뷰티 크리에이터가 된 공간 디자이너 양태오
공간 디자이너 양태오가 뷰티 크리에이터가 됐다. 불면의 밤을 달랠 한방 차가 불러온 아름다운 나비효과.
살짝 피곤해 보여요.
어제 저녁 지미 추 행사에 다녀왔어요. 디자이너가 방한했는데 만나보니 꽤 친절했어요. 무엇보다 한국에 대한 관심이 지대했죠. 건축양식이 흥미롭다, 서로 다른 높낮이는 어디에서 비롯된 거며 그 미학이 뭔지 너무 궁금하다 등등. 학회에서 오갈 만한 질문을 던지더군요. 오늘 경복궁과 인사동을 둘러봤는데 완성되지 않은 아름다움이 인상적이라고 말했어요. 그것을 아름다움으로 볼지, 이 나라만의 특색으로 볼지 모르겠다는 물음도 따라왔죠. 일본처럼 정제된 아름다움이 존재하지 않고 키치한 부분이 상당한 것 같다면서요. 그때 갑자기 뜨끔했어요. ‘브라질 같다’는 표현을 하더군요. 좋은 곳은 아주 좋고 좋지 않은 곳은 아주 별로고. 확고한 취향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서울에 대한 총평이었죠. 사실 한국인으로서 감추고 싶은 것도 있잖아요. 그래서 더 매력적인 것 같기도 해요. 발전할 여지가 있고 충분히 바뀔 수 있으니까요.
그게 서울의 매력이죠. 지금 <보그>에 맨 먼저 공개한 매장과 화장품은 기대 이상이에요. 뷰티 크리에이터의 삶은 어떤가요?
솔직히 그렇게 달라진 것은 없어요. 평소와 마찬가지로 늘 어떻게 하면 우리가 지닌 것을 현대적으로, 그러니까 현재와 과거를 어떻게 연결 지을지 고민하거든요. 이 공간도 사실 우리 문화가 지닌 것, 우리의 헤리티지를 어떻게 현대적으로 재해석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에서 시작됐어요. ‘이스 라이브러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매번 느끼지만 피부가 참 좋아요. 타고났나요?
피부가 좋아진 계기는 12년 전 접한 한방 차 덕분이라 믿어요. 저는 불면증이 정말 심했거든요. 초기엔 일이 너무 없어서 스트레스로 인해 잠을 못 이뤘어요. 제가 안쓰러웠던지 부모님이 한방 치료를 권하더군요. 아버지의 지인께서 화병과 불면증 개선에 일가견이 있는 한의사거든요. 원장님께 치료받았는데 마음이 편해지는 것은 물론 호흡이 좋아지더라고요. 한 달쯤 숙면하다 보니 피부가 맑아지더군요. 자기 전 꾸준히 마신 차가 전부인데 6개월 후 만나는 사람마다 ‘피부 좋다’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어요. 지금은 베개만 베도 자요. 그럼에도 차를 끊지 못하는 것은 오직 하나, 피부 때문이에요. 차를 마신 지 1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제 일상에 한방 티타임은 빼놓을 수 없죠.
이 영험한 차를 미용 성분으로 활용해야겠다는 생각은 언제부터 했나요?
3년 전 제 주치의이신 한의사 원장님이 바이오 신소재 연구실을 열었어요. 쉽게 말해 한방 성분 연구실이죠. 그때 원장님에게 우스갯소리로 “제게 처방해준 스트레스, 화병, 불면증 치료제에 분명 피부를 좋게 하는 성분이 있을 것이다. 그 성분이 발견되면 나랑 무조건 동업해야 한다”고 말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연락이 왔어요. 제 말이 사실이라고요. 화장품 사업을 준비하는 3년 중 디자인 작업은 1년밖에 걸리지 않았어요. 2년은 해당 성분 특허출원에 매진했습니다. 동물실험은 안 했어요. 일명 ‘3D 스킨’이라고 인공 피부에 해당 성분을 임상 시험하는 과정이 험난했지만 후회는 없습니다.
