뷰티 트렌드

남편 넷? 그보단 시어버터!

2019.03.10

by VOGUE

    남편 넷? 그보단 시어버터!

    경고: 이 글은 그 자체로 더바디샵 시어버터가 원래보다 더 근사하게 느껴지게 하는 스포일러일 수 있음. 그러므로 내추럴 성분의 보습제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면 이 글을 읽기 전 해당 제품을 사용해볼 것을 권함.

    퉁테이야 여성 협회의 회원들. 이 여성들의 손에 의해 더바디샵 시어버터의 원료가 만들어진다.
    이들은 자신들의 노력으로 자식들을 교육시키고
    가정을 일군 가나의 멋진 커리어 우먼들이기도 하다.

    여전히 부족장의 허락이 있어야만 모든 게 이루어지는 마을, 남자는 평균 네 명의 부인을 거느리는 문화, 외지인이 버리고 간 빈 생수병을 서로 가지려고 다투는 아이들이 우르르 뛰어다니는 붉은 흙모래밭… 지구 반대편의 어느 마을에서 살아가는 여자들의 삶과 그 여자들의 삶을 바꿔놓은 시어버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남편은 필요 없고 아들만 주세요, 아멘!
    요즘 내 소원은 아들을 갖는 것이다. 남편은 필요 없고 아들만 주세요, 기도합니다, 아멘! 아들이 생기면 언젠가 G 바겐을 사서 같이 타야지. 롤렉스 요트 마스터는 당장 사야지. 어차피 아들이 있으면 내 가방이며 시계 같은 것은 다 물려줄 수 있는 거라고 핑계 댈 수 있으니까.

    근데 문제는… 아들을 낳으려면 남편이 필요한데 나는 남편은 필요 없고 아들만 갖고 싶다는 거다. 남편이필요 없는 이유는 아주 간단. 쓸모가 없으니까. 좋아하는 일이 있고, 그 일을 해서 나 하나는 충분히 건사 할 수 있으며, 오빠며 남동생, 남자 친구도 주변에 많고, 바이브레이터의 전원 스위치를 누를 손가락 힘도 아직 남아 있는데 남편은 둬서 어디에 쓰나? 있어봤자 성가시기만 할 게 분명함.

    믿을 수 있는 사람의 정자를 안전한 방법으로 수급할 수만 있으면, 아들을 낳아서 키우는 건 그리 큰 문제는 아닐 것 같은데… #신뢰 #안전 요 두 가지 요건을 충족시키는 정자 수급이 녹록지 않다는 게 지금 내가 넘어야 할 산. 흠… 시도를 꾸준히 하고는 있는데… 암튼 이 이야기는 이쯤 하고 본론으로 들어가자.

    #가나 #여성 #생각보다강력한 #시어버터
    내가 이 지면을 통해 여러분에게 하려는 이야기, 진짜 본론은 이거다. 매우 진지하니까 궁서체(대신 높임말)로 쓰겠다.

    “더바디샵 시어버터를 만드는 과정을 보기 위해 아프리카 가나에 다녀왔습니다. 가나 북쪽, 퉁테이야라는 작은 마을에서 여성들이 한 땀 한 땀 손수 시어 너트를 줍고, 깎고, 갈고, 녹여 시어버터로 만들더라고요. 더바디샵은 25년째 이 마을 여성 협회와 거래하고 있는데 시어버터를 대량으로 저렴하게 구매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먼 나라까지 가서 공정한 가격에 산대요. 더바디샵이 원료를 현지 가격보다 비싼가격에 구입해준 덕분에 지난 25년 동안 자식들을 교육시키고, 애들한테 좋은 옷 입히고 나도 좋은 옷 입을 수 있게 되었다며 제 이모뻘 되는 아주머니들이 함박웃음을 짓는데 진짜 우리 이모 같기도 해서 잠깐 울컥하더라고요. 시어버터를 만드는 19개 과정 중 밀가루 반죽 치대는 것 같은 과정을 1분여간 해봤는데 팔이 너무 아픕디다. 이렇게 이틀 정도를 일해서 한 덩어리의 시어버터를 만든다던데 그러고 났더니 그 뒤로는 더바디샵 시어버터가 기특해 보이기도 하고, 소중한 존재로 느껴져서 그냥 화장품이나 보습제라기보다는 좀더 대단한 존재처럼 느껴지더라고요. ‘머리부터 발끝까지, 피부부터 삶 전체까지 모두를 케어합니다’라든가 ‘생각보다 강력한 시어의 힘’ 같은 문구가 더 바디샵 시어버터 광고에는 항상 등장하는데 그게 무슨 말인지 저는 이제 확실히 알 것 같습니다. 우리도 #Carewithshea!”

