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로 팔리는 곡
‘나 군대 간다’라는 키워드로 곡이 팔린다. 지금 가요계는 완성도 있는 스토리텔링보다 강한 한마디에 매달린다.
“좋은 키워드(가사)가 좋은 멜로디를 넘어서는 상황이 늘고 있습니다. 기획된 가사가 멜로디를 이기고 있는 겁니다. 작곡 책을 샀는데 자꾸 작사 이야기를 해서 죄송하지만, 현장에서 가사의 중요성을 너무 많이 느끼고 있기 때문에 반복해서 말씀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멜로디는 좋은데 가사가 잘 들어오지 않는 노래보다 멜로디가 부족하더라도 가사가 입에 붙는 곡이 히트 치는 경우가 훨씬 많습니다.”
정기고, 소유의 ‘썸’ , 휘성의 ‘With Me’ 작곡가이자 현재 마마무 소속사 사장 김도훈이 지난 25년 동안의 작곡 노하우를 소개한 책 <김도훈 작곡법>에서 한 말이다. 심지어는 이런 일화도 있었다. “곡을 세일즈하는데 노래 제목(가사 키워드)이 얼마나 중요한지 경험했던 일이 있다. 하루는 이승기 소속사 관계자와 얘기하다 ‘나 군대 간다’는 노래를 준비 중이라고 했더니 그 자리에서 ‘좋은데요, 저희가 그거 할게요’라는 확답을 받았다. 나름 수백여 곡을 만들어봤지만 멜로디 샘플도 없이 노래 제목만으로 곡이 팔린 경험은 나로서도 처음이었다.”
‘나 군대 간다’는 2016년에 나온 곡이지만 2년이 지난 지금도 비슷한 노래는 나오고 있다. 지금 가장 인기 있는 발라드 중 하나인 하은의 ‘신용재’는 발라드의 상식을 깬 파격적 가사와 제목 덕분에 12월 내내 음원 차트 상위권에서 내려올 줄 몰랐다. 가사 내용은 포맨 신용재를 좋아하는 예전 여자 친구가 다시 나를 보게 하기 위해 신용재처럼 노래한다는 내용이다. 처음엔 음원 사이트가 실수로 가수 이름과 노래 제목을 바꿔 표기한 줄 알았다. 그런데 정말로 ‘신용재’가 제목이었다. 최근에 고음의 발라드가 큰 인기를 끈다는 경향도 감안해야겠으나 하은의 인지도나 화제가 되는 방식을 두루 고려할 때 히트의 일등 공신은 가사와 제목에 있었다고 봐야 한다.
키워드와 튀는 가사로 승부를 내는 노래가 늘고 있다. 당장 음원 사이트에 들어가봐도 제목과 가사를 놓고 기발함의 경쟁이 벌어진다는 느낌이다. 때로 신조어 각축장이란 생각도 든다. 예를 들어 아이콘 ‘이별길’은 ‘꽃길’을 이별에 대입해 반대 의미로 비튼 말이다. 트와이스 ‘Yes or Yes’는 이미 익숙한 말 ‘Yes or No’에서 거절 선택지를 삭제해 ‘답정너’ 의미로 축소한 말이다. 딱히 단어에 집착하지 않더라도 튀는 제목과 가사의 노래가 꽤 늘었다. 최근 발표곡 안에서만 따져도 임재현은 ‘내가 죽였어’라는 곡을 냈고, 딘딘은 ‘딘딘은 딘딘’을 냈다. 릴러말즈 신곡은 ‘태권도’다.
없던 사례는 아니다. 1995년 DJ DOC의 ‘머피의 법칙’은 잘 기획된 키워드가 어떻게 노래의 운명을 바꾸는지 보여주는 예다. 이 용어는 1949년에 만들어졌으나 DJ DOC의 노래를 통해 한국에 소개돼 국민적인 유행어로까지 쓰였다. 2012년 버스커 버스커의 ‘벚꽃 엔딩’도 ‘벚꽃’이라는 키워드가 히트의 결정적 동력이었다. 아이돌 트렌드와 반대되는 포크 무드와 세련된 멜로디도 큰 몫을 했지만 기본적으로는 봄만 되면 다들 ‘벚꽃’을 떠올리기 때문에 공감대와 몰입도가 높아 그만한 성공을 거뒀다.
비판하려는 것은 아니다. 우려되는 것은 선명한 컨셉이나 표현의 확장을 위해서가 아닌 튀기 위한 키워드 경쟁은 가사를 인기의 수단으로만 여기는 것 같아 눈살이 찌푸려지는 게 사실이다. 가사는 해당 가수의 생각을 담는 그릇이다. 음을 통해 음악성을 보여준다면 가사를 통해서는 얼마나 멋진 생각을 하고 있는지 보여줘야 한다. 많은 사람들은 단순히 음의 배열에서 뮤지션의 의도를 알아내지 못한다. 어떤 성향을 가진 사람이고 어떤 태도로 음악을 하는지 대부분 ‘가사’를 보고 판단한다. 가사를 오로지 홍보의 매개체로만 활용한다면 당장의 인기엔 도움이 될 수 있겠으나 이미지 하락이라는 장기적 손실을 얻는다. 멀리 보면 결코 득이 아니다.
물론 당분간의 가요계는 계속 키워드를 앞세울 것이다. 가장 인기 많은 중심 장르가 아이돌 댄스이기 때문이다. 댄스는 짧은 훅의 반복이 많고 그 구간의 가사가 제목이나 안무로까지 연결되는 경우가 많아 완성도 높은 스토리텔링보다 인상적인 주제어 하나가 더 중요할 때가 많다. 최근에 히트한 댄스곡이 주로 ‘Knock Knock’ ‘Really Really’ ‘빨간 맛’ ‘TT’ ‘뿜뿜’ ‘1도 없어’ 같은 제목인 데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
아이돌에게 키워드는 단순히 입에 잘 붙는 말 이상의 의미다. 아이돌은 장르보다 컨셉이 주목받기에 어떤 비트를 사용하는지보다 어떤 한 방 있는 키워드로 요약 가능한지가 먼저 주목받는다. 어떤 걸 그룹이 데뷔하면 언론은 그들이 어떤 음악적 특징을 가졌는지보다 컨셉이 소녀인지, 센 언니인지, 4차원인지 등을 먼저 주목한다. 중심엔 키워드가 있을 수밖에 없다.
계절 음악의 유행도 키워드 중심의 트렌드를 가속화시킬 것이다. 계절 음악은 날씨나 특정 단어를 염두에 두고 작곡하는 경우가 많아 아예 음악보다 가사가 앞서는 분야라고 말할 수 있다. 창작자가 아닌 듣는 입장에서도 기분이나 날씨에 따라 연상해 검색하기에 전체적 완성도 못지않게 특정 단어가 들어가느냐 마느냐가 대단히 중요하다. 지금쯤 수많은 작업실에서 봄과 관련된 신선한 키워드를 떠올리기 위해 많은 작사가들이 커피를 들이켜고 있을 것이다.
- 글쓴이
- 이대화(음악 칼럼니스트)
- 에디터
- 김나랑
- 포토그래퍼
- 이신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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