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비이불로 예술하는 이슬기
작가 이슬기가 누비 장인과 함께한 ‘이불 프로젝트 U’ 옆에 누웠다. 그녀의 이불은 추위를 막아주는 기능 외에도 별별 판을 벌인다.
이슬기 작가의 개인전 <다마스스(Damasese)>가 열리는 갤러리현대. 오방색의 기하학무늬로 누빈 이불이 압도적이다. 작품명은 속담이다. ‘불난 집에 부채질한다’는 초록색 부채꼴이 펼쳐지고, ‘굴러온 호박’에는 노란 원이 사각 프레임을 채운다. 크기는 세로 19.5cm, 가로 15.5cm, 두께 1cm로 이불만 하다. 이슬기 작가의 대표작 ‘이불 프로젝트 U’다. “이불은 덮고 자는 이를 보호하며 추위를 방지해주는 역할을 하잖아요. 하지만 이불 안에서는 더 많은 일이 일어나죠. 꿈과 현실의 경계선인 장소이자, 꿈에 영향력을 행하는 주술적인 조각이기도 합니다.”
1992년부터 프랑스에 머무는 작가는 지인에게 선물 받은 한국의 누비이불에 매료됐다. 오방색으로 누비는 방향을 달리해 표현하면 재미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외국인 친구에게 선물하려는 누비이불조차 구하기 힘들 만큼 요즘은 제작하는 이가 드물었다. 수소문 끝에 통영의 누비 장인과 연이 닿아 2014년부터 ‘이불 프로젝트 U’를 선보이고 있다. “처음에 저를 만난 장인께서 놀라셨어요. 화장도 특이하고, 머리도 <스타워즈> 레아 공주처럼 말고 다녔거든요. 하지만 누비 방향을 바꿔 잇는 새로운 형식에 도전 의식을 느끼셨어요. 힘든 작업이거든요. ‘이왕이면 다홍치마’는 바람에 펄럭이는 치마를 상상해서 수평으로 누볐고, ‘오리발 내밀기’는 오리발이 서 있는 모양을 표현하기 위해 수직으로 누볐죠. 작품마다 장인들이 한 땀 한 땀 누비면서 빌었을 염원이 담겨 있어요.” 개인전이 <다마스스>인 이유도 비슷하다. ‘다마스스’는 작가가 만든 단어다. “전구 ‘다마’도 있고, 다마스라는 차도 있고, 수리수리마수리 같은 주술 같기도 하고 여러 가지를 연상시킬 수 있는 단어죠. 제가 장인들과 작업을 많이 하기에, 그분들의 염원을 담은 주술을 지어봤어요.”
‘이불 프로젝트 U’는 2014년 파리의 국립그래픽조형미술재단(FNAGP)의 지원을 받아 시작한 후로, 광주비엔날레 제시카 모건(Jessica Morgan) 총감독의 초청으로 추가 제작했고, 호주의 빅토리아 국립미술관(National Gallery of Victoria), 파리와 스위스 박물관 등에 소장되면서 제작비를 마련할 수 있었다. 파리 장식미술관(Musée des Arts Décoratifs)의 공동전에서 이슬기 작가의 ‘이불 프로젝트 U’를 본 에르메스 측이 협업을 제안하기도 했다. “처음엔 영어 이메일이 왔더군요. 파리에 20년 넘게 살고 있는데 말이죠.(웃음)” 이슬기 작가는 ‘담배 피우는 호랑이’ ‘변방 늙은이의 말’ ‘사마귀가 수레바퀴를 막다’ 세 작품을 12점씩 제작해 2017 밀라노 가구박람회에 전시했고, 지금도 에르메스에서 만날 수 있다. 2019년에는 이케아와 현대 작가의 협업 프로젝트 ‘Art Event 2019’의 일환으로 작업한 러그를 선보인다. 이케아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헨릭 모스트(Henrik Most)는 “집 안의 느낌표가 될 것”이라 설명한다.