    퉁테이야 마을 사람들은 더바디샵에 진심으로 고마운 마음을 갖고 있는 듯  우리 일행을 위해 축제에 가까운 환영 행사를 열어주었다.

    근데 잠깐! 저, 질문 있습니다.
    첫째, 그 이모님들이 시어버터를 만들어 자식들을 공부시키고 좋은 옷을 입힐 동안 남편들은 무얼 했나요? 둘째, 기업은 이윤을 남기기 위해 존재하는 조직인데 더바디샵 직원들은 왜 원료비를 더 깎지는 못할지언정 더 비싸게 사고 있죠? 사장님이 그걸 알고 있나요?(내가 더바디샵 사장이면 직원들 이미 다 해고…) 셋째, 이건 제 주변 남자들에게 하는 질문. 다들 왜 나의 ‘정자 페어 트레이드’ 제안을 거부하는 건가요?

    1번 질문에 대한 답: 남편들은 무얼 했냐면 진짜 궁금하지 않나. 여자들이 시어 너트를 채집하고 하나하나 시어버터로 만들고, 그걸 팔아 자식들을 공부시키고 마을을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드는 동안 남편들은 무얼 했을까? 북부 가나 커뮤니티를 위한 자 금 단체(NOGCAF)의 회장직을 맡고 있는 마담 파티 폴의 대답은 이렇다. “남자들은 더 남자다운 일을 합니다. 남자들은 농장을 돌보거나 나무를 베거나… 더 힘이 필요한 일을 하죠. 시어 너트를 줍고, 시어버터를 만들고, 아이들을 키우는 일은 여자들의 몫이죠. 게다가 보통 한 남자는 네 명의 부인을 거느립니다. 아이는 엄마에게 소속되어 있어요.”

    “네? 뭐라고요? 그게 말이 됩니까?”

    말을 자르고 끼어들고 싶었지만 마담 파티 폴이 너무나 태연하게 말을 이어가고 있었고, 내 영어 실력은 논쟁을 벌이기엔 턱없이 짧아 끼어들 기회를 놓쳤다. 엄청나게 건조한 사막의 모래바람 속에 살면서도 이곳 여성들이 좋은 피부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시어버터를 수시로 바르기 때문이라는 이야기, 아프리카에서는 시어 너트가 생명의 열매라 우리나라의 홍삼처럼 아이가 연약하거나 몸이 좋지 않으면 무조건 시어 너트를 달여 먹이거나, 시어버터로 몸을 문지른다는 이야기 등등 수없이 많은 이야기가 오고 갔지만 내 귀에는 잘 안 들림. 왜냐고? 나의 뇌는 여성과 남성의 일이 완벽하게 구분되어 있고, 육아는 100% 여자의 몫이며, 남자는 네 명의 부인을 거느린다는 파티 폴 회장님의 이야기에서부터 이미 초점을 잃었으니까. 몹시 몽롱한 상태로 20여 분쯤 지났을까. ‘아아, 다 귀찮아졌어… 이제 그만 집에 가고 싶다’ 싶은 기분이 밀려올 때쯤 공식 인터뷰는 끝이 났고 모두가 주섬주섬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찰나, 영국에서 온 더바디샵의 누군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한 남자가 평균 네 명의 아내와 산다면 그 네 명의 아내들은 서로 싸우지 않나요?”

    마담 파티 폴 회장의 옆에 앉아 있던 마담 아피세투 야쿠부가 태연하게 답했다.

    “나는 내 남편의 첫 번째 부인이에요. 가족의 큰 행사가 있거나 하면 다른 세 명의 부인과 아이들이 한집에 모이기도 합니다. 그럴 때 서로 경쟁하거나 하지 않아요. 우리는 각자의 가정(아이들과 자기 자신을 뜻함)이 있고, (남편에게는) 역할이 나뉘어 있으니까요. 이를테면 저는 내 남편의 첫 번째 부인이기 때문에 모든 부인 중 남편을 가장 잘 알죠. 힘들거나 어려운 일을 당하면 그는 저를 가장 먼저 찾아옵니다.”

    잠시 모두 침묵. 아마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듯한 질문자가 공손히 대답했다.

    “네, 그렇군요. 이렇게 우리들을 위해 시간을 내주셔서 고맙습니다.”

