 섭외 등의 일을 겸한다. 레이블이 하는 일을 함께 하는 셈이다. 이런 측면에서 포크라노스는 인디 음악 레이블의 잠재적 경쟁사이기도 하다. 음악가가 레이블을 통해서 하던 일을 유통사와 직접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음원 스트리밍 서비스 스포티파이(Spotify)는 지난 6월 음악가와 직접 유통이 가능한 시스템을 만들겠다고 선언했다. 이미 스포티파이는 아티스트에게 자신의 서비스에서 음악이 어떻게 소비되는지 볼 수 있는 스포티파이 포 아티스트(Spotify for Artists)를 운영하고, 이는 베스트 프랙티스(Best Practices)라는 코너를 통해 음악가가 어떻게 음악을 알릴 수 있는지도 알려준다. 플레이리스트에 노출되는 법, 음악가로서 컨셉을 잡는 법, 심지어는 정신력을 관리하는 법까지. 모두 레이블이 음악가와 함께 하던 일이다.
잠시 정리하고 넘어가자. 음악가는 음악을 만든다. 레이블은 인프라와 비용을 투자해 무형의 존재인 음악을 들을 수 있는 포맷의 음반을 제작한다. 매니지먼트사는 음악가의 외부 업무를 관리한다. 에이전시는 공연, 행사 또는 페스티벌 기획사와 음악가 사이에 존재한다. 음악가는 음반, 공연, 행사 등에서 발생하는 비용을 위에 언급한 회사와 나눠 가진다. 언급했듯 한국의 음악 산업은 각각의 업무가 존재할 수 있을 만큼 규모가 크지 않다. 인디 음악 레이블의 어려움은 여기에서 온다. 다른 곳과 나누어 해야 하는 업무를 전담 한다는 건 그만큼 노동 강도가 높다는 얘기다. 그래야 겨우 유지할 수 있다. 음악 마니아가 중심이 되어 만든 한국의 1세대 인디 음악 레이블이 하나둘 자취를 감추거나, 업종을 바꾸는 건 그런 이유 때문이다. 거칠게 말하면 돈 벌기가 쉽지 않다. 레이블이 돈을 못 버니 음악가도 별수 없다. 그 와중에 환경은 변하고 있다. 음반 제작에 드는 인프라와 비용을 스스로 충당할 수 있다. 세션은 가상 악기로, 레코딩은 홈 스튜디오에서. 뮤직비디오 제작은 비슷한 위치에 있는 영상 아티스트와 협업을 통해 비용을 줄일 수 있다. 제작비가 많이 들고 음원보다 신경 쓸 게 많은 실물 음반은 수요가 줄었다. 하지 않거나 소량만 제한적으로 해도 된다. 지원 프로그램, 크라우드펀딩 등 제작비를 마련할 수 있는 경로도 늘었다. 프로모션은 SNS로. 요즘은 외부와 비즈니스도 대부분 여기서 이뤄진다. 레이블과 함께할 이유가 점점 사라지는 셈이다.
수입을 독차지할 수 있게 되었다고 DIY 음악가가 전보다 나은 환경에 처한 건 아니다. 혼자서 모든 일을 해야 하는 만큼 음악에만 집중하기 어렵다. 일정 수준 이상 자신의 시장을 만든 음악가가 레이블과 계약하는 이유다. 쉽게 음악을 만들고 유통할 수 있다는 건 경쟁자가 늘었다는 얘기기도 하다. ‘홍대’라는 물리적인 공간으로 존재하던 인디 음악 시장은 거의 사라지고 이제 메인스트림 음악가와 같은 타임라인에서 경쟁해야 한다. 스마트폰으로 음악을 듣는 시대, 단위를 넓히면 스마트폰에서 즐길 수 있는 콘텐츠도 경쟁자다. 닌텐도의 경쟁사가 나이키라는 말처럼 음악가의 경쟁사는 넷플릭스, 온라인 게임, SNS다. 물론 물리적인 공간에 구속되지 않기에 얻는 이점도 있다. 인터넷이 존재하는 곳이라면 어느 곳이든 자신의 음악을 전파하고 소통할 수 있다.