이미 한방을 앞세우는 뷰티 브랜드가 적잖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현대적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느냐에무게를 실었어요. 단순히 화장품 브랜드를 뛰어넘어 하나의 라이프스타일로 자리 잡는 것이 ‘이스 라이브러리’의 최종 목표니까요. 그렇게 하기 위해선 공간이 따라야 합니다. 인테리어 디자이너인 제가 브랜드 대표이기에 가능한 접근이죠. 인테리어 디자인에도 시나리오 작업이 있어요. 그래서 공간을 구성할 때 단순히 아름다운 공간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 거주하는 사람을 상상하면서 그림을 그립니다. 어떠한 가구, 집기, 향, 음악이 추가로 따라붙으면서 한 사람이 서 있는 아름다운 공간을 만들게 됩니다. 조도 역시 빠질 수 없죠. 한방 화장품을 쓰는 사람도 충분히 젊고 유머러스할 수 있다고 믿어요. 그래서 화장품 외에 가방, 향초, 비누 스탠드를 함께 출시했어요.
세 명의 창립자가 의기를 투합해 만든 브랜드라는 점도 흥미로워요.
성분 개발에 힘쓰는 한의사, 공간 디자이너, 국제갤러리 큐레이터 송보영 이사. 우리는 하나의 제품을 놓고 끊임없이 토론해요. 실질적 측면, 디자인 측면, 동시대 측면까지. 한방 화장품이 젊은이들에게 뭘 제안할 수 있을지,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늘 머리를 맞대고 고민해요. 매장 위치 선정부터 브랜드 소개 책자, 한 잔의 차를 대접하더라도 어떻게 응대할 건지 등등. 큰 제스처를 지닌 기업보다 매우 소극적인 움직임일 수 있지만 라이프스타일 브랜드로서의 한방 화장품은 우리가 최초이자 최고일 거라 자부합니다.
‘이스 라이브러리’의 ‘이스’는 어떤 의미인가요?
중국어로는 의미, 생각을 뜻해요. 지금 쓰이진 않지만 고대 영어로는 편안함(Easy), 부드러움(Smooth)이라는 해석도 있죠. ‘이스’라는 단어는 우연히 발견한 창조물이에요. 오랜 고민 끝에, 이 화장품이 고객에게 어떠한 가치를 전할 것이냐는 물음을 시작으로 해당 키워드를 정리했죠. 혁신적(Evolutionary)인 동시에 효과적(Effective)일 것, 다음이 업적(Achievement) 그리고 이러한 모든 행위의 바탕에는 전통(Traditional)과 변화(Transformation)가 숨 쉴 것. 마지막으로 유산(Heritage)과 건강(Healthy). 이 단어들의 앞 글자를 딴 것이 ‘이스(EATH)’입니다.
키워드의 조합으로 이뤄진 신조어군요.
어떤 이름을 짓더라도 뒤에는 라이브러리를 붙이자는 공통 의견이 있었어요. 의외의 복병은 발음이더군요. 열에 아홉이 어떻게 발음해야 하느냐고 되물어요. 이스예요, 어스예요, 이츠예요? 정답은 ‘이스’예요.(웃음)
다른 후보로는 어떤 게 있는지 궁금해지는데요?
말도 안 되는 단어 역시 많았어요. 그중 히트(HEAT)가 히트였죠. 발음조차 안 되는 것도 상당했고요. 그래서 정리된 항목이 ‘받침을 없애자’였고 서양인들이 봤을 때 동양적이고, 동양인들이 봤을 때 서양적 의미를 내포해야 했어요. 친한 친구가 “이스는 중국어로 생각, 의미란 뜻을 지니고 고대영어로는 이지를 의미한다”고 얘기해주어 정말 다행이었어요. 구글링해보니 그렇더라고요. 지금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것처럼 우쭐대지만요.(웃음) 알고 보니 더럽다는 의미라거나 교수형 같은 부정적 의미를 담고 있었다면 어쩔 뻔했나요?