    오올, 말로만 듣던 ‘매너’라는 게 저런 거였군! 다른 문화권에 있는 사람에게 내 기준만 들이대며 성급하게 따지지 않는 것… 내가 만약 솰라솰라 영어를 한국어처럼 할 수 있다면 분명 거기 대고 입방정을 떨었을 것이다. “어머, 그런 게 어딨어요? 힘들 때만 올 거면 오지 말라고 해요. ‘내가 니 엄마야?’라고 말하라고요!”

    더바디샵의 도움으로 퉁테이야 마을에 생긴 의료 시설. 이 시설이 생기기 전까지 누군가 아프면 민간요법에 의존하거나 속수무책으로 질병을 견디는 수밖에는 없었다고 한다.

    2번 질문에 대한 답: 아니타 로딕 여사님, 제 말 맞나요? 지금은 여러 회사가 시행하고 있는 ‘커뮤니티 트레이드(페어 트레이드, 공정 무역 등으로 부르기도 한다)’를 더바디샵이 시작한 건 1987년이었다. 화장품업계에서는 최초, 개념이 명확히 정립되기도 전이었던 그 시절에 ‘커뮤니티 트레이드(CT)’는 ‘Trade(교역, 거래)’가 아닌 ‘Aid’라 불렸다. 가나산 시어버터와 더바디샵의 인연이 시작된 건 1990년. 이제는 고인이된 더바디샵의 창립자 아니타 로딕 여사가 한 TV 프로그램 녹화를 위해 방문한 가나에서 가나의 여성들이 시어버터를 만들고 사용하는 것을 보았고, 더바디샵은 1992년부터 지금까지 25년간 커뮤니티 트레이드 방식으로 시어버터 원료를 가나에서 사들이고 있다. 확인할 방법은 없지만 1990년, 아니타 로딕이 가나에서 느낀 건 내가 퉁테이야에서 느낀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 같다.

    충격 1. ‘같은 여성이건만, 나와 이렇게 다른 삶을 사는 사람이 있다니!’

    충격 2. ‘그건 내가 잘나고 저 사람이 못나서가 아니라 그저 태어난 공간과 문화가 달라서일 뿐인데!’

    생각 1. ‘그녀들의 삶이 조금 더 나아지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생각 2. ‘그녀들이 지금보다 힘을 가질 수 있게 하려면(Women Empowerment) 뭐가 젤 먼저 필요하지?’

    근데 의문. ‘근데 이렇게 덥고 모래바람이 부는 이 환경에서 저 여자들은 피부가 왜 저렇게 좋지?’

    이런 사고의 흐름에 따라 시어버터의 커뮤니티 트레이드가 시작되었고, 25년 동안 지속되지 않았을까? 아니타 로딕 여사는 이미 고인이 되었으므로 확인할 방법은 없지만 아마 내 말이 맞을 것이다.

    시어버터를 만드는 과정. 시어너트는 껍질을 벗기고, 잘게 부수고, 반죽을 하고 버터의 형태가
    될 때까지 총 19단계를 거쳐 완성되는데 시어 너트를 잘게 부수는 일 외에는 모두 사람의 손으로
    이루어진다. 한 사람당 이틀을 꼬박 일하면 한 덩어리(1kg 내외)의 시어버터 원료를 만들 수 있다.

    3번 질문은 없던 걸로… 가나까지 가서 시어버터 반죽도 해보고, 교과서에서만 배운 ‘다른 문화권’이라는 게 어떤 것인지도 알게 되고… 나도 이번에 느끼는 바가많다. 이번에 느낀 점을 정리하자면 이 책 한 권을 다채워도 모자랄 판이지만 대략 몇 개만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느낀 점 1. 나는 아들을 가질 자격이 없다. 방정맞은 입하며, 참을성 없는 성격하며, 아들을 낳아도 잘 키울 확률이 낮음.

    느낀 점 2. 만약 자식을 낳는다면 딸이 더 좋을 것 같다. 왠지 딸을 낳는 게 아들을 낳는 것보다 최종적으로는 이기는 게임이라는 생각이 듦. 이거 봐, 이거봐. 자식을 갖고 게임 운운하잖아? 그러니 나는 아들이든 딸이든 자식을 가질 자격이 없음.

    느낀 점 3. 정신을 차리자. 백마 탄 왕자, 숲속의 미녀를 깨우는 왕자, 내 신발 한 짝을 들고 온 도시를 뒤져 나를 찾아내는 어젯밤 클럽남(알고 보니 왕자)은 세상에 없다. 설사 있다 해도 공주들 몫이거나, 온다해도 머리 아플 확률이 높다. 정신을 차리자. 세상 대부분의 남자는 그냥 남자일 뿐이다.