스트리밍 시대에서 음악 소비의 큰 축이 되어가는 건 공연이다. 아직 공연은 (VR 기술이 지금보다 발달하지 않는 이상) 물리적인 공간에서만 가능하다. 미국이나 유럽이 그랬던 것처럼 아시아의 DIY 음악가도 이웃 국가를 살피고 있다. 88라이징(88rising) 같은 아시아 음악가를 다루는 미디어 겸 레이블이 생기고, 몇차례 내한 공연을 한 품 비푸릿(Phum Viphurit), 선셋 롤러코스터(Sunset Rollercoaster)처럼 아시아에서 활동하며 인기를 얻은 음악가가 늘고 있다. 이들의 음악을 듣다 보면 스포티파이나 유튜브의 알고리즘은 아시아에 속한 비슷한 음악을 추천한다. 아티스트 포 스포티파이에서 확인한 우리 음악을 가장 많이 소비하는 해외 도시는 모두 방콕, 싱가포르, 타이베이 등 아시아 도시다. 동시대를 사는 아시아 음악 신이 음악가와 소비자의 가시권에 들어오고 있다.
지난 10월 열린 어도비 맥스 2018(Adobe Max 2018) 이벤트에서 어도비 시스템즈 CEO 샨타누 나라옌(Shantanu Narayen)은 “창의성의 황금기가 왔으며, 미래는 창작자에 의해 이뤄진다”고 말했다. 비단 음악뿐 아니라 기술의 발달과 미디어 환경의 변화로 모든 분야에서 1인 창작자는 늘어나는 추세다. 나는 얼마 전 ‘기술인간’이라는 유튜브 채널을 만들었다. 1인 유튜브 크리에이터가 된 거다. 나 같은 이는 앞으로도 계속 늘어날 것이다. 창작은 소통이다. 전보다 빠르고 광범위한 소통이 가능한 시대. 우리가 보게 될 미래는 개개인의 창작이 꽃피는 아름다운 풍경일까, 개인 단위로 쉼 없이 무한 경쟁해야 하는 악몽 같은 순간일까. 모든 DIY 음악가와 1인 창작자에게 응원을 보낸다. —하박국(영기획 대표, 유튜브 채널 ‘기술인간’ 크리에이터)
DIY BOOK 먼저 질문 하나. 출판은 전문 직종일까 아닐까? 누구라도 쉽게 출판사를 차리고 책을 내겠다는 걸 보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 같지만, 난해한 어문 규정과 미학적 기준에 맞춰 글을 매만지는 능력에다 디자인, 조판, 제작 등의 복잡한 프로세스를 알아야 한다는 점에서는 전문직 같기도 하다.
물론 책이란 움베르토 에코가 말한 대로 “그 자체로 발명이 끝난 가장 단순한 도구”이기 때문에, 책의 완성도와 판매 가능성을 무시하면 누구나 만들 수 있는것 같기는 하다. ‘冊’이라는 한자가 보여주듯 대나무편을 엮어서 묶고 먹으로 글자를 써도 책이었으니까. 그래서 〈한국표준산업분류〉는 예전엔 출판을 ‘제조업’으로 분류했다가, 이건 너무했다 싶었는지 최근 ‘문화·서비스업’으로 바꾸었다. 인쇄소에서 아무리 대량으로 책을 찍어낸다 해도, 출판의 핵심은 글로 된 무형적 콘텐츠를 다루는 데 있지 컨베이어 벨트 위의 컵라면처럼 볼 수는 없다는 걸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중요한 건 이것이다. 출판은 전문직 같지만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이다. 글이 좋다고 주변 평가가 자자하거나 책을 한두 권 내서 쓰디쓴 실패를 맛본 작가들(예비군 포함)이 직접 출판사를 차리는 것은 ‘나도 할 수 있다!’고 믿어서일 것이다. 자기 글의 가치를 모르거나 헛발을 딛는 출판사를 만난 저자, 글 쓴 의도를 출판사가 제대로 담아내지 못해 책이 실패했다고 믿는 저자라면 더욱 그런 생각이 들 것이다. 1인 출판사가 탄생하는 순간이다. 또 다른 경우도 있다. 이미 높은 인지도에 충성 독자까지 확보하여 슬며시 욕심이 생긴 경우다. 책 정가의 10%라는 인세율은 만고불변인데, 별로 한 것도 없는 출판사가 왠지 더 많은 이익을 취하는 것 같고 손해를 보는 느낌이 작가에게 드는 것이다. 쓰는 책마다 수십만 부가 나간 도올 김용옥이 그런 경우다. 그는 여태 자기 출판사에서만 책을낸다. 하지만 이런 계산속은 드문 경우이고 1인 독립 출판을 하는 작가 대부분은 ‘나의 뜻대로’ 책을 펴내고 싶어서일 것이다(라고 믿고 싶다).
