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서한잔
‘스탠딩’이 유행이다. ‘좌식 코리아’에도 서서 술을 마시는 문화가 정착할 수 있을까.
유튜브에 ‘외국인이 한국인을 구별하는 법’이라는 영상이 종종 올라온다. 외국인들은 경험을 토대로 다양한 증거를 댄다. 풀 메이크업을 했다면, 사각형 백팩을 메고 있다면… 아니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내추럴 본 인 한국인’으로서 추가하고 싶은 구별법이 있다. 모두 서서 웃고 떠드는 스탠딩 파티장에서 꿋꿋하게 앉아 있는 사람이 있다면 100% 한국인이다.
지난가을, 나는 한 샴페인 브랜드가 뉴욕에서 주최한 행사에 참석했다. 유명 아티스트와 협업한 작품을 선보이는 자리. 전 세계 200여 명의 기자가 초대되었고 할리우드 셀러브리티들이 속속 도착했다. 하지만 성대한 자리에 의자는 없었다. 중앙에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이 떠오르는 기다란 테이블만 놓여 있을 뿐이었다. 한국 기자들도 처음에는 술잔을 찰랑거리며 여기저기를 누볐다. 하지만 대체로 30분을 넘기지 못한다. 황제의, 아니 하느님의 샴페인도 그 시간을 연장시키진 못했다. 나는 미련 없이 술잔을 내려놓고 미어캣보다 빠르게 행사장을 스캔했다. 유일하게 의자가 몇 개 놓여 있던 구석에 도착했을 땐 이미 한국 기자들이 모여 있었다. 안면이 있는 (GQ 코리아) 기자를 보자마자 물었다. “같이 좀 앉을까.” 한 의자에서 두 엉덩이가 닿았지만 행복했다. 비로소 안정감을 찾은 나는 새삼 ‘최후의 만찬’을 찾아보았다. 그림 속에서도 그들은 서 있었다.
지난 행사뿐만이 아니다. 베를린에서 열린 시계 론칭 파티에서도, 자동차 시승 행사 애프터 파티에서도 외국인 기자들은 서서 끊임없이 대화를 나누며 술을 마셨고, 한국 기자들은 필사적으로 의자를 찾아다녔다. 행사에 비협조적으로 보일 수 있다는 걸 알지만 서서 마시는 술과 서서 나누는 대화는 한겨울 포방터 시장 돈가스집 줄 서기보다 힘들다. 스틸레토 힐 대신 미들 힐을 선택해도 소용없다. 앉고 싶다는 생각은 대화에 집중을 방해한다. 글로벌 브랜드 홍보 담당자들은 이제 한국 기자들의 ‘좌식 성향’을 잘 안다. 더 이상 “거기 앉아서 뭐하니? 이쪽으로 와서 즐겨!”라고 말하지 않고, 의자를 끌고 오거나 쪼그리고 앉아 눈을 맞춘다. 홍보인의 길도 쉽지 않다.
트렌드 분석가들은 일제히 ‘스탠딩’을 2019년 트렌드 키워드로 꼽았다. 서서 일하는 스탠딩 워크, 공연장 스탠딩석 선호도 증가를 얘기하며 이제 우리도 서서 가볍게 마시는 문화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는가 묻는다. 혼술족과 취하기보다 즐기기 위해 술을 마시는 사람들이 늘고 있음을 이유로 들었다. 나는 이분석이 어떤 트렌드 예측보다 급진적으로 느껴졌다. 미국 문화인류학자 마거릿 미드는 음식 습관을 바꾼다는 것은 종교를 바꾸는 것보다 어렵다고 했는데 라이프스타일의 변화가 본성에 가까운 습성까지 변화시킬 수 있을까. 손윗사람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이동할때를 제외하고는 늘 앉아 있는 우리가 서서 술을 마시기 시작한다면 바닥 생활에서 의자 생활로 이동에 비견할 만한 변화가 일어난 것이라고 생각했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에게도 서서 마시는 술 문화가 있었다. 이제는 전혀 다른 이미지가 되었지만 선술집은 원래 ‘서서 마시는 술집’이라는 뜻이다. 조선후기 김홍도, 신윤복의 그림에는 서서 마시는 조상들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신윤복의 ‘주거사배’에는 바에 해당하는 부뚜막을 둘러싸고 서서 술을 마시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하지만 집 안에 신발을 벗고 들어가고 교자상에서 식사를 하며 책상다리를 민족의 표준 자세로 삼아온 우리에겐 입식보단 좌식이 익숙하다. 일제강점기에 선술집은 잠시 전성기를 맞았지만 곧 사라졌고, 진짜 서서 먹는 술집은 포장마차로 변화했다. 국물 요리를 즐겨 먹고 반주로 술자리를 시작하는 문화도 한몫했을 듯싶다.