    느낀 점 4. 돈을 벌자. 남에게 의지할 생각 말고 나의 시어 너트를 따고, 나의 시어버터를 만들자. 그게 우먼 임파워먼트, 아니고 나 자신 임파워먼트의 첫 번째 요건이다. 그리하여, 돈을 많이 벌게 된다면 G 바겐 따위 욕심내지 말고 더 멋진 생각을 할 줄 아는 사람이되자. 이왕이면 돈을 많이 많이 버는 사람이 되어 나보다 좋지 않은 환경에서 살고 있는 사람의 삶을 더 좋아지게 만드는 사람이 되자. 고(故) 아니타 로딕처럼.

    느낀 점 5. 까불지 말자. 모두의 삶과 처한 환경은 다르고, 옳고 그름을 내 기준으로 가릴 수 없다. 앞으로 까불지 말자. 자기 입장만 내세우며 입방정을 떠는 이에게 롤렉스 요트 마스터를 채운다 한들 돼지 목에 진주와 다를 게 무엇이란 말인가? (그러므로 나는 아들뿐 아니라 요트 마스터도 가질 자격이 없다.) 입은 다물고, 마음은 열자. 그게 매너고, 진짜 멋이다.

    퉁테이야 마을의 부족장 할아버지. 부족장의 허락없이는 이 마을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우리 일행에게 풍요를 상징하는 코카 열매를 선물로 하사하셨다.

    결론은 사죄의 말씀 서두에서 남편은 필요 없다고 입방정을 떤 것, 많은 분들께 사과드린다. 생각해보니 세상의 모든 남자는 누군가의 남편이기에 앞서 누군가의 귀한 자식이기도 한데, 너무 내 입장만 생각하고 입방정을 떨었다. 세상의 많은 여성들께서는 부디 너그러이 용서해주시기를. (그들이 이 글을 볼 리 없지만) 내 주변의 몇몇 남자들에게도 용서를 구하고 싶다. “남편은 필요 없고, 아들만 낳고 싶은데 정자 수급에 협조해줄 수 있어?”라고 내가 물었을 때 며칠 뒤 진지한 표정으로 다시 나타나 “생각해봤는데 좀 힘들거 같아. 미안…”이라고 했던 세 남자에게 특히 미안… ‘아님 말고’ 식으로 던진 말이었는데 너무 진지하게 고민해서 “응, 협조할게!”라고 하면 어떡하나, 솔직히 조금 쫄았습니다. 앞으로는 ‘싫음 말고’ 식으로 아무 말이나 던지면서 ‘센 척’하지 않을게요. 부디 친구로 오래남아주세요.

    세상은 묵묵한 바보들에 의해 더 촉촉한 곳이 된다. 이제 끝을 맺어야 할 시점인데 어떻게 끝을 내야 할지 잘 모르겠다. ‘가나로 가서 시어 너트를 따고, 시어버터를 만들어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뿌듯한 기분으로 시어버터를 바르고 촉촉한 피부가 되었습니다. 사랑해요, 시어버터! 끄읕!’ 이랬어야 하는데 어쩌다 이게 여기까지 오게 됐을까. 어쨌거나 모든 걸 관통하는 결론은 하나인 것 같다.

    세상은 앞에서 까불고 나불대는 사람들이 아니라 뒤에서 묵묵히 내 것을 지키는 사람들, 바보 같은 짓을 먼저 하는 사람들에 의해 조금씩 더 살 만한 곳이 되어간다는 것. 제값보다 비싼 값에 원료를 사들이기 시작한 ‘바보’ 브랜드가 한 마을 사람들의 삶을 완전히 바꾸어놓은 것처럼, 그 덕분에 한 마을 사람들에게 병원이 생겼고, 학교가 생겼으며, 식수 공급 시설이 생겼으며 아프리카 전체로 보면 4만9,000명의 삶이 더 나아지게 된 것처럼, 남편이 ‘딴짓’을 하는 동안 묵묵히 가정을 지킨 엄마가, 시어버터를 만들어 번 돈으로 자식들을 학교로, 병원으로, 또 다른 세상으로 보낸 것처럼. ‘14일 만에 주름을 없애줘요!’ ‘피부 진피층의 수분까지 87% 증가시킵니다’ 같은 요즘 마케팅 용어와는 거리가 먼 시어버터가 수백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아프리카 여성들의 피부를 지켜준 것처럼.

      포토그래퍼
      조선희
      글쓴이
      심정희(보앤샘 홀더스 대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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