전시 직전까지 이슬기 작가는 바구니 작품을 어디에 둘지 고민 중이었다. ‘바구니 프로젝트 W’는 멕시코 오악사카 북부 지역의 200여 명이 사는 작은 마을, 산타마리아 익스카틀란의 장인과 함께했다. “국립아시아문화전당(ACC)이 프랑스 마르세유의 유럽 지중해 문명박물관(MuCEM)과 파트너십을 맺고 전시한 적 있어요. 그때 ACC 큐레이터의 소개로 박물관 지하 수장고의 민속공예품을 봤죠. 그곳에서 온갖 바구니를 보며 창작 욕구가 더해졌죠. 바구니 장인을 찾아 아프리카의 부르키나파소, 말리까지 갔어요. 멕시코의 바구니는 보름달에서 시작됐어요. 한국에선 보름달에 사는 토끼가 방아를 찧는다잖아요. 멕시코도 비슷하단 얘기에 찾아갔죠. 그곳에서 흐느적거리면서도 물건을 담을 수 있어 3D도 2D도 되는 바구니를 봤어요. 현지 공예홍보부 공무원의 추천으로 아스팔트도 깔리지 않은 시골길을 몇 시간씩 달려 그 바구니를 만드는 산타마리아 익스카틀란까지 갔어요. 주민 모두 다섯 살 때부터 바구니와 솜브레로를 짜며 생활하는 마을이죠.” 그곳에서 또 다른 수확은 언어였다. 16세기 스페인 침략 전에는 3만 명이 살던 큰 도시였고, 그곳에서만 쓰는 ‘익스카텍(Ixcatec)’이란 언어가 있었다. 현재는 스페인어를 쓰기에 네 명만 익스카텍을 구사할 수 있다. “멸종 위기에 처한 언어를 만난 거죠. 작품명을 그 언어로 짓고 싶었어요. 바구니를 두 개, 세 개씩 붙여 기괴한 모양을 만들었는데, 주민에게 의견을 물어보니까 익스카텍어로 ‘괴물’이라더군요. 그 단어를 작품명으로 썼어요.”
이슬기 작가에게 언어는 무척 중요하다. 다른 예로, 프랑스의 레이스 장인들과 16세기 말 유럽의 레이스를 프랙탈(Fractal, 작은 구조가 전체 구조와 비슷한 형태로 되풀이되는 구조)로 작업한 프로젝트명은 ‘작은 이빨(Petite Dents)’이다. 프랑스어 ‘Dentelle(레이스)’의 어원이 ‘Dent(이빨)’이기 때문이다. 레이스의 실크 실에는 메탈 성분을 넣어 몸에 좋지 않은 전자파를 걸러주는 기능을 한다.
전시에서 새롭게 선보인 작품은 ‘나무 체 프로젝트 O’이다. 우리나라의 되처럼 프랑스에는 곡물을 측량하는 원형의 나무 체 ‘부아소(Boisseau)’가 있다. 나무 체 장인이 30년 된 너도밤나무로 제작해 이슬기 작가가 특정 면에만 색을 입혔다. 2m 높이에 설치된 작품을 밑에서 올려다보니 여우아이요 한글 모음 같기도 하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파리의 국립기술공예박물관(Musée des Arts et Métiers)에서 본 측량기에서 영감을 얻었죠. 부아소는 플라스틱으로 거의 대체되면서 만드는 기술이 사라지고 있어요. 물건이 사라지면 사람, 기술, 기억이 사라지죠.” 그렇기에 이슬기 작가는 기능을 가진 사물에 관심이 많다. “바구니도 담는 기능이 있고, 이불도 덮는 기능, 나무 체도 측량하는 기능이 있죠. 사물은 그 기능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경험을 담습니다. 그렇기에 사물은 사람과 교감하는 대등한 관계라고 생각해요.” 이슬기 작가는 종종 물건의 눈으로 세계를 보려 한다. 혼자 말하는 일회용 컵이 돼보기도 한다. “세상은 우리만 있는 게 아니잖아요. 연필도 살고, 전화기도 살고, 우리보다 나이 많은 물건도 많은데, 왜 인간 중심으로 사는지 의아해요.”
이슬기 작가는 조만간 모로코 북부 산간 지역의 테라코타를 만드는 할머니와 함께한 작품을 선보일 거다. 모로코 시골에 머물 때 친구가 이슬기 작가에게 이런 말을 한 적 있다. “인류학자들의 문화 해석도 시스템 안에 있기에 실제는 다를 수 있다. 한 가지 진실이 아니라 여러 가지 진실이 있다고요. 그렇게 여러 가지 진실을 구하러 다니는 쓸모없는 일을 하는 사람이 예술가죠. 그래서 예술가가 매우 중요한 직업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슬기 작가의 아버지는 동양화를, 어머니는 서양화를 전공한 예술가다. 딸은 부모와 다른 예술을 하려고 조각을 선택했지만. “다섯 살 때인가 부모님의 전시 오프닝에서 작품은 보지 않고 샴페인만 마시던 사람들이 이상했어요. 제 작품은 피부로 봤으면 좋겠어요. 눈이 아니라 피부로 보는 ‘직접 경험’을 해주세요.”_
- 에디터
- 김나랑
- 포토그래퍼
- 이지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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