생각만 해도 끔찍하군요. 그동안 어떤 화장품을 썼나요?
SK-II를 오래 썼습니다. 에센스는 ‘피테라 에센스’ , 크림은 라 메르의 ‘크렘 드 라 메르’ , 라프레리도 좋아했죠. 럭셔리 브랜드 제품의 실사용자로서 화장품 이해도가 높아졌고, 제품 개발에 좋은 자료가 됐어요. 예를 들어 나의 창조물은 라프레리처럼 강한 향이 있으면 안 되고 피테라 에센스 사용 직후의 건조함이 있어선 곤란하며, 라 메르 크림의 충만한 영양 공급 효과, 크림을 바르고 아침에 일어났을 때 느껴지는 기분 좋은 쫀쫀함은 가져가되 끈적임은 금물. 이런 식으로 아쉬움을 보완하는 과정이 이스 라이브러리의 완성도를 높인 듯합니다.
2월에 나올 시트 마스크는 형태부터 남다르다고 들었어요.
직업 특성상 늘 피부가 위협받는 환경에 노출되어왔어요. 인테리어업 종사자라면 누구나 공감할 겁니다. 시멘트 가루, 나뭇조각, 미세먼지 등 공사장이라는 최악의 상황에 처해 있으니까요. 그래서 출근 전에 늘 화장 솜에 토너 담뿍 적셔 양 볼에 붙이고 마스크를 착용한 뒤 집을 나섰어요. 이스 라이브러리의 시트 마스크는 유해 환경에 노출된 저와 출장이 잦은 송 이사의 고민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기존 마스크 팩은 오직 집에서만 사용 가능한 홈 케어 제품인 경우가 많아요. 우리의 마스크 팩은 무조건 작고 콤팩트하길 원했죠. 그다음 조건은 점착력이 뛰어날 것. 얼굴에 붙이고 돌아다녀도 무방할 만큼이요. 여담이지만 송 이사는 1년 10개월을 해외에 나가 있어요. 출장 횟수로 따지면 평균 20회가 넘죠. 피부 관리에 열심인 그녀는 기내에서 사용 가능한 요란스럽지 않은 시트 마스크를 원했어요. 그렇게 탄생한 게 작고 동그란 형태의 마스크 팩입니다.
우리 여자들의 필요를 제대로 간파했군요.
제품은 도구에 불과해요. 송 이사는 그림을 판매해 한 사람의 공간을 아름답게 꾸며주는 것이 삶의 질을 높인다는 의미에서 자신을 ‘도구’라 칭하죠. 그녀는 예술이 최종적 목적이 되는 것이 두렵다고 습관처럼 말해요. 저 역시 공간만 아름다워선 안 된다고 생각해요. 사람이 돋보여야 공간도 아름다운 법이죠. 한의사 원장님도 한의학의 위대함을 강조하기보다 환자의 건강, 사소하게 피부가 좋아졌거나 탈모가 해결됐을 때 오는 희열이 더 크다고 말해요. 화장품 자체가 돋보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 제품을 통해 피부가 좋아지고 예뻐지는 것이 최종 목표입니다.
이스 라이브러리를 이루는 여섯 개 제품(젤 클렌저, 토너, 세럼, 페이스 & 아이 크림, 선크림, 비누) 중 가장 애착이 가는 제품은 뭔가요?
두말할 필요 없이 세럼이죠. 가장 고집을 부린 제품이거든요. 홍삼, 녹용, 숙지황 조합으로 완성한 특허 성분 ‘AYM’이 무려 55%나 함유돼 있어요. 모 브랜드의 베스트셀링 에센스는 유효 성분 함유량이 23%에 불과해요. 또 흡수력 면에서도 자신 있어요. 증류 기법으로 완성한 흡수력은 써본 사람들만 알죠. 유효 성분 함유량 55%라고 하면 굉장히 ‘진득한’ 텍스처를 떠올릴 테지만 더없이 산뜻해요. 끈적이기는커녕 물처럼 가볍게 스미죠.
한방 특유의 향에 대한 호불호는 갈릴 듯해요.
향을 완화시키기 위해 계피나 박하를 넣으면 어떨까 싶었지만, 찬 성분은 피부에 부작용이 있을 수 있어 안 된다고 원장님이 결사반대했죠. 문득 본연의 향을 덮으려고 향료를 추가하는 것 자체가 좀 아이러니란 생각이 들더군요. 이 좋은 성분을 증류를 통해 채집했기에 향이 나는 게 당연해 숨길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내린 결론이 ‘본질에 집중하자’입니다.
디자인 작업은 어떻게 진행했나요?
기능적인 측면은 기본, 손이 닿지 않는 곳까지 신경 썼어요. 예로 크림과 선크림도 스패출러가 필요 없는 튜브 형태라 얼굴에 직접 바를 수 있죠. 세부 디자인은 서재에서 영감을 얻었습니다. 한국 전통 책, 특히 한의학 책은 굉장히 얇은 종이로 만들어요. 하드커버가 아니라서 세로로 세울 수 없고 가로로 뉘어 보관하죠. 규장각 사진만 봐도 책이 꽂혀 있지 않고 켜켜이 쌓여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어요. 제품 디자인 단계에서 어떻게 하면 한국적인 아름다움을 모던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 고민하던 중 원장님 집무실을 방문했고 그곳에서 <동의보감>을 비롯해 조선시대 한의학 자료의 카피본이 눈에 들어왔어요. 크고 작은 책이 쌓여 있는 모습이 작은 탑 같았죠. 그 모습에 착안해 만든 제품이 토너예요. 그 위에 현대미술에서 본질을 상징하는 돌 모양 뚜껑을 올려 장식 요소로 활용했죠. 세럼은 토너의 형태를 좀더 단순화한 디자인이고요.
어떤 사람들이 이스 라이브러리의 고객이 되길 원하나요?
아름다운 라이프스타일을 갖길 원하는 모든 사람들. 아름다운 피부만큼 삶의 균형을 이루고 싶어 하는 분들이라면 더할 나위 없죠. 정성껏 조리한 양질의 음식을 먹고 아름다운 것을 보고 또 좋은 공간을 누리며 아름다운 인간이 완성된다고 생각해요. 이런 것들의 가치를 찾고 싶어 하는 분들, 가치를 느끼고 즐거워하시는 분들이 곧 이스 라이브러리안이죠.
영감은 주로 어디서 얻나요?
삶. 여행, 전시, 우연히 들어간 카페에서 펴본 책에서도 얻을 수 있죠. 중요한 사실은 영감을 얻는다는 것보다 그 영감을 어떻게 포착해 내 것으로 만드느냐에 있어요. 한 유명한 시인이 이렇게 말했어요. 밭에서 일하다 영감이 머리를 스쳐 지나가면 이를 포착하기 위해 일을 멈추고 작업실로 뛰어간다고요. 그걸 제때 포착하지 않으면 그 영감이 내 머리를 지나 다른 사람에게 간다는 말에 무릎을 탁 쳤어요. 그날 이후로 영감을 얻는 것보다 그 영감을 어떻게 잡아두느냐에 포커스를 맞춥니다. 이거다 싶으면 무조건 스마트폰으로 찍고, 수첩에 적죠.
마지막 질문입니다. 당신의 최초 뷰티 메모리는?
어머니의 콜드크림 마사지. 어머니는 고등학생 때부터 사용해온 콜드크림의 단종을 누구보다 안타까워해요. 콜드크림을 이용해 아침저녁으로 마사지하는 피부 미인 어머니로부터 관리의 중요성을 깨달았죠.
- 에디터
- 이주현
- 포토그래퍼
- 김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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