앞서 ‘외국’으로 뭉뚱그려 말했지만 일본은 스탠딩을 컨셉으로 내세우고 ‘가볍고 저렴하게 한잔하고 싶은 사람들’은 정직하게 장점을 취한다. ‘다치노미’로 불리는 스탠딩 술집은 역 주변에 포진해 있는데 맛깔난 안주 두어 가지에 맥주 한 잔을 1만원 이내로 먹을 수 있다. 서서 먹는 스시집도 일상적인데 얼마 전에는 서서먹는 프랑스 요릿집도 생겼다. 플랜 플러스 음영준 대표는 긴자에서 프랑스 요리를 먹으려면 수십만 원이 드는데 5,000엔 내외에서 먹을 수 있어 인기라고 전했다. 와인을 잔술로 팔지 않고 병으로만 판매해서 수익을 창출한다고 했다. “일본에는 오래전부터 서서 먹고 마시는 문화가 일상화되어 있어서 딱히 불편하게 느끼지 않아요. 서서 먹는 게 싫은 사람들은 아예 스탠딩 식당을 가지 않죠.”
미국이나 유럽에서도 서서 마시는 술집은 경제성을 보장한다. 술과 음식값이 싸고 팁을 주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사실 이들의 엄청난 사교 욕구가 피로도를 느낄 짬을 주지 않는 것 같기도 하다. 뉴욕의 ‘바’는 직원이 손님을 에스코트해서 앉히는 게 아니라, ‘선착순’ 개념으로 손님이 알아서 자리를 잡는 식이다. 칼럼니스트 홍수경은 뉴욕에 머물면서 가벼운 마음으로 술집에 들렀다가도 항상 옆 사람들과 수다 삼매경에 빠져 오래 머무는 상황이 벌어지곤 한다고 했다. 사실 뉴요커는 술집이 아니라 길에서 만나도 1시간은 거뜬히 서서 이야기하는 엄청난 사교성을 가졌다. 베를린에서 생활하는 프리랜스 에디터 서다희 역시 스탠딩 문화는 결국 사교 네트워킹과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 동의한다. 독일의 경우 맥주를 탄산음료처럼 마시는 이들이 많아 ‘길맥’ 문화가 형성되어 있고 ‘임비스’라는 작은 식당에서 서서 먹는 일도 많지만 스탠딩 바 문화가 도드라지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이방인과 대화를 자연스럽게 이끄는 미국, 이탈리아, 스페인에 스탠딩 술집 문화가 더욱 발달한 것 같아요. 이탈리아에 여행갈 때마다 늘 생각했거든요. ‘자리가 이렇게 많은데 이탈리아 사람들은 왜 저렇게 바에 몰려가서 서서 먹고 마실까’라고요.”
내게 서서 마시는 술은 여전히 힘든 문화지만 Z세대는 기성세대와 전혀 다른 문법의 라이프스타일을 살고 있다. 지금까지 대다수가 술자리에서 원래 알던 사람들끼리 취할 때까지 마셨다면 퇴근길에 저녁 식사 삼아 혼자 맥주를 마시는 사람도, 술을 매개체로 두고 새로운 사람들과 어울리는 사람도 꾸준히 늘어난다면 스탠딩 술집 역시 새로운 선택지로 자리할 수 있을 것이다. 서서 마시는 술은 술자리의 무게를 한층 덜어준다. 실제로 스탠딩 술집이 승산이 있을지 원부술집, 모어댄위스키, 하루키술집 등을 운영하는 원부연에게 물어보았다. “젊은 친구들 역시 자리를 잡고 앉아서 도란도란 마시고 싶어 해요. 이성 헌팅과 같은 특별한 목적이 있는 술집은 앉든 서든 상관이 없지만요.(웃음) 최근에 위스키 바가 많이 생겼지만 아직 바 문화도 정착하지 못했어요. 우리는 나란히 앉기보단 테이블을 두고 마주 보고 앉아 술을 마시길 좋아해요. 스탠딩 술집은 아직 시기상조 아닐까요.”
2019년이 밝았지만 서서 술 마시는 문화는 트렌드의 잠재적 불씨에 그칠 것 같다. 입식 생활만 해온 외국인이 과거 한국에서 책상다리를 하고 먹는 식사 자리를 고통스러워했듯, 당분간은 ‘다른 문화’로 존재할 듯하다. 나는 마지막으로 창업자를 위한 온라인 커뮤니티에 “서서 마시는 술집을 창업하면 어떨까요?”라는 글을 남겼다. 댓글이 달렸다. “차라리 누워서 마시는 술집을 오픈하세요.”
- 에디터
- 조소현
- 포토그래퍼
- GETTYIMAGES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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