작가가 자기 책을 직접 출판하는 이유는 영화계에서 흔히 보는 독립영화나 대중음악계의 인디 음악 또는 DIY 뮤직과는 많이 다른 듯하다. 영화와 음악 모두 디지털이라는 무한 복제 능력으로 온라인 유통과 배급을 장악한 대자본이 시장을 장악했기에, 독립 제작자나 뮤지션은 이들의 횡포로부터 창작자가 응당 가져야 할 최소한의 이익을 지키려는 데 이유가 있다. 반면 책은 여전히 손으로 만지는 ‘물성’에 기반을 둔 탓에 제작과 마케팅에서 출판사가 짊어져야 할 비용과 ‘리스크’가 크다. 결국 작가들의 독립출판은 이런 리스크를 스스로 떠안겠다는 것이므로 이익 확보의 단순한 논리로 보기는 어렵다는 얘기다.
여기서 잠깐 용어 정리. 혼자서 출판하는 형태를 두고 흔히 ‘1인 출판’이나 ‘독립출판’이라는 말을 쓰지만 엄연히 다르다. 사실 한국의 거의 모든 출판사는 규모가 아무리 커도 오너가 출판사 대표로 기획과 경영을 직접 책임진다는 점에서 독립출판사다. 자본이 따로 있고 주주 이익을 위해 움직이는 서구식 기업 출판과는 다르다. 반면 1인 출판은 개인이 독립적으로 출판하는 경우를 일컫는 것 같지만, 사실은 운영 규모만 일컫는 용어다. 1인 출판을 하고 있지만 큰 출판사에 소속된 임프린트 출판사도 있는 것이다. 1인 출판이 독립 출판이 아닐 수도 있고, 독립출판이 반드시 소규모 출판 방식만 가리키는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작가는 창작물을 최초로 계획하고 만드는 사람이므로 당연히 자기 의도를 고스란히 담은 책을 내고 싶어 한다. 제목은 물론이고 책의 판형, 디자인까지 자신의 기호와 독자의 의견을 반영한 책을 만들고 싶어 한다. 책을 쓰는 일과 만드는 일은 엄밀하게 보면 분리될 수 없고, 모든 구상이 글을 쓸 때부터 차츰 형태를 갖춰가기 때문이다. 좋은 출판사는 이런 작가의 의도를 금방 이해하거나 조정할 능력이 있고, 작가의 생각이 허황되다면 설득할 능력도 있다. 불행히도 이런 출판사를 만나지 못한 작가는 이제 스스로 책을 내려 한다. 그렇게 하여 큰 성공을 거둔 경우를 우리는 심심찮게 본다. 먼저 <언어의 온도> <말의 품격> 등으로 밀리언 셀러 반열에 오른 이기주 작가가 있다. 그는 젊은 감각에 맞는 짧고 감성적인 필치로 얇고 아담한 책을 펴내 독자의 욕구를 적중시켰다. 그런 그도 예전에는 다른 출판사에서 수차례 책을 냈지만 별 재미를 보지 못한 작가임을 아시는지. 깜짝 놀랄 데뷔전을 한 무명의 저자 백세희의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는 더 특이한 경우다. 그는 창작자 펀딩 플랫폼인 ‘텀블벅’의 작가로 한정판 책을 냈다가 큰 호응을 얻고 출판사에서 정식으로 다시 책을 냈다. 떡볶이가 먹고 싶은 자살 충동자의 웃지 못할 이중적 체험을 주제로 한 심리치유서다. 이민경이 펴낸 <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입이 트이는 페미니즘)>은 페미니즘의 중요한 측면을 다뤄 각광을 받았다. 아마도 저자는 자기 세대 여성에게는 너무나 중요한 주제를 다루었음에도, 경력도 인지도도 일천한 자신의 원고를 어느 출판사도 낼 것 같지 않아 자가 출판에 도전했을 것이다.
작가들의 자가 출판은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것이다. 정상적 방식을 벗어난 이런 출판이 계속 이어질 거라는 점에서는 기존 출판사부터 반성해야 한다. 이미 잘 알려진, 방송을 탄, 전작으로 검증된, 그런 작가들의 책에만 쏠리는 안이한 기획 태도를 접고, 무명이지만 참신하고 독특한 콘텐츠를 들고 나오는 작가들을 알아보는 노력 말이다. 한편 작가들은 자가 출판으로 성공한 사례보다는 수십, 수백 배 더 많은 실패 사례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나는 학계, 문단, 문화계의 괜찮은 필자가 직접 출판에 나섰다가 큰 손해를 보고 한두 해 만에 접은 경우를 아주 많이 알고 있다.
‘나의 책’을 내고 싶다면, 그럼에도 출판사에서 줄곧 퇴짜만 받는다면, 직접 출판을 하시라. 단, 나의 글과 안목이 정말 남다르고 수준 높은지 냉정하게 평가하시라. 그게 아니라면 어떻게든 출판사를 만나 편집자와 머리를 맞대기를 권한다. 두 경우 다 좋다. —안희곤(사월